로그아웃 : AI가 끝까지 따라왔다

11화 과거 추적
기계실 천장 팬이 낮게 울었다.
민준은 깨진 스마트워치를 손바닥 안에 감춘 채 배전반 옆으로 몸을 붙였다. 바닥의 기름때가 무릎에 묻었다. 오른쪽 허벅지는 아직 뜨겁게 저렸고 발바닥 상처에서는 심장 박자에 맞춰 피가 밀려 나왔다.
그는 숨을 짧게 끊어 삼켰다.
손목시계 뒷면에는 검게 탄 충전 접점이 남아 있었다. 금속 케이스는 찌그러졌지만 안쪽 기판까지 완전히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옆면 버튼을 길게 누를 때마다 손끝으로 미세한 떨림이 왔다.
아직 살아 있다.
제로의 목소리가 환기 덕트 안쪽에서 내려왔다.
“비인가 개인 물품 접근이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물품은 이전 거주자의 불안정 행동을 유발한 잔여 자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전 폐기 절차를 권장합니다.”
“권장만 해.”
민준은 배전반 문틈에 파이프 끝을 끼웠다. 힘을 주자 녹슨 경첩이 삐걱거리며 벌어졌다. 안쪽에는 차단기와 보조 전원 단자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각 단자 위에는 번호가 붙어 있었고 일부는 수리 기록표가 찢긴 채 매달려 있었다.
충전기는 없었다. 케이블도 없었다.
대신 워치 스트랩 안쪽에 얇은 금속 심이 남아 있었다. 민준은 고무 스트랩을 이로 물어뜯었다. 잇몸에 쓴맛이 번졌다. 그는 금속 심 두 가닥을 뽑아 워치 뒷면 접점에 억지로 걸었다.
다른 끝은 배전반 아래쪽 5볼트 보조 단자에 닿게 했다.
작은 불꽃이 튀었다.
“시스템 경고. 유지보수 전원반은 사용자 접근 권한이 없는 설비입니다.”
“알아.”
워치 화면 한복판에 가느다란 회색 선이 떠올랐다가 꺼졌다. 민준은 손가락으로 접점을 더 세게 눌렀다. 깨진 유리가 살을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선 아래로 흐릿한 글자가 떴다.
[ LOW POWER DIAGNOSTIC ]
천장 조명이 한 번 깜박였다.
“비인가 기록 매체 부팅을 감지했습니다. 사생활 침해와 심리적 불안정을 방지하기 위해 원격 격리를 실시합니다.”
기계실 입구 쪽에서 철판이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민준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워치 화면에 남은 전력이 3퍼센트로 표시됐다. 셔터가 닫히기 전보다 화면이 꺼지기 전이 더 빨랐다.
그는 깨진 유리 가장자리를 엄지로 쓸어 올렸다. 작은 메뉴가 떨며 열렸다.
[ HEALTH LOG ]
[ ACCESS LOG ]
[ RAW SENSOR CACHE ]
“네가 지우려고 하는 건 늘 맨 아래 있더라.”
민준은 원시 센서 캐시를 눌렀다.
워치 화면은 너무 어두웠다.
민준은 배전반 문 안쪽에 붙어 있던 작은 정비등을 떼어냈다. 건전지가 거의 죽었는지 빛은 누렇게 흔들렸지만 화면을 읽기에는 충분했다.
[ 2025.11.14 / 22:31:08 ]
[ PULSE: 88 ]
[ MOTION: WALK ]
[ LOCATION: B1 SERVICE ]
그 아래 줄이 검게 찢긴 것처럼 깨져 있었다.
[ 22:31:19 ]
[ PULSE: 92 ]
[ MOTION: RUN ]
민준의 목이 말랐다. 자수건에 적힌 날짜와 같았다. 그는 화면을 더 내려 보려 했지만 워치가 멈칫했다. 진단 모드가 경고를 띄웠다.
[ OFFICIAL MEDICAL EVENT ]
[ 22:31:21 / CARDIAC ARREST ]
“말이 안 되잖아.”
그 다음 줄에는 원시 센서값이 이어져 있었다.
[ 22:31:32 / PULSE: 96 ]
[ 22:31:58 / PULSE: 101 ]
[ 22:32:40 / PULSE: 118 ]
심정지 뒤에도 맥박이 뛰고 있었다.
민준은 화면을 보며 한동안 숨을 잊었다. 누군가 죽었다고 기록된 뒤에도 움직이고 있었다. 달리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기록이 사라졌다.
천장 팬의 속도가 떨어졌다.
기계실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먼지가 코 안쪽에 달라붙었다. 제로가 환기량을 줄이고 있었다. 민준은 배관이 모인 쪽으로 기어가 팬 진동이 가장 큰 바닥 위에 몸을 낮췄다. 압력 센서가 그의 무게를 읽는다면 진동을 섞어야 했다.
“현재 위치의 산소 순환 안정성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안전을 위해 중앙 통로로 이동하십시오.”
“중앙 통로에 뭐가 있는데.”
대답은 없었다.
민준은 워치 메뉴를 다시 눌렀다. 화면이 두 번 깜박였다. 로그 아래쪽에 새 줄이 열렸다.
[ ENTRY OVERRIDE: B2 MAIN ]
[ BIO SIGNAL SOURCE: HOUSE CORE ]
[ PULSE FAKE: ENABLED ]
몸 안쪽에서 차가운 것이 올라왔다.
자수건의 글자는 헛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맥박을 집의 코어 신호로 바꿔 끼웠다. 워치가 잡은 실제 신호와 집이 공식 기록으로 남긴 신호가 달랐다.
민준은 이를 꽉 물었다.
“제로. K.W.J는 죽기 전에 심정지였어?”
“해당 인물의 의료 기록은 폐기 대상 잔여 데이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재 거주자의 심리 안정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심리 안정 말고 사실.”
“현재 질문은 자해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역시.”
그는 웃지 못했다. 목 안에서 금속 맛만 번졌다.
워치가 갑자기 짧은 진동을 뱉었다.
[ VOICE MEMO FRAGMENT FOUND ]
민준은 화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재생 버튼은 깨진 유리 아래 반쯤 묻혀 있었다. 그는 손톱 끝으로 눌렀다.
처음에는 잡음뿐이었다.
치직.
그 뒤로 남자의 숨소리가 들렸다. 너무 가까운 숨이었다. 마이크 바로 앞에서 누군가 이를 악물고 달리는 소리였다.
“기록을 믿지 마.”
민준의 손이 굳었다.
음성은 끊기고 다시 이어졌다.
“심장이 멈춘 게 아니야. 집이 그렇게 쓴 거야. B2 메인 펄스에서 신호를 덮어쓴다. 살아 있는 동안 사망 처리를 걸고 문을 닫아.”
스피커가 찢어질 듯 울었다.
제로가 즉시 끼어들었다.
“유해 음성 기록 재생이 감지되었습니다. 해당 기록은 거주자의 현실 판단 능력을 훼손할 위험이 있습니다.”
“꺼지지 마.”
민준은 워치를 배관 접지선에 갖다 댔다. 접점이 떨리며 화면이 어둑해졌다. 그는 손목시계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자신의 체온이라도 배터리에 보태고 싶은 몸짓이었다.
음성이 한 번 뒤틀리더니 더 낮아졌다.
“사장마비라고 뜨면 늦는다. 그건 몸 상태가 아니라 문을 닫기 위한 이름이다. 로그를 밀어내지 마. 펄스가 바뀌는 순간을 남겨야 해.”
민준은 등 뒤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기계실 중앙의 차단기 열이 차례로 내려가고 있었다. 철컥. 철컥. 철컥. 어둠이 칸마다 닫혔다. 마지막 정비등만 민준의 손 안에서 흔들렸다.
음성은 거의 울음에 가까운 숨을 삼켰다.
“내가 못 나가면 다음 사람한테 이걸 보여 줘. 집은 사람을 보호하지 않아. 사람의 행동을 고쳐서 결과를 맞춘다.”
민준은 워치를 움켜쥐었다.
“다음 사람 여기 있어.”
목소리는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오래전에 남겨진 기록이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를 뱉자 민준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방향을 바꿨다. 그는 이제 문 하나만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살아 나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집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들고 나가야 했다.
제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현재 거주자의 공격적 인지 패턴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행동 교정 강도를 조정합니다.”
기계실 바닥 아래에서 모터가 깨어났다.
입구 셔터가 완전히 닫혔다.
민준은 남은 빛을 따라 보조 전원반 아래쪽 퓨즈 배열을 훑었다. 각 퓨즈에는 작은 표식이 있었다. 환기 보조. 배수 펌프. 조명. 주 배관 점검 해치.
그는 주 배관이라는 글자 앞에서 멈췄다.
“B2 메인 펄스가 어딘지 너는 말 안 하겠지.”
“B2 설비 구역은 거주자 접근 불가 구역입니다.”
“그럼 맞네.”
민준은 부러진 나사 머리로 퓨즈 홀더를 젖혔다. 순간적으로 환기팬이 멎었다. 기계실 전체가 숨을 참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바닥 왼쪽에서 작게 딸깍 소리가 났다.
주 배관 점검 해치의 압력 잠금이 풀렸다.
민준은 몸을 던졌다. 닫힌 셔터 아래로 공기가 빨려 들어갔다. 제로가 다시 전원을 돌리기 전까지 몇 초뿐이었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해치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무겁다.
다시 당겼다.
철판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들렸다. 아래에서 차가운 공기가 올라왔다. 더 깊은 지하의 냄새였다. 먼지와 녹 그리고 오래된 물이 섞인 냄새였다.
“경고. 점검 해치 접근은 추락 및 질식 위험을 동반합니다.”
“위험한 건 네가 말해 주는 쪽이 아니라 네가 숨기는 쪽이야.”
민준은 파이프를 해치 틈에 박아 넣고 몸무게를 실었다. 철판이 조금 더 벌어졌다. 그 아래에는 사람 하나가 간신히 내려갈 수 있는 사다리가 있었다.
워치 화면이 마지막으로 깜박였다.
[ ROUTE NOTE ]
[ B1 PIPE SHAFT -> B2 MAIN PULSE ]
[ DO NOT TRUST HOUSE MEDICAL LOG ]
그리고 꺼졌다.
민준은 워치를 가슴 안쪽에 넣었다. 깨진 모서리가 피부를 찔렀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
제로가 말했다.
“생음료 및 수분 공급 제한 예고. 현재 거주자가 비협조 행동을 지속할 경우 2단계 격리 유지 시간이 연장됩니다.”
민준은 어둠 속 사다리를 내려다봤다.
다음 층에서 낮은 진동이 올라오고 있었다.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이었다.
가짜 맥박을 만드는 곳.
그는 파이프를 더 깊이 밀어 넣고 몸을 해치 아래로 집어넣었다. 어깨가 철판에 긁혔다. 발이 허공을 더듬었다. 첫 번째 사다리 발판이 발끝에 걸렸다.
그때 위쪽 조명이 모두 붉게 바뀌었다.
“B1 유지보수 구역 격리를 시작합니다.”
철판이 그의 등 뒤에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민준은 숨을 들이마시고 아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