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3화: 수양딸의 이름
황제의 막사 밖은 조용했다.
조용해서 더 무서웠다.
에일린은 마리안의 품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막 너머의 목소리들은 낮았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선명했다.
"로엔의 방계가 아이의 신병을 요구할 겁니다."
기사장의 목소리였다.
"국경 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직계 혈통을 손에 넣으면 로엔 영지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에일린의 작은 손이 마리안의 옷자락을 구겼다.
신병. 요구. 권리.
아기는 울음소리도 제대로 못 내는데 세상은 벌써 그녀를 서류 한 장처럼 옮기려 하고 있었다.
전생의 한유진은 계약서 검토를 좋아하지 않았다. 읽어도 손해 보는 쪽이 자기라는 걸 아는 계약서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 생에는 계약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귀족들의 웃는 얼굴이었다.
"포로로 등록하면 폐하의 전리품입니다. 하지만 포로는 협상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남자가 말했다.
"로엔의 피를 보존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 후견권을 요구할 자들이 나올 겁니다. 별도 천막에 두고 황실의 관리 아래 둔다고 공표하는 편이..."
"아니."
레오하르트의 한마디가 모든 소리를 끊었다.
"여기에 둔다."
"폐하. 막사 안은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전쟁 중입니다."
"내 막사보다 안전한 곳이 제국에 있나."
대답은 없었다.
에일린은 속으로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바로 옆은 위험의 근원지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자리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자리가 언제까지 자기 것인지였다.
레오하르트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동안만.
그 조건은 지나치게 불안정했다.
천막이 들렸다.
검은 망토 자락이 먼저 들어왔다. 레오하르트는 탁자 앞에 멈췄다. 눈 밑은 더 짙어져 있었고 관자놀이의 핏줄이 아주 약하게 뛰었다.
"폐하께서는 아이를 가까이 두려 하십니다."
회색 머리의 참모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 뜻을 막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정식 신분을 정하셔야 합니다. 포로는 약하고 인질은 반발을 부릅니다."
"그럼 무엇이 좋다는 거지."
"황실의 보호를 받는 피보호인으로..."
"그 말로는 부족합니다."
기사장이 끼어들었다.
"아이를 탐내는 자는 결국 폐하의 보호가 느슨해지는 틈을 노릴 겁니다. 누구도 후견을 주장할 수 없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누구도 후견을 주장할 수 없는 관계.
에일린의 눈이 커졌다.
가족.
생존을 위한 가장 단단한 울타리였다. 동시에 폭군의 손안에 평생 묶이는 족쇄이기도 했다.
마리안이 아주 작게 에일린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 손길은 떨리고 있었다.
"수양은 황실의 피가 아닌 자에게도 허락됩니다."
참모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러나 로엔의 아이를 수양딸로 삼는다면 국경 귀족들은 굴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황실 내부도 반발할 것이고..."
쿵.
레오하르트가 손등으로 탁자를 짚었다. 은잔이 흔들리고 등불이 작게 일렁였다.
그의 손등을 검은 기운이 스쳤다.
기사장이 숨을 삼켰다.
"폐하."
"말을 계속해 봐라."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이 서 있었다.
에일린은 마리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무서웠다. 저 손에 닿으면 무엇이 일어날지 아직 몰랐다. 괜히 다가갔다가 황제의 기분을 더 망치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다시 누군가의 물건이 된다.
그리고 레오하르트가 흔들릴 때만 자기 손이 그를 붙잡을 수 있다면, 그건 지금 가진 유일한 협상 카드였다.
에일린은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아..."
마리안이 당황해 그녀를 내려다봤다.
에일린은 더 크게 몸을 기울였다. 통통한 발이 허공을 찼다.
"아빠아."
천막 안의 공기가 멎었다.
레오하르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붉은 눈의 검은 그림자가 느리게 흔들렸다.
에일린은 심장이 콩콩 뛰는 소리를 들으며 손을 더 뻗었다.
영업은 타이밍이었다. 고객이 고민할 때 한 번 더 제안해야 했다.
"아빠."
이번에는 조금 더 또렷하게 불렀다.
레오하르트가 천천히 다가왔다.
"내게 줘라."
마리안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예, 폐하."
에일린은 황제의 팔로 옮겨졌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그녀의 손바닥에 닿자 작은 손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꼭 쥐었다.
검은 기운이 옅어졌다.
레오하르트의 어깨가 아주 느리게 내려갔다. 거칠던 숨이 고르게 정리됐다.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에일린은 그 침묵 속에서 깨달았다.
이 남자도 두려운 모양이다. 자기 안에서 날뛰는 무언가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을 약점을.
그런 사람에게 손을 내민 자신이 안쓰러울 만큼 위험해 보였다.
레오하르트가 손가락을 빼지 않은 채 말했다.
"수양딸이라 했다. 그게 가장 확실한 명분인가."
기사장이 낮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황제의 수양딸이 되면 누구도 아이의 후견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황실법상 황녀에 준하는 보호를 받습니다."
레오하르트의 시선이 에일린의 얼굴에 머물렀다.
"누가 반발하든 그것은 내 권한으로 끝난다."
차가운 목소리가 막사 안을 눌렀다.
"오늘부터 에일린 로엔은 내 수양딸이다."
마리안이 숨을 들이켰다.
에일린은 그의 손가락을 쥔 채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살아남기 위한 가장 강한 이름표를 얻었다.
그런데 기쁨이 오기 전에 이상한 무게가 먼저 가슴에 내려앉았다. 로엔이라는 이름은 지워지지 않겠지만 이제 그녀는 황제가 정해 준 자리에서 살아야 했다.
레오하르트는 기사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군에 알린다. 에일린은 아스카니아 황실의 수양황녀다. 아이와 유모에게 손을 대는 자는 내게 칼을 겨눈 것으로 간주한다."
"명을 받듭니다."
"마리안은 계속 아이를 돌본다. 감시는 풀지 마라."
마리안의 눈가가 젖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할 일은 아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자라서 남기는 것이다."
말은 무정했다.
그런데 에일린은 그 말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들렸다.
필요한 사람은 버리지 않는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 정도도 충분히 큰 약속이었다.
막사 앞에 병사와 관리들이 모였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을 한 팔에 안은 채 천막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뺨에 닿자 에일린은 본능적으로 그의 망토를 움켜쥐었다.
수백 개의 시선이 동시에 그들을 향했다.
레오하르트는 그 모든 시선을 향해 말했다.
"들어라. 에일린은 오늘부터 내 딸이다. 황실의 이름으로 보호한다. 그 아이의 혈통과 몸과 앞날에 손을 대려는 자는 나를 적으로 돌리는 것으로 알겠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곧 기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와 수양황녀 전하께 충성을."
병사들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수양황녀 전하께 충성을!"
에일린은 몸을 움찔했다.
전하.
갓난아기에게는 너무 거창한 호칭이었다. 어제까지는 젖병도 없어 울던 아기였는데 오늘은 제국군이 무릎을 꿇는 황녀가 됐다.
인생의 승진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레오하르트의 옷깃만 붙잡았다.
그때 기사장이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 로엔 백작의 처분에 관해 재차 여쭙겠습니다. 포로들은 새벽에 후송할 예정입니다. 백작은 반역의 본보기로 처형을 청하는 장교들이 많습니다."
에일린의 손이 멈췄다.
로엔 백작.
자신을 살리려고 황제 앞에 엎드렸던 남자. 아버지라 부를 겨를도 없이 패배한 영주가 되어 버린 사람.
그가 좋은 아버지였는지는 아직 몰랐다.
그래도 자신을 살려 달라고 말한 건 사실이었다.
레오하르트가 에일린을 내려다봤다.
"네 로엔의 주인이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질문처럼 들렸다.
에일린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대신 레오하르트의 옷자락을 한 번 잡아당겼다. 그리고 작고 서투른 손가락으로 성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레오하르트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보고 싶은가."
에일린은 입술을 달싹였다.
부탁.
그 단어는 전생에서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했다. 부탁하면 빚이 생기고 빚은 언젠가 계산서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빚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에일린은 다시 그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레오하르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기사장에게 명령했다.
"처형은 미룬다."
기사장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폐하?"
"내 딸이 원한다. 다만 유예일 뿐이다."
그 짧은 말에 에일린의 숨이 멎었다.
레오하르트는 그녀를 더 단단히 안았다.
"새벽이 오기 전에 로엔 백작을 이곳으로 데려와라."
차가운 눈동자가 에일린에게 향했다.
"네가 붙잡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눈으로 보겠다."
에일린은 그의 손가락을 놓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 얻은 이름이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수양황녀라는 호칭보다 훨씬 무겁게 그녀의 작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