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5화: 황궁의 첫 번째 규칙
로엔을 떠난 뒤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검은 성벽이 마차 창을 가득 메웠다.
에일린은 마리안의 품에서 숨을 죽였다. 성문 위에는 황금빛 독수리 문장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로엔의 성은 무너진 돌 냄새가 났다.
이곳은 달랐다. 돌 하나도 제 자리를 잃지 않은 채 사람을 내려다보는 곳이었다. 성벽의 그림자마저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리안의 팔이 에일린을 조금 더 단단히 감쌌다.
"겁나시지요, 아기씨."
에일린은 대답 대신 품 안의 은제 방울을 꼭 쥐었다.
로엔에서 가져온 것은 마리안과 이 방울뿐이었다. 로엔 백작은 황제 직속 감옥으로 끌려갔다. 살아는 있다.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언제나 조건이 붙었다.
쓸모를 증명할 때까지.
"황제 폐하께서 귀환하신다!"
나팔 소리가 성문을 울렸다.
마차 문이 열리자 차가운 바람과 함께 수십 개의 시선이 밀려왔다. 비단 옷을 차려입은 귀족들과 궁정의 시종들이 길 양옆에 줄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수양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가지런했다.
그러나 고개를 든 눈들은 하나같이 바빴다. 로엔의 마지막 피. 황제가 전쟁터에서 데려온 아이. 얼마나 오래 보호받을지 모르는 아이.
전생에도 그런 눈은 익숙했다.
새로 온 직원에게 웃으며 업무를 떠넘기고 실수 하나를 기다리는 눈. 편을 만들기 전까지는 누구도 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 눈.
에일린은 울지 않았다.
울면 약점으로 읽힌다. 지금은 누가 자신에게 가까이 오고 누가 뒤로 물러나는지 기억할 때였다.
레오하르트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환영 나온 이들을 보지도 않고 마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딸을 이리 줘라."
마리안의 숨이 짧게 멎었다. 그래도 곧 두 손으로 에일린을 건넸다.
황제의 팔은 단단하고 차가웠다. 에일린은 낯선 궁 앞에서 검은 망토를 꼭 붙들었다. 그러자 레오하르트의 시선이 작은 손으로 내려왔다.
"방울도 놓지 않는군."
에일린은 방울을 더 숨겼다.
그는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황궁의 가장 높은 지붕을 한 번 올려다본 뒤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동쪽 별궁으로 간다. 환영 인사는 필요 없다."
그 한마디에 길이 갈라졌다.
레오하르트가 에일린을 안은 채 먼저 걸었다. 마리안은 뒤를 따랐다. 궁정의 시선은 끝까지 등에 꽂혔지만 누구도 말을 붙이지 못했다.
동쪽 별궁은 화려했지만 따뜻하지 않았다.
높은 창에는 옅은 비단이 드리워져 있었고 벽난로에는 이제 막 불씨가 들어가고 있었다. 새 침구에서는 마르지 않은 햇볕 냄새가 났다. 며칠 안에 급히 마련한 방이라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문 앞에는 시녀 셋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가장 앞의 여자는 삼십대쯤 되어 보였다. 단정히 틀어 올린 회색 머리와 빈틈없는 자세가 눈에 띄었다.
"별궁을 맡은 베라입니다."
그 뒤의 젊은 시녀가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리세라고 합니다."
나머지 한 명은 물러나 있었지만 에일린은 그의 시선이 방울 쪽으로 잠깐 향했다는 것을 보았다. 마리안도 같은 것을 본 듯 에일린의 손을 덮었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을 마리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이 아이와 유모가 원하는 것은 즉시 갖춰라. 허락 없이 이 별궁에 드는 자가 있으면 이름부터 내게 올려라."
"명을 받듭니다."
베라의 대답은 매끄러웠다. 하지만 리세의 손끝은 눈에 띄게 떨렸다.
황제의 명을 받는 것은 영광이 아니다. 잘못하면 책임이 더 먼저 찾아오는 자리였다.
마리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이에게 따뜻한 우유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긴 이동 탓에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베라가 눈짓하자 리세가 은쟁반을 들고 물러났다.
레오하르트는 방을 천천히 둘러봤다. 침대의 기둥과 창의 잠금쇠까지 확인한 뒤에야 문가로 향했다.
"경비는 두 배로 늘린다."
그는 기사에게만 들릴 만큼 낮게 덧붙였다.
"로엔의 이송로를 엿본 자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 황궁 안이라고 느슨해지지 마라."
에일린의 손가락이 방울 위에서 움찔했다.
누군가 군영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그 사람이 이곳까지 따라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황제는 그 가능성을 지워 버리지 않았다.
조금 뒤 리세가 우유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쟁반을 탁자 위에 올리다가 발을 헛디뎠다. 흰 우유가 새 융단 위로 넓게 쏟아졌다.
방 안이 얼어붙었다.
리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죄, 죄송합니다."
베라의 눈썹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화난 얼굴이라기보다 일이 커질까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첫 명을 받은 자리에서 실수를 하다니. 리세, 네가 물러나 벌을..."
에일린이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
마리안이 놀라 붙들었지만 에일린의 손은 이미 리세의 손가락을 잡고 있었다.
리세는 울음을 삼키며 작은 손을 내려다봤다.
에일린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문가에 서 있던 레오하르트의 망토 끝을 가리켰다.
검은 망토에도 여행길의 진흙이 묻어 있었다.
레오하르트의 시선이 융단과 자기 망토를 차례로 훑었다.
"우유를 쏟았다고 목을 베는 궁인가."
베라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그럴 뜻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전하를 모시는 첫날이니 실수가 반복되지 않게 하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치우고 다시 가져와라."
리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감사합니다, 폐하."
레오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에일린에게 잠시 머물렀다.
아이가 우연히 손을 뻗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눈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리세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다.
에일린은 속으로 짧게 숨을 내쉬었다.
첫날부터 억울하게 벌받은 시녀를 구하는 일은 친절이 아니다. 이 궁에서 자신과 마리안의 말을 믿어 줄 사람 하나를 만드는 투자였다.
저녁이 되자 별궁 안은 조금 조용해졌다.
마리안은 에일린을 씻기고 새 잠옷을 입혔다. 낯선 비누 향이 몸에 남았다. 에일린은 손바닥 안의 방울을 자꾸 확인했다.
"이건 제가 잘 보관할게요."
마리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일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으."
마리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요. 아기씨 손에 있어야 안심하시겠지요."
그때 문밖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리세가 문턱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 위에는 은제 방울이 놓여 있었다.
"전하께서 낮에 떨어뜨리신 물건입니다. 침구 아래에서 발견했습니다."
에일린은 멈칫했다.
방울을 놓친 줄도 몰랐다. 하루 종일 황궁의 얼굴만 살피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을 뻔했다.
마리안이 방울을 받으려 하자 에일린이 먼저 손을 뻗었다.
리세는 망설였다. 그러다 방울을 작은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올려주었다.
차가운 은이 손에 닿자 에일린은 안심했다.
리세의 시선이 방울 안쪽에서 잠깐 멈췄다. 아주 작은 문장과 낯선 문양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읽으려 하지 않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에일린은 곁에 있던 과자 접시를 보았다. 손가락으로 가장 작은 꿀과자 하나를 집어 리세 쪽으로 내밀었다.
"아."
리세가 당황했다.
"제가 받아도 됩니까?"
마리안도 답하지 못하고 에일린을 바라봤다.
에일린은 과자를 더 내밀었다.
사람에게 일을 맡기려면 돈이든 말이든 보상이 필요하다. 아기에게 가능한 보상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이건 분명한 표시였다.
내 편이 되어 달라.
리세가 아주 조심스럽게 과자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전하. 잃어버리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라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리세에게 차갑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황궁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든 실수를 잘라 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일 뿐이었다. 에일린이 리세에게 준 과자는 그 규칙 밖의 작은 빚이었다.
문가에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께서 오십니다."
레오하르트가 들어왔다. 그는 리세의 손에 든 과자와 에일린의 방울을 보았다.
"무슨 일이지."
베라가 대답하려 했지만 리세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수양황녀 전하의 물건을 찾아 돌려드렸습니다."
레오하르트는 잠시 에일린을 보았다.
에일린은 리세의 손을 가리킨 뒤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뜻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레오하르트는 리세를 향해 말했다.
"내 딸의 물건을 함부로 보지 않고 돌려준 자다. 당분간 이 아이의 곁을 지켜라."
베라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폐하. 별궁 시녀의 배치는 궁정국의 절차가 있습니다."
"절차는 내일 바뀐다."
레오하르트의 대답은 짧았다.
"이 별궁의 인선은 내게 먼저 올려라."
리세의 얼굴에 처음으로 작은 빛이 떠올랐다. 베라도 더는 말하지 않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에일린은 방울을 가슴에 품었다.
작은 과자 하나로 궁정국의 절차를 이긴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궁에서 자기 편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밤이 깊어 갈 무렵 레오하르트는 경비를 점검하고 별궁을 나갔다.
에일린은 침대에 누운 채 잠을 청했다. 낯선 천장이 너무 높아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리세가 창가에서 멈췄다.
"베라 님. 이 창문이..."
창문 잠금쇠가 풀려 있었다.
찬바람이 가느다란 틈으로 스며들었다. 리세는 창틀을 살피다가 검은 실 조각 하나를 집었다.
"아까 낮에 봤을 때도 조금 열려 있었습니다. 제가 닫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씀드리면 제가 열어 둔 것으로 보일까 봐..."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베라가 실 조각을 받아 들었다. 실에는 희미하게 세 갈래 선이 엮여 있었다.
에일린의 손에 든 방울 문양과 닮은 선이었다.
에일린의 숨이 막혔다.
그저 우연일까. 방울 속 문양을 아는 사람이 이 방에 들어온 걸까.
알 수 없었다.
마리안은 에일린을 품에 끌어안고 문 쪽을 향해 외쳤다.
"경비를 불러 주세요. 지금 당장요."
잠시 뒤 발소리가 별궁을 가득 메웠다. 기사들이 창문과 복도를 확인했다. 하지만 담장 밖에는 눈에 띄는 발자국도 없었다.
레오하르트가 다시 들어왔다. 잠옷 위로 검은 겉옷만 걸친 모습이었다. 그의 눈은 피로보다 먼저 분노로 붉었다.
그는 실 조각을 손가락 끝에 올리고 창밖의 어둠을 바라봤다.
"별궁을 봉쇄한다."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 이곳에 드나든 자와 근무를 바꾼 자를 전부 조사해라. 아무것도 나오지 않더라도 그 자들이 누구와 말을 섞었는지까지 확인한다."
그의 시선이 리세에게 향했다.
리세는 겁에 질려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더 일찍 말씀드렸어야 했습니다."
에일린이 리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레오하르트는 그 손을 본 뒤 잠시 침묵했다.
"네가 열었다는 증거는 없다. 다음부터 이상한 것은 숨기지 마라."
리세의 눈가가 붉어졌다.
"명심하겠습니다."
레오하르트의 붉은 눈이 에일린에게 향했다.
"침실도 옮긴다. 내 침전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마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폐하. 아기씨가 낯선 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 눈이 닿는 곳에 둔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보호라는 말은 없었다. 그래도 에일린은 그 뜻을 알아들었다.
황궁의 첫 번째 규칙은 분명했다.
누구에게도 등을 보이지 말 것.
그런데 누군가는 이미 이 방의 창문을 열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