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2화: 황제의 막사
"살려 둔다."
그 말은 구원처럼 들리기에는 너무 차가웠다.
에일린은 레오하르트의 손가락을 붙잡은 채 눈만 깜박였다. 죽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목숨이 손끝에 매달려 있었으니 분명 성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도감보다 더 큰 공포가 밀려왔다.
전생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정말 무서운 상사는 사람을 바로 내보내지 않았다. 일단 붙잡아 두고 더 어려운 일을 맡겼다.
이번 생의 첫 발령지는 아무래도 폭군 황제의 막사였다.
"폐하!"
마리안이 비명을 삼키며 앞으로 나섰다.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 동시에 검끝을 움직였다. 얇은 쇳소리 하나에 마리안의 발이 멈췄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유모인가."
"예, 폐하. 이 아이는 아직 젖을 떼지 못했습니다. 제가 없으면 밤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마리안은 바닥에 엎드렸다. 이마가 깨진 돌조각에 닿고 곧 피가 맺혔다.
"부디 곁에 있게 해 주십시오. 벌은 제가 받겠습니다. 아이만은..."
에일린은 입술을 달싹였다.
안 돼. 이 사람까지 죽으면 나는 육아 지식 없는 정복군 한복판에 던져진다.
황제 호감도 관리보다 젖병 확보가 먼저였다. 기초 생존 조건은 언제나 중요했다. 전생에도 야근보다 무서운 건 빈속 야근이었다.
"아... 아..."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에일린은 대신 마리안 쪽으로 손을 뻗었다. 짧고 통통한 손가락은 허공에서 몇 번 휘청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의사 표현이었다.
레오하르트의 붉은 눈이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데려간다."
기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낮게 말했다.
"폐하. 포로의 유모까지 거두면 관리할 입이 늘어납니다."
"입 하나 더 늘었다고 제국군이 굶나."
막사도 아닌 무너진 유아실 안에 서리가 내린 듯 조용해졌다.
기사장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에일린은 속으로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폭군은 무서웠지만 결정 속도만큼은 눈부셨다. 전생 회사에서 결재 하나 받으려고 부서 세 개를 돌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레오하르트는 피 묻은 장갑을 벗지도 않고 에일린을 안아 들었다.
몸이 너무 쉽게 들렸다. 세상이 훅 낮아지고 흔들렸다. 에일린은 본능적으로 그의 손가락을 더 꼭 쥐었다.
로엔 백작이 엎드린 채 고개를 들었다.
"폐하. 아이는 로엔의 남은 피입니다. 국경 귀족들이 폐하께 복종하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아이의 목숨만은..."
"그 가치는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안다."
레오하르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가치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말은 칼보다 더 차가웠다.
에일린은 그제야 자신이 애완동물도 손님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인질.
통치 명분.
살아 있는 도장.
아빠라고 부른 작전은 목숨을 붙였을 뿐 신분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도 살아 있으면 다음 협상이 가능하다. 인사팀 면담이든 폭군 면담이든 출석해야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
복도는 불타고 있었다.
벽에 걸렸던 로엔의 푸른 깃발은 반쯤 타서 검게 말려 있었다. 깨진 창으로 밤바람이 들어왔고 연기와 피 냄새가 젖 냄새에 달라붙었다.
에일린은 울지 않으려 애썼다.
너무 울면 시끄럽다고 버려질 것 같았다. 너무 조용하면 이상한 아기라고 의심받을 것 같았다.
적당한 울음.
적당한 떨림.
적당한 무해함.
회식 자리에서 상사의 농담에 웃던 정확한 반 박자처럼 에일린은 얼굴을 찡그리고 작게 훌쩍였다.
"응애..."
레오하르트의 팔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아차. 너무 컸나.
에일린은 즉시 울음을 줄였다. 그리고 아직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을 더 꼭 움켜쥐었다.
그 순간 레오하르트의 걸음이 한 박자 느려졌다.
그의 관자놀이에서 뛰던 핏줄이 잠잠해졌다.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검은 그림자처럼 일렁이던 것이 잠깐 가라앉았다.
에일린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 남자, 내 손에 반응한다.
정확한 원인은 몰랐다. 갓난아기의 체온 때문인지 방금 날린 아빠 호칭 때문인지 아니면 폭군의 취향이 이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패턴은 패턴이었다.
아스카니아 진영은 로엔 성 밖의 낮은 언덕을 통째로 삼키고 있었다. 검은 천막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군기마다 붉은 용 문장이 박혀 있었다.
병사들은 레오하르트가 지나갈 때마다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 시선들이 곧 에일린에게 꽂혔다.
"저 아기가..."
"로엔의 직계라던데."
"폐하께서 직접 안고 계신다고?"
속삭임은 칼날보다 얇았다.
에일린은 본능적으로 레오하르트의 망토 안쪽으로 고개를 묻었다. 피 냄새가 심했지만 밖의 시선보다는 나았다.
레오하르트는 밀어내지 않았다.
그는 가장 큰 천막 앞에서 멈췄다. 입구의 기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군의관을 불러라. 유모는 씻긴 뒤 들여보내고 감시를 붙여라."
"예, 폐하."
레오하르트의 시선이 마리안에게 닿았다.
"도망치면 죽는다."
마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망치지 않습니다. 애기씨 곁에만 있게 해 주십시오."
에일린은 그 말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전생에는 저렇게까지 자신을 붙잡아 준 사람이 있었나.
생각하려다 그만두었다. 지금 감상에 젖으면 안 된다. 눈물은 체력 낭비였다.
막사 안은 바깥보다 조용했다.
전쟁터 한복판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넓은 탁자에는 지도와 봉인된 서신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검은 갑옷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을 야전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침상은 딱딱했고 담요는 거칠었다. 그래도 불타는 유아실보다는 안전했다.
에일린은 곧장 손을 뻗어 담요 끝을 잡았다.
재산 확보.
눈앞에 있는 물건을 잡아 두면 최소한 덮을 수는 있다.
군의관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에일린을 살피며 눈치를 보았다. 아기의 몸에 상처가 없는지 확인하는 손길은 조심스러웠지만 시선은 자꾸 레오하르트 쪽으로 흔들렸다.
"큰 외상은 없습니다. 다만 연기를 마셨을 수 있습니다. 따뜻한 물과 젖이 필요합니다."
"준비해라."
"예."
군의관이 물러나자 기사장이 지도 옆으로 다가왔다.
"폐하. 로엔의 직계가 살아 있다는 소식은 곧 국경 전체로 퍼질 겁니다. 아이를 별도 천막에 두고 감시를 붙이는 편이..."
"여기 둔다."
"폐하께서 직접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레오하르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막사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내가 필요를 몰라서 말하는 것 같나."
기사장은 더 말하지 못했다.
에일린은 담요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현재까지 황제의 행동 패턴.
첫째, 참모가 말대꾸하면 분위기가 살벌해진다.
둘째, 내 문제는 묘하게 직접 처리하려 한다.
셋째, 내 손을 잡으면 통증 같은 것이 줄어드는 듯하다.
결론.
살고 싶으면 당분간 이 폭군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
너무 훌륭한 결론이라 울고 싶었다.
마리안이 씻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에일린을 안고 젖을 물렸다.
에일린은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갓난아기의 몸은 배고픔 앞에서 자존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살려면 먹어야 한다.
그 단순한 원칙은 전생과 이번 생이 같았다.
레오하르트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마리안은 눈을 내리깐 채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아이 이름."
"예?"
"이름이 뭐지."
마리안이 급히 대답했다.
"에일린입니다. 에일린 로엔."
"에일린."
레오하르트가 이름을 한 번 입안에서 굴렸다.
에일린은 젖을 빨다 말고 눈을 떴다. 이상하게 자신의 이름이 그의 목소리로 불리자 등골이 오싹했다.
인사 발령 통보를 듣는 기분이었다.
레오하르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막사 밖으로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참모들이 뒤따랐다.
천막이 닫히자 마리안은 겨우 숨을 토했다.
"애기씨. 괜찮으십니까. 아이고 이런 어린 분이 어찌..."
에일린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리안의 손가락을 잡았다.
마리안은 그 작은 손을 보고 결국 눈물을 떨어뜨렸다.
에일린은 가만히 있었다. 울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어른이 우는 걸 보는 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때 막사 밖에서 낮은 신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마리안이 얼어붙었다.
에일린도 몸을 굳혔다.
천막 너머로 레오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러서라."
"폐하, 두통이 다시..."
"물러서라고 했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곧 막사 안쪽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마리안이 에일린을 더 꼭 안았다.
에일린은 숨을 죽였다.
아까 복도에서 본 것과 같은 증상일까.
그의 붉은 눈 안쪽에서 일렁이던 검은 그림자. 손가락의 경련. 통증을 눌러 삼키는 표정.
천막이 거칠게 열렸다.
레오하르트가 들어왔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빛은 아까보다 위험했다. 피 냄새가 아니라 차갑고 쇠붙이 같은 기운이 막사 안으로 밀려왔다.
마리안이 비명을 삼켰다.
에일린은 선택해야 했다.
피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아니면 다시 잡아야 하나.
전생의 한유진이라면 위험한 임원 앞에서 절대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치면 더 찍혔다. 대신 먼저 필요한 것을 내밀었다.
지금 자신이 내밀 수 있는 것은 손뿐이었다.
에일린은 마리안의 품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애기씨!"
작은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레오하르트의 시선이 그 손에 꽂혔다.
에일린은 최대한 순진한 얼굴을 만들었다. 이건 목숨을 건 영업이었다.
"아... 빠아."
막사 안이 멈췄다.
레오하르트는 느리게 다가왔다. 그는 한참 동안 에일린을 내려다보다 장갑을 벗었다. 맨손의 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에일린은 바로 움켜쥐었다.
차갑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 떨림이 빨리 잦아들었다.
레오하르트의 숨이 아주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 안쪽에서 검은 빛이 밀려났다. 막사 입구의 기사들도 마리안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에일린은 속으로 확신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은 이 남자의 통증을 낮춘다.
그리고 이 남자는 그 사실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레오하르트가 말했다.
"이 아이는 내 막사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기사장이 천막 입구에서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다만 국경 귀족들이 아이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단순한 포로라면 명분이 약합니다."
"그럼 명분을 만들면 된다."
에일린의 손을 내려다보던 레오하르트의 입가가 차갑게 굳었다.
"내 손안에 있는 것을 감히 요구하지 못할 명분으로."
에일린은 그의 손가락을 붙잡은 채 눈을 깜박였다.
살아남은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더 큰 이름표가 붙을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표가 무엇이든, 그녀는 절대 평범한 포로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