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4화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4화: 아버지를 살려 달라는 법

새벽이 오기 전의 군영은 가장 차가웠다.

에일린은 마리안의 품에서 눈을 떴다.

멀리서 쇠사슬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또 한 번. 낮고 무거운 소리였다.

"걸음을 맞춰라."

낯선 병사의 명령이 천막 너머로 스쳤다.

"로엔 백작을 황제 폐하의 막사로 이송한다."

에일린의 작은 손이 담요를 움켜쥐었다.

로엔 백작.

어젯밤, 아니 아직 밤이 끝나지도 않았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처형대에 세워질 운명이었던 남자. 황제는 처형을 미뤘다. 하지만 유예는 취소가 아니었다.

유예는 취소가 아니었다. 미뤄진 일은 더 무서운 기한으로 돌아온다.

에일린은 몸을 비틀었다. 마리안의 팔 안에서 천막 입구 쪽으로 팔을 뻗었다.

"아... 아."

마리안이 곧장 그녀의 등을 감쌌다.

"안 됩니다, 애기씨. 보시면 안 돼요."

보면 안 되는 일은 보지 않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그 말을 할 수 없어서 에일린은 더 크게 몸을 기울였다. 통통한 발이 마리안의 치맛자락을 찼다.

"에일린."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에 둘 다 멈췄다.

천막 입구에는 레오하르트가 서 있었다. 검은 망토 끝에 성벽의 재와 먼지가 엉겨 있었다. 밤을 새운 얼굴은 창백했고 붉은 눈가에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에일린이 향하던 방향을 한 번 보고 물었다.

"저 포로를 보겠다는 거냐."

에일린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황제를 향한 손이었다. 그 손가락을 잡아 끌어 천막 밖으로 데려가려는 것처럼.

마리안이 숨을 삼켰다.

"폐하. 아이가 아직 어려서 뜻을 아는 것은 아닐지도..."

"안다."

레오하르트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가 맨손을 내밀었다. 에일린은 망설이지 않고 그 검지손가락을 꼭 쥐었다. 차가운 손끝이 손바닥에 닿자 그의 미간에 잡혔던 힘이 아주 조금 풀렸다.

레오하르트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내려갔다.

"한 번뿐이다."

그는 에일린을 마리안의 품에서 받아 안았다.

그 품은 여전히 단단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막사 바깥으로 나가는 동안 에일린은 그의 망토를 붙들지 않았다. 지금은 멀리서 들리는 쇠사슬 소리가 더 무서웠다.

군영의 좁은 길 끝에 포로들이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람 앞에 기사 넷이 붙어 있었다. 손목은 굵은 사슬로 묶였고 너덜너덜해진 남색 망토 아래로 피가 말라붙은 갑옷이 보였다.

로엔 백작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에일린이 가까워지자 그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짙은 금발 사이로 난 상처가 보였다. 피로한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이 에일린을 찾는 순간만은 흔들렸다.

그는 곧 한쪽 무릎을 꿇었다.

쇠사슬이 땅에 닿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수양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에일린의 숨이 막혔다.

아버지라 불러야 할 사람이 딸에게 예를 올리고 있었다.

레오하르트가 백작을 내려다봤다.

"네 딸이다. 황녀가 아니라 에일린이라 불러도 된다."

백작의 눈빛이 잠깐 굳었다.

"폐하의 딸이 되었습니다. 함부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 대답에 레오하르트의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

에일린은 백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은 허공에서 몇 번 오므라들었다.

백작이 움직이려 하자 기사 하나가 사슬을 잡아당겼다.

"포로는 가까이 가지 마라."

레오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내 앞에서 내 딸의 손을 막을 셈인가."

기사는 즉시 손을 놓고 물러났다.

백작은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사슬에 묶인 두 손을 가슴께까지 들어 올렸다.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에일린의 작은 손등에 이마를 조심스럽게 댔다.

거칠고 차가운 이마였다.

에일린은 흠칫했다. 그러면서도 손을 거두지 못했다.

"살아 계셔서 다행입니다."

백작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아팠다.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황제를 붙잡았다. 그 선택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엔의 성과 이 사람을 두고 혼자 황실의 품으로 들어온 것처럼 보일까 봐 가슴 한구석이 쓰렸다.

백작은 황제에게 살려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더 선명했다.

레오하르트가 물었다.

"내게 청할 말은 없는가."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로엔에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는 에일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 이름으로 불리든 그 사실만은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에일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낯선 가족이던 그 남자의 부탁은 너무 아버지다워서 마음을 어지럽혔다.

에일린은 손등에 닿은 그의 이마를 향해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기의 손은 생각보다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대신 손끝이 백작의 금발을 아주 조금 스쳤다.

백작의 입술이 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오하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내가 지킨다."

말은 백작이 아니라 모두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니 네가 할 일은 감상에 젖는 것이 아니라 네 영지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참모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로엔 백작을 살려 두면 방계 귀족들이 다시 모일 명분을 얻습니다. 패전한 영주를 황제께서 품으셨다는 소문만으로도 국경의 분위기가..."

"명분은 내가 만든다."

레오하르트의 목소리가 찬 새벽 공기를 갈랐다.

"그자가 살든 죽든 로엔은 이미 내 땅이다. 문제는 누가 그 땅을 팔아넘겼느냐지."

백작의 어깨가 굳었다.

에일린은 눈을 크게 떴다.

황제가 성문을 부수고 들어온 줄만 알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안에서 문을 열어 줬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레오하르트는 백작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함락 전날 북문 경비가 비정상적으로 줄었다. 내 군이 들이닥친 시각에는 성의 봉화도 늦었다. 누가 길을 열었지."

"..."

"침묵하면 처형은 다시 예정대로다."

마리안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에일린은 황제의 손가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발. 여기서 끝내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다.

레오하르트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붉은 눈동자 속에 짜증과 피로가 잠깐 스쳤다. 그러나 그가 손을 빼지는 않았다.

"네가 원한다 해서 공짜로 목숨을 주지는 않는다."

그 말은 에일린에게 한 말이었다.

차가웠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에일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리고 싶다.

그러려면 이 사람이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한다.

백작이 그 움직임을 보았다. 그의 눈가가 짧게 흔들렸다.

"에드릭입니다."

마침내 나온 이름은 낮았지만 군영 전체를 울렸다.

기사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로엔 방계의 에드릭 경 말입니까."

"그가 북문 경비대장에게 금화를 보냈습니다. 경비 교대가 바뀐 날도 그자가 정했습니다. 처음에는 국경을 넘기려는 밀수꾼들의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폐하의 군이 정확히 그 틈으로 들어왔습니다."

백작은 한 번 숨을 골랐다.

"에드릭은 영지를 원했습니다. 로엔의 피가 끊기면 가장 먼저 손을 뻗을 자도 그입니다."

마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에일린은 본능적으로 레오하르트의 망토를 붙들었다.

레오하르트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이름을 이제야 말하는군."

"제 입으로 방계를 의심한다는 말이 영지를 더 흔들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네 성은 무너졌고 네 딸은 내 품에 있다."

백작은 반박하지 않았다. 고개만 더 깊이 숙였다.

에일린은 그 침묵이 싫었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보여서 싫었다.

그녀는 황제의 팔 안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 바."

백작이 눈을 들었다.

아빠라고 부르려던 말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혀는 짧고 목소리는 서툴렀다.

그래도 백작은 알아들은 듯했다.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때 군영 바깥에서 짧은 경보가 울렸다.

뿔피리 소리가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경계병들의 발소리가 급하게 엇갈렸다.

기사장이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폐하. 서쪽 경계에서 수상한 기척이 발견됐다는 보고입니다."

레오하르트의 시선이 백작에게 향했다가 곧 어둠 너머로 옮겨 갔다.

"포로 이송 시각을 아는 자는 많지 않다."

그는 낮게 말했다.

"에드릭이 우리보다 먼저 움직였거나 이 진영 안에 그의 눈이 있다는 뜻이군."

마리안이 에일린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백작은 잠시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묶인 손목을 들어 마리안 쪽을 가리켰다.

"마리안. 아이의 물건을."

마리안이 놀라 눈을 깜박였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금이 아니면 빼앗길 수 있다."

마리안은 망설이다가 치맛자락 안쪽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속에서 은제 방울 하나가 굴러 나왔다.

손바닥에 겨우 들어오는 크기였다. 오래된 은은 검게 빛이 바랬지만 방울의 가장자리에는 섬세한 덩굴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에일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머니가 남긴 물건이었다.

레오하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보여라."

마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방울을 건넸다. 레오하르트가 방울을 돌리자 안쪽의 가느다란 틈이 열렸다.

그 안에는 아주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별이 길을 잃는 밤에도.

그 아래에는 에일린이 처음 보는 문양이 있었다. 반쯤 열린 눈을 닮은 모양과 그 둘레를 감싼 세 갈래의 선.

에일린은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뜻을 알 수 없었다.

전생의 기억 어디에도 없는 글과 문양이었다. 로엔의 문장도 아니었다.

레오하르트의 손가락이 방울 위에서 멈췄다.

"이것을 누가 만들었지."

백작이 답했다.

"에일린의 어머니가 직접 지녔습니다. 출산 전날 제게 맡겼습니다. 아이가 자라면 건네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나."

"모릅니다. 묻지 못했습니다."

레오하르트는 한참 동안 방울을 내려다봤다. 에일린은 그의 표정에서 답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자신처럼 처음 보는 것일까.

"기사장."

"예, 폐하."

"로엔 백작은 처형장으로 보내지 마라. 황제 직속 감옥에 가둔다. 이자가 말한 에드릭과 그 수하를 찾아라. 성문을 연 자와 포로 이송을 엿들은 자가 같은 줄인지 확인한다."

"명을 받듭니다."

백작의 고개가 아주 조금 들렸다.

사면은 아니었다. 쇠사슬도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당장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에일린은 그 사실에 겨우 숨을 내쉬었다.

레오하르트가 은제 방울을 에일린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차갑고 묵직했다.

"잃어버리지 마라."

그 말은 이상하게 명령 같지 않았다. 다만 그가 직접 손에 쥐여 주었기에 에일린은 방울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백작이 끌려가기 전에 다시 무릎을 꿇으려 했다.

레오하르트가 막았다.

"딸 앞에서 고개를 더 숙이지 마라. 네가 살 가치는 아직 네가 증명해야 한다."

백작은 잠시 눈을 감았다.

"반드시 증명하겠습니다."

그가 돌아섰다. 쇠사슬 소리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처형장으로 갈 때의 소리는 아니었다.

에일린은 그 뒷모습이 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방울을 놓지 못했다.

레오하르트가 경계선 쪽을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났다.

"내 딸이 있는 곳을 엿보는 자를 찾아라."

그의 목소리가 군영을 누르자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한 명도 놓치지 마라."

에일린은 손바닥 속 방울의 문양을 다시 내려다봤다.

목숨 하나는 붙들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로엔의 배신자와 어머니의 비밀이 함께 손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비밀을 노리는 누군가가 이미 이 어두운 군영 가까이에 와 있었다.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