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시놉시스
대기업에서 눈치와 처세술로 버티다 과로사한 직장인 한유진은 전쟁으로 멸망하는 변방 영지 로엔의 갓난아기 에일린으로 환생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복자 레오하르트 황제가 요람 앞에 선 순간 에일린은 죽지 않기 위해 폭군의 손을 붙잡고 그를 아빠라고 부른다.
1화: 피 묻은 요람
한유진은 모니터 오른쪽 아래의 시간을 보고도 한참 동안 아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새벽 세 시 십칠분.
퇴근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늦고 출근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사무실 형광등은 사람의 피부를 생선살처럼 창백하게 만들었다. 책상 위에는 식은 커피와 수정 요청이 적힌 메신저 창이 나란히 떠 있었다.
팀장은 퇴근한 지 네 시간째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짧았다.
"유진 씨가 센스 있게 마무리해 줘."
센스.
한유진은 그 단어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월급에 포함되지 않는 야근과 책임과 상사의 기분까지 전부 그 두 글자 안에 들어갔다.
그래도 그녀는 웃었다.
회사 생활 8년 차가 되면 얼굴 근육이 생존 장비처럼 굳는다. 싫어도 웃고 억울해도 웃고 쓰러질 것 같아도 "네 확인했습니다"를 치는 손가락만큼은 빨랐다.
마지막 표의 숫자를 맞춘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졸린 줄 알았다. 다음에는 속이 빈 줄 알았다. 하지만 가슴을 누르는 통증이 손끝까지 퍼지자 유진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 이건 좀 위험한데.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몸이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다. 모니터 속 보고서가 멀어지고 바닥의 차가운 감촉이 뺨에 닿았다.
죽기 직전에도 억울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보고서 저장은 했나?
그 다음에야 더 서러운 생각이 따라왔다.
다음 생이 있으면 절대 회사원은 안 한다.
어둠이 덮였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알람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날카롭고 작고 끈질긴 소리였다. 그런데 그 소리가 자신의 목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기씨. 괜찮으십니까? 아이고 우리 애기씨."
낯선 여자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낡은 두건을 쓴 중년 여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은 단풍잎보다 작았고 다리는 천으로 둘둘 감겨 있었다. 입에서는 말 대신 울음과 옹알이만 새어 나왔다.
한유진은 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갓난아기 몸은 기절도 마음대로 못 했다.
며칠인지 몇 달인지 모를 시간이 흐르며 그녀는 최소한의 정보를 주워 모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에일린이라고 불렀다. 성은 로엔. 변방 영지 로엔 백작가의 늦둥이 딸. 나이는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였다.
그리고 이곳은 한국이 아니었다.
마법이 있고 기사들이 있고 황제가 전쟁으로 국경을 넓히는 세계였다. 유모 마리안은 밤마다 창문을 닫으며 아스카니아 제국의 군대가 북쪽 성채를 넘었다고 속삭였다.
"폐하께서 직접 오신다더군."
문밖에서 하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오하르트 황제가?"
마리안의 손이 멈췄다.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피로 왕관을 닦는 정복자. 항복한 성도 불태우는 폭군. 전장에서 웃지 않고 궁정에서도 웃지 않는 남자.
에일린은 요람 안에서 입술을 달싹였다.
망했다.
정말로 망했다.
전생은 과로사였고 이번 생은 전쟁통 아기였다. 회사에서 눈치 보던 경력은 남았는데 몸은 기어 다니지도 못했다.
그날 밤 로엔 성벽이 무너졌다.
처음에는 멀리서 북소리가 들렸다. 다음에는 쇠가 부딪히는 소리. 곧 비명이 가까워졌다. 창밖 하늘은 불빛 때문에 낮처럼 붉었다. 젖 냄새가 배어 있던 유아실에도 연기와 피 냄새가 스며들었다.
마리안은 에일린을 안고 벽장 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복도 쪽 문이 먼저 열렸다. 로엔 백작이 피 묻은 얼굴로 들어왔다.
그는 늘 멀리서만 보던 사람이었다. 바쁜 영주였고 서투른 아버지였다. 그래도 그가 에일린을 보는 눈빛만은 낯설지 않았다. 잃기 싫은 것을 이미 잃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은 것에 매달리는 눈이었다.
"아이를 숨겨라."
"주군!"
"아스카니아 놈들이 본관까지 들어왔다. 이 아이만은..."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창밖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고 벽이 흔들렸다. 먼지가 천장에서 쏟아졌다. 백작은 에일린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아버지의 정이라기보다 패장의 절망이 더 짙었다. 에일린은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은 사랑스러운 딸이기 전에 남은 혈통이었고 협상 카드였다.
하지만 협상 카드도 살아 있어야 쓸모가 있다.
에일린은 작은 주먹을 쥐었다.
살자.
말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하고 심지어 목도 제대로 못 가누지만 일단 살자. 사표도 못 내고 죽은 인생을 전쟁터 아기 엔딩으로 마감할 수는 없었다.
문이 부서졌다.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 먼저 들어왔다. 그들은 방을 훑고 곧장 길을 열었다. 눈이 마주친 마리안이 에일린을 품에 더 꼭 안았다.
"로엔 백작."
낮은 목소리가 방을 갈랐다.
그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레오하르트 드 아스카니아.
그는 사람이라기보다 겨울밤에 세워진 칼 같았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어깨에 걸친 검은 망토 끝에는 눈이 아니라 재가 묻어 있었다. 손에는 피 묻은 검이 들려 있었다.
방 안의 누구도 그에게 먼저 숨을 내쉬지 못했다. 기사들조차 주군의 등 뒤에서 그림자처럼 굳어 있었다. 레오하르트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부서진 유리 조각이 군화 밑에서 작게 울었다.
백작이 무릎을 꿇었다.
"폐하.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
"로엔의 피인가."
레오하르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는 자비를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에일린은 울음을 삼켰다.
아기라서 울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울면 그냥 갓난아기다. 갓난아기는 보호받을 수도 있지만 버려질 수도 있다. 결정권은 전부 저 남자에게 있었다.
레오하르트가 요람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오자 이상한 것이 보였다. 그의 붉은 눈 안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흔들렸다. 관자놀이의 핏줄이 미세하게 뛰고 장갑 낀 손가락이 아주 잠깐 경련했다.
아픈 건가?
그런데도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통증마저 명령으로 눌러 버리는 사람 같았다.
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로엔의 직계는 저 아이뿐입니다. 국경 귀족들을 통제하려면 인질로..."
레오하르트가 시선만 돌렸다.
기사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에일린은 그 짧은 침묵에서 답을 읽었다. 저 남자는 보고서 결재를 미루는 팀장보다 훨씬 위험했다. 눈치를 봐야 할 상대가 아니라 눈치 한 번 잘못 보면 목이 사라지는 상대였다.
레오하르트가 장갑 낀 손을 뻗었다. 피가 마르지 않은 손가락이 에일린의 턱 아래에 닿았다. 차갑고 묵직했다.
목을 누르는 힘은 아주 약했다.
그러나 에일린은 알았다. 이 손은 마음만 먹으면 갓난아기의 숨을 소리 없이 끊을 수 있었다.
죽는다.
그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에일린은 본능적으로 작은 손을 들어 그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힘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손이었다. 그런데 레오하르트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방 안에 이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던 차가운 기운이 살짝 누그러졌다. 에일린은 이유를 몰랐다. 다만 상대가 당황했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놓치면 안 된다.
회사에서 배운 건 하나였다. 상대의 눈썹 한 번, 숨 한 번, 침묵 한 칸에도 살 길이 있다.
그녀는 가장 무해한 얼굴을 만들었다. 아기라서 가능한 둥글고 말랑한 표정. 그리고 있는 힘껏 웃었다.
"아... 빠."
목소리는 형편없이 작았다.
마리안이 숨을 들이켰다. 백작도 고개를 들었다. 기사들 중 누군가가 검 손잡이를 놓칠 뻔했다.
레오하르트만 움직이지 않았다.
에일린은 한 번 더 그의 손가락을 꼭 잡았다. 피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참았다. 이건 아부가 아니었다. 생존 전략이었다.
전생에 임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웃던 얼굴보다 더 순진하게.
야근 지시를 받고도 "네 가능합니다"라고 말하던 목소리보다 더 간절하게.
"아빠아."
붉은 눈이 완전히 흔들렸다.
레오하르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진 듯했다. 그의 몸을 갉아먹던 통증이 한순간 낮아졌다. 전장을 지나올 때마다 귀 안에서 울리던 비명도 멀어졌다.
그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이 작은 생명이 자신의 손을 두려워하지 않고 붙잡았다는 사실만이 기이하게 또렷했다.
검 끝이 아래로 내려갔다.
에일린은 속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살았다.
아니 아직은 아니었다.
레오하르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 아이를..."
그의 시선이 요람과 자신의 손가락을 오갔다. 에일린은 손을 놓지 않았다. 놓는 순간 다시 평범한 인질이 될 것 같았다.
레오하르트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굳었다.
"내 막사로 옮겨라."
백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마리안은 에일린을 빼앗기지 않으려 한 걸음 물러섰지만 기사들의 검이 동시에 움직였다.
레오하르트가 덧붙였다.
"살려 둔다."
그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뒤집혔다.
에일린은 작은 손으로 황제의 손가락을 더 단단히 쥐었다. 살아남은 대가가 무엇인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붙잡은 손은 분명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손이었다.
다음 생이 있다면 회사원은 안 하겠다고 빌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번 생의 상사는 황제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