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8화: 퍼지는 파동
서울 강남구 청담동, 신성 엔터테인먼트 본사 6층 대회의실.
매주 열리는 임원 회의실의 엄숙함과는 결이 다른, 무겁고 싸늘한 정적이 방 안을 짓누르고 있었다. 테이블 상석에는 기획조정실 감사팀장과 감사위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실장 박철우가 비스듬히 자세를 잡고 앉아 있었다.
박철우의 얼굴에는 초조함 대신, 오히려 기고만장한 조소가 얇게 걸려 있었다.
“기조실에서 아침부터 사람을 이렇게 불러내다니, 다들 할 일이 어지간히 없으신 모양입니다. 제가 이중 계약이라니요? HN 콘텐츠 정태원 상무가 개인적인 오해를 하고 컴플레인을 건 모양인데, 그건 비즈니스 과정에서의 흔한 커뮤니케이션 미스일 뿐입니다.”
“커뮤니케이션 미스라…….”
감사팀장 강현석이 서류 뭉치를 툭툭 치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박철우를 향했다.
“박 실장. HN 콘텐츠 정 상무가 우리 법무팀에 정식으로 항의 서한을 보냈네. 당신이 권한도 없는 ‘도심의 별’ 원작 판권을 이중으로 계약하려 했다면서 말이야. 게다가 그 판권은 이미 3일 전에 초코 엔터로 매각 도장을 찍은 상태였고. 이것만으로도 사기 및 배임 혐의로 즉각 해고에 형사 고발감인데,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박철우가 콧방귀를 뀌며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그 판권 매각 건은 경영상의 판단이었습니다. 회사 이익을 위해 초코 엔터와 빅딜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시간 차일 뿐이에요. 배임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리고 정태원 상무도 결국 우리 최현우를 주연으로 꽂아 넣었으니 드라마 방영만 되면 다 잊힐 해프닝입니다.”
박철우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신성 엔터의 대주주 중 한 명인 조 이사가 자신의 외삼촌이었고, 그동안 이태준을 빼돌리며 챙긴 뒷돈의 일부가 윗선으로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기조실 감사팀 나부랭이가 자신을 쉽게 건드릴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강현석 팀장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갔다.
“그래, 판권 문제는 그렇게 우긴다고 치자고.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
강현석이 테이블 중앙의 스피커폰 허브를 탭했다.
비프음과 함께 재생된 음성 파일.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것은 박철우 자신의 목소리였다.
[실, 실장님! 성공했습니다! 방금 유나린이 2층 야외 계단 탈출 씬을 찍다가 세 번째 발판이 무너지면서 그대로 굴러떨어졌습니다! 발목이 부러진 것 같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메모리 카드는? 첫 촬영 데이터는 어떻게 됐어!]
[박민혁이 카드 포맷하고 카메라 쇼트 처리 끝냈습니다. 오늘 촬영은 완전히 스톱입니다!]
[하하하! 잘했다! 아주 잘했어! 강시우 그 버러지 새끼 얼굴이 어떻게 됐는지 봤어? 아주 사색이 됐겠지? 꼴좋구나, 쥐새끼 같은 놈!]
회의실 안의 모든 공기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박철우의 비뚤어진 미소 역시 거짓말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이…… 이건…….”
“계속 듣겠나? 뒤에는 당신이 이들에게 신성 엔터 정직원 임용과 현금 1천만 원을 주겠다고 교사하고 약속한 구체적인 내용까지 다 들어 있네만.”
강현석이 음성을 일시 정지시켰다.
회의실 안에 배석해 있던 감사위원들의 시선이 더러운 쓰레기를 보듯 박철우에게 꽂혔다.
“이건 조작된 겁니다! 악마의 편집이라고요! 강시우 그 새끼가 나를 음해하기 위해 인공지능으로 목소리를 조작한 게 분명합니다!”
박철우가 테이블을 짚고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강현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류 한 장을 그에게 내밀었다.
“현장에서 사보타주를 실행하려다 적발된 김태호와 박민혁의 자필 경위서와 자백서다. 그리고 그들이 자진 제출한 자네와의 통화 상세 내역, 자네가 송민호 매니저를 통해 대포폰으로 그들에게 보낸 계약 보증금 계좌 송금 내역까지 전부 일치해. 아직도 조작이라고 우길 텐가?”
“……!”
박철우의 턱이 덜덜 떨렸다.
자신의 완벽한 계획이, 그리고 수족처럼 부리던 현장의 스파이들이 단 하룻밤 만에 강시우에게 통째로 넘어가 자신을 겨누는 창끝이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박철우 실장. 자네는 이 시간부로 직위 해제 및 전격 대기발령이다. 회사 자산을 훼손하고 타사 배우에게 상해를 입히도록 교사한 혐의는 우리 신성 법무팀이 직접 고발할 걸세. 조 이사님도 방금 이 녹취를 듣고 자네를 손절하기로 결정하셨으니 구구구한 변명은 검찰청에 가서 하시게.”
“그, 그럴 리가…… 삼촌이 나를……!”
박철우의 안색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질려갔다. 영원히 든든한 밧줄이 되어줄 것 같았던 신성의 조 이사마저 자신을 차갑게 내쳤다는 소리에, 머릿속이 붕괴되는 파열음이 들리는 듯했다.
그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그가 털썩 소파로 무너지자, 대기하고 있던 보안요원들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와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강시우! 강시우 이 개새끼!!!”
회의실 복도 밖으로 박철우의 구차하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멀어져 갔다.
강현석 팀장은 가차 없이 녹취 파일을 이메일로 검찰에 전송하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강시우…… 무서운 놈이군. 단 한 방으로 신성의 실세 하나를 뼈째로 발라버리다니.”
화요일 오후, 상암동의 한 카페.
창밖으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강시우는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었다. 그의 폰 화면에 ‘정태원 상무’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예, 상무님.”
- “허허, 강 대표! 소식 들었나? 박철우 그놈, 어제 감사 끝나자마자 바로 수사기관으로 이송됐네. 신성에서도 꼬리 자르기 바빠서 변호사 한 명 안 붙여준다더군. 아주 속이 다 시원해!”
수화기 너머로 정태원 상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상무님께서 발 빠르게 대처해 주신 덕분입니다.”
- “아니지, 강 대표가 스모킹 건을 쥐여줬는데 내가 숟가락만 얹은 거지. 그나저나 드라마 첫 방이 이번 주 목요일인데, 편집실 난리 났네. 이민우 감독이 싱글벙글하면서 유나린 씨 분량 편집본을 나한테도 보여줬는데…… 와, 물건이더군. 진짜 물건이야.”
정 상무의 목소리에는 이제 루미너스를 무시하는 기색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거물 기획사를 대하듯 묘한 존칭과 리스펙트가 묻어났다.
“나린 씨가 현장에서 선배님들 호흡을 잘 받아먹었습니다. 편집이 잘 나왔다니 다행이네요.”
- “말도 마세. 편집 기사가 유나린 씨 나오는 씬은 1프레임도 자르기 아깝다고 울상이라니까? 방송 나가면 엄청난 파장이 일 거야. 루미너스도 이제 마음의 준비를 좀 해두는 게 좋을 걸세. 바빠질 테니까.”
전화를 끊은 시우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 황금빛 시스템 창이 펼쳐졌다.
[알림: 메인 퀘스트 ‘빌런의 처단’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 시스템 포인트 1,500 SP를 획득했습니다. (현재 보유 포인트: 3,300 SP)]
[보상: 대상의 인지도 및 업계 여론을 예측하는 액티브 스킬 ‘미디어 모니터링 (D)’이 해금되었습니다.]
[보유 스킬 정보]
- 미디어 모니터링 (D): 대상 인물의 방송 노출 및 대중 반응의 파급력을 실시간 빅데이터 형식으로 시각화하여 확인합니다.
“미디어 모니터링이라…….”
시우가 중얼거리며 찻잔을 들었다.
박철우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치워버린 지금, 이제 남은 것은 유나린이라는 원석이 세상에 태어나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목요일 밤 9시 50분.
마포구의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루미너스 기획 사무실.
말이 사무실이지, 보증금 1천만 원에 월세 60만 원짜리 조그만 오피스텔 방 한 칸이었다. 책상 두 개와 소파 하나가 전부인 좁은 공간에서 시우와 나린은 피자 상자를 사이에 두고 TV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표님…… 저 진짜 체할 것 같아요.”
나린이 뺨을 잔뜩 붉힌 채 콜라 캔을 꼭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뜬 스탯 창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름: 유나린 (22세)]
[상태: 극한의 긴장 (심박수 132)]
[스탯: 긴장도 92/100, 대중 기대도 25/100]
“피자 식기 전에 먹어요. 나린 씨 씬은 드라마 후반부에 나오니까 아직 시간 있어.”
시우가 웃으며 피자 한 조각을 건넸지만, 나린은 입도 대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드디어 밤 10시.
화려한 시그널 음악과 함께 SBS 신작 수목드라마 ‘정의의 온도’ 1화가 시작되었다.
검사 강민재 역할을 맡은 톱스타 최현우의 묵직한 연기가 초반 스토리를 단단하게 잡아나갔다. 법정을 넘나드는 긴장감 넘치는 연출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1화가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치닫던 밤 10시 45분경.
화면의 톤이 급격하게 어둡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빗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묵직하게 울려 퍼졌고, 파주의 허름한 주택가 세트가 화면에 등장했다.
“나온다…….”
나린이 짧게 숨을 들이켰.
화면 속, 굵은 빗줄기를 뚫고 낡은 목조 주택의 문이 벌컥 열렸다.
가죽 재킷을 입은 배진만이 술병을 든 채 살기 어린 눈빛으로 신인 유나린(한소희 역)의 머리채를 잡아채며 세트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 “이년이…… 아비가 들어왔는데 인사도 안 해? 돈은? 오늘 일당 받아온 거 어디 있어?!”
배진만의 압도적인 성량과 살기가 스피커를 찢을 듯이 울렸다.
시우는 침묵 속에 화면을 응시했다.
카메라는 나린이 배진만에게 밀려나 뒤로 물러서는 순간을 슬로우 모션처럼 잡아냈다.
정확히 세 걸음.
빗물이 들이치는 창가 아래, 차가운 푸른빛의 조명이 유나린의 가냘픈 얼굴을 비추는 완벽한 구도였다.
배진만이 소주병을 던져 산산조각 내고, 잔인하게 고함을 지른 직후의 짧은 0.5초의 공백.
유나린이 고개를 들었다.
카메라는 유나린의 왼쪽 45도 측면을 타이트한 클로즈업으로 잡았다.
창가로 들이치는 빗방울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고, 차가운 은빛 조명이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처절한 눈물 자국을 은빛으로 서늘하게 반사해 냈다.
그것은 공포에 질린 신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체념을 넘어선 지독한 증오, 그리고 생존을 향한 서늘한 독기가 담긴 야수의 눈빛이었다.
- “……죽이세요.”
나지막하게 울리는 한마디.
- “죽이라고요. 어차피 매일 밤 이렇게 찢겨서 살 바엔, 그냥 지금 아저씨 손에 죽는 게 나아. 대신…… 지옥에는 내가 아저씨 손 잡고 같이 갈게.”
그 순간, 화면 속 배진만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대사가 끝났음에도 두 배우 간의 숨 막히는 침묵과 연기적 텐션이 약 3초 동안 브라운관을 지배했다.
배경 음악도, 효과음도 없었다.
오직 들이치는 빗소리와 두 배우의 팽팽한 호흡 소리만이 시청자들의 숨통을 옥죄었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 전환.
“…….”
사무실 안에도 긴 정적이 흘렀다.
나린은 멍하니 TV 화면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정말 저렇게 연기했는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대표님…… 저, 저 방금……”
“최고였어요, 나린 씨. 내 말 맞죠? 카메라가 나린 씨의 가장 아름답고 서늘한 순간을 담아낼 거라고.”
시우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나린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때, 시우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요란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알림: 유나린 배우의 공중파 데뷔 씬이 방영되었습니다.]
[액티브 스킬 ‘미디어 모니터링 (D)’을 가동합니다.]
시우의 시야 우측에 커다란 그래프와 실시간 빅데이터 키워드가 실시간으로 스크롤 되기 시작했다.
[실시간 반응 지표: 폭발 (안정 수치 대비 420% 초과)]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키워드]
1. 정의의 온도
2. 정의의 온도 아역 소희
3. 유나린
4. 정의의 온도 1화 계단녀
“대표님! 이거 보세요! 제 핸드폰이 이상해요!”
나린이 폰을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의 개인 SNS와 메신저 알림이 쉴 새 없이 터지며 기계가 렉이 걸릴 정도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시우는 노트북을 열어 국내 최대 연예 커뮤니티인 ‘드라마 갤러리’와 대형 포털 사이트 톡방을 확인했다. 실시간으로 글이 수십 개씩 쏟아지고 있었다.
- 와, 방금 소희 역 맡은 신인 누구냐? 눈빛 보고 진짜 지릴 뻔했다.
- 배진만 성님이 연기 톤으로 밀어붙이는데 신인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받아치네 ㄷㄷㄷ
- “지옥에는 아저씨 손 잡고 같이 갈게” 대사 칠 때 닭살 돋음. 목소리 톤 미쳤다.
- 연기 천재 발견이다. 유나린? 필모그래피도 없는 생짜 신인인데 어디서 이런 보물을 캐왔냐?
- 10초 남짓 나왔는데 오늘 여주인공보다 임팩트 훨씬 컸음 ㅋㅋㅋ
“와…… 대박이다.”
나린이 폰 화면을 보며 결국 울컥 눈물을 터뜨렸다.
50번의 오디션 탈락, 길거리 편의점 알바 시절의 고단함, 그리고 자신을 조롱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머리 위로 뜬 상태창이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폭발했다.
[대상 유나린의 재능이 대중에게 각인되었습니다.]
[스탯 변화]
- 스타성: D -> C+
- 대중 인지도: 무명 -> 주목받는 신예
[시스템 알림: 소속 배우의 인지도 상승에 따라 루미너스 기획의 업계 영향력이 1단계 상승합니다.]
[보유 포인트: 3,300 SP -> 4,300 SP]
시우는 우는 나린에게 휴지를 건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우의 자켓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잉- 지잉-
발신인은 HN 콘텐츠 정태원 상무였다.
“예, 상무님.”
- “강 대표! 내 말 맞지! 지금 우리 회사 홍보팀이랑 SBS 홍보실 전화통 불났네! 유나린이 누구냐고, 프로필 좀 보내달라고 난리야! 당장 내일부터 인터뷰랑 광고 문의 들어올 테니까 스케줄 비워둬!”
“예, 알겠습니다. 차분하게 대응하겠습니다.”
- “하하! 강 대표 역시 담이 커! 아무튼 축하하네. 진짜 대박이야!”
전화를 끊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다른 번호들이 화면에 줄지어 뜨기 시작했다.
[02-XXXX-XXXX (광고 대행사)]
[010-XXXX-XXXX (아웃도어 브랜드 마케팅팀)]
[010-XXXX-XXXX (영화 제작사 PD)]
끊임없이 울리는 진동음이 좁은 오피스텔 방안을 가득 채웠다.
시우는 밀려드는 전화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유나린이라는 작은 돌멩이가 던진 소리의 파동이, 이제 대한민국 연예계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해일이 되어 밀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