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5화: 방해 공작의 서막
서울 강남구 청담동, 대한민국 연예계의 중심이라 불리는 신성 엔터테인먼트 사옥.
그중에서도 실권자인 박철우 실장의 집무실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전망과 이탈리아제 고급 가죽 소파로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을 가득 채운 공기는 강남의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게 무겁고 서늘했다.
“그러니까…….”
박철우가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책상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툭, 하는 둔탁한 파열음이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강시우 그 새끼가 데려온 꾀죄죄한 무명년이 한혜원 작가 신작 조연으로 캐스팅됐다고? 우리 회사에서 그렇게 공을 들인 한채아를 밀어내고?”
“죄, 죄송합니다, 실장님! 그게, 오디션 현장에서 강시우 선배가 조감독 약점이라도 쥐고 흔든 건지…… 갑자기 감독이랑 작가가 눈이 뒤집혀서 그 신인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송민호 매니저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비굴하게 허리를 숙였다. 박철우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비틀린 실소가 새어 나왔다.
“강시우. 완전히 매장당해서 업계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할 줄 알았더니, 감히 내 밥그릇을 건드려?”
박철우는 강시우를 신성 엔터에서 해고하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신성의 간판스타였던 이태준을 경쟁사인 초코 엔터로 빼돌리는 막후 공작을 벌이며, 그 모든 불법적 책임을 강시우에게 뒤집어씌웠다. 업계의 배신자이자 횡령범이라는 낙인이 찍힌 강시우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평판까지 조져놓았는데, 겨우 길거리 알바나 하던 무명 유나린을 데리고 보란 듯이 입봉작을 낚아채다니.
박철우에게 그것은 단순한 캐스팅 탈락이 아니라, 강시우가 자신을 향해 띄우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유나린이랬나? 그 하찮은 가시나 하나 밟아 뭉개는 건 일도 아니지.”
박철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책상 위의 전화기를 들어 단축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어 번 울리자마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 어, 박 실장. 이 시간에 웬일인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껄껄거리는 목소리. 드라마 제작사 HN 콘텐츠의 실권자이자 제작본부장인 정태원 상무였다. 박철우는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싹싹하고 부드러운 톤으로 바꾸었다.
“아이고, 상무님!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들어가는 대작 ‘정의의 온도’ 캐스팅 건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저희 소속 탑배우인 최현우가 주연으로 들어가는데, 에피소드 핵심 조연인 한소희 역에 정체불명의 신인이 낙점되었다고 해서 말입니다.”
- 아, 그 역할? 이민우 감독이랑 한혜원 작가가 비공개 오디션에서 엄청난 물건을 발견했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던데.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 배우가 소속된 루미너스 기획이라는 곳의 대표가 바로 얼마 전 저희 신성에서 횡령 및 배임 혐의로 불미스럽게 쫓겨난 강시우입니다. 그런 문제 많은 기획사의 신인을 데려다 쓰시면, 나중에 방영 시점에 사법적 리스크나 평판 문제가 터졌을 때 투자사나 채널 쪽에서 엄청난 클레임이 들어올 겁니다. 저희도 그런 배우와 최현우를 같은 앵글에 담기는 곤란하고요.”
박철우는 정 상무의 숨소리를 살피며 결정적인 쐐기를 박았다.
“게다가…… 상무님과 저희가 긴밀하게 논의 중이던 차기 대작 ‘도심의 별’ 공동 제작 지분 건도 있지 않습니까? 신성 소속 배우들의 대거 투입도 약속드렸는데, 이번 일로 파트너십에 금이 가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전화기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정태원 상무는 전형적인 실리주의자였다. 드라마의 연출적 완성도보다 대형 기획사와의 협력과 차기작의 이권이 훨씬 중요했다.
- ……강시우가 데려온 신인이라. 알겠네. 아직 정식 출연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이니, 내가 조치를 취함세. 오늘 오전 대본 리딩이 있다고 들었으니 그전에 손을 쓰지.
“역시 상무님이십니다. 머리 아픈 일 없도록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면, 조만간 청담동에서 귀한 술자리 한 번 마련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박철우는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송민호를 향해 오만한 시선을 던졌다.
“강시우,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내 손바닥 안이야. 시작도 해보기 전에 사지를 찢어주지.”
같은 시각, 상암동 IT 타워에 위치한 HN 콘텐츠 본사 5층 복도.
“대표님, 정말 괜찮을까요? 오늘 첫 대본 리딩인데 아직 계약서를 못 써서…….”
유나린은 한쪽 모서리가 닳은 대본 뭉치를 품에 꼭 안은 채 불안한 표정으로 강시우를 바라보았다.
오늘을 위해 시우가 챙겨준 활동 지원비로 산 단정한 베이지색 블레이저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올린 나린은 제법 번듯한 여배우의 티가 났다. 하지만 50번의 탈락이 안겨준 트라우마는 정식 계약 전이라는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다시금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걱정 마. 리딩 시작 전에 조감독님이 계약서 양식 챙겨오시기로 하셨으니까. 나린 씨는 오늘 리딩에서 준비한 연기만 보여주는 데 집중해.”
시우는 따뜻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린의 차가운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하지만 시우 역시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자신의 스마트폰 뱅킹 앱에 찍힌 잔고는 1,380만 원대. 이번 드라마 출연료가 정산되어 들어오기 전까지 공유 오피스 월세, 리스 차량 주유비, 나린의 지원비 등으로 나갈 고정 지출을 생각하면 매일매일이 시한부나 다름없었다. 계약서에 확실히 도장을 찍고 선급금을 받아야 비로소 숨통이 트일 터였다.
그때, 저편 회의실 유리문이 열리며 조감독 김우현이 피로가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걸어 나왔다. 시우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으나, 김우현은 순간적으로 시우의 눈길을 피하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 강 대표님. 일찍 오셨네요.”
“예, 조감독님. 약속대로 리딩 전에 나린 씨 정식 계약서 서명부터 진행할 수 있을까요? 도장이랑 서류는 다 챙겨왔습니다.”
시우의 질문에 김우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헛기침을 했다.
“아…… 그게 말입니다. 경영지원실 쪽에서 결재 시스템 오류가 나는 바람에 최종 승인이 조금 지연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 리딩 일정이 너무 빡빡하니, 우선 대본 리딩부터 무사히 끝마치고 서명하시는 걸로 하시죠.”
‘시스템 오류?’
대기업 계열의 대형 제작사에서 정식 계약 날인을 고작 시스템 오류 핑계로 미루는 일은 없다.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시우의 직감이 위험 신호를 요란하게 울려댔다. 박철우의 그림자가 이 장소까지 뻗쳐온 것이 분명했다.
시우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앞에 투명한 황금빛 시스템 창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알림: 액티브 스킬 ‘프로젝트 분석 (C)’을 발동합니다.]
[작품명: 정의의 온도]
[제작사 내부 동향 및 보안 정보]
- 신성 엔터테인먼트 박철우 실장의 외압 감지: HN 콘텐츠 정태원 상무에게 박철우가 직접 연락하여 강시우의 과거 횡령 루머를 유포하고, 유나린을 하차시키지 않을 시 주연 배우 최현우의 일정 비협조 및 차기 공동 제작 작 ‘도심의 별’ 지분 박탈을 협박함.
- 정태원 상무의 고의적인 계약 지연 지시: 박철우가 제안한 ‘도심의 별’ 독점 공동 제작 지분 및 사적 리베이트(뒷거래)를 받기 위해, 유나린과의 출연 계약을 고의로 미루고 리딩 직후 공식 하차 통보를 내릴 계획임.
- **핵심 보안 유출 정보**: 박철우가 정태원에게 약속한 ‘도심의 별’ 독점 저작권 및 해외 판권은 이미 3일 전, 이태준의 이적 합의금 면제 및 뒷거래를 대가로 경쟁사인 ‘초코 엔터’에 100% 매각 및 양도 완료됨. 박철우는 현재 해당 판권의 권한을 상실한 상태이며 정태원 상무를 상대로 완벽한 기망 행위(사기)를 저지르고 있음.
시우의 입꼬리가 소리 없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
박철우가 유나린의 목줄을 죄기 위해 뻗은 발톱이, 오히려 제 발목을 자르는 칼날이 되어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시스템이 제공해 준 이 비밀 정보는 정태원 상무의 목덜미를 단숨에 물어뜯을 수 있는 완벽한 사냥감이었다.
“아, 그렇군요. 시스템 오류라면 어쩔 수 없죠. 그럼 기분 좋게 리딩부터 끝내고 도장 찍도록 하겠습니다.”
시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우현 조감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을 회의실 안으로 안내했다.
HN 콘텐츠 1회의실 안은 이미 드라마의 주·조연 배우들과 제작진, 그리고 방송사 관계자들로 빽빽하게 메워져 있었다.
회의용 테이블 중앙에는 이민우 감독과 한혜원 작가가 앉아 있었고, 그 바로 옆자리에는 드라마의 타이틀 롤을 맡은 톱스타 최현우가 검은색 니트 차림으로 대본을 훑어보고 있었다. 날카롭고 조각 같은 이목구비에서 뿜어 나오는 탑배우 특유의 아우라가 사방을 압도하고 있었다.
시우는 최현우를 바라보며 조용히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최현우 (35세)]
[소속: 신성 엔터테인먼트]
[재능: 연기 (A+), 스타성 (S), 비주얼 (S)]
[현재 상태: 캐릭터 분석 완료. 상대 배우들과의 호흡에 큰 기대를 품고 있음.]
‘역시 최현우군.’
비록 박철우의 소속 배우였지만, 그는 작품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하고 영리한 배우로 소문나 있었다. 시우는 곧바로 나린과 최현우 사이의 궁합을 알아보기 위해 신규 패시브 스킬을 가동했다.
[알림: 패시브 스킬 ‘배우 싱크로율 분석 (D)’이 연동됩니다.]
[분석 대상: 유나린 (한소희 역) <-> 최현우 (강민재 역)]
[연기 합치율 및 시너지 확률: 93% (임계치 80% 초과)]
[*효과: 두 배우가 대사를 주고받을 때 극적인 몰입도와 캐릭터 간의 텐션이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93%라는 압도적인 수치가 머릿속을 스쳤다. 나린의 재능이 최현우라는 거물을 만나면 어떤 시너지를 낼지,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자, 다들 자리해 주셨으니 대본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이민우 감독의 마이크 음성과 함께 회의실 안의 잡음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초반부 주인공의 아역 시절과 검사 강민재의 등장이 이어지며 회의실의 공기가 서서히 뜨거워졌다. 최현우의 연기는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차분하고 냉철한 검사 ‘강민재’를 마치 실제 인물처럼 살려내는 그의 정확한 딕션과 입체적인 톤에 스태프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아동 학대 피해자 ‘한소희’가 검사실에서 강민재와 면담하는 씬이 찾아왔다.
유나린이 대본을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녀의 깊은 호흡 소리가 정적 속에 나직하게 내려앉았다.
“……눈물이요? 안 나는데요.”
나린의 대사가 회의실 전체를 서늘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인위적으로 쥐어짜 내는 오열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비명도 없었다. 오직 메마르고 건조한, 체념 끝에 남은 독기만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최현우가 대본을 보던 눈을 번쩍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유나린에게 꽂혔다. 최현우의 내면에서 탑배우로서의 연기적 본능이 깨어나는 것이 스탯 창의 변화로 보였다.
“한소희 양. 진술을 거부하면 아버지를 처벌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아무 기억도 안 납니까? 그날 밤 아버지가 소희 양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최현우의 낮고 묵직한 대사에 나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응수했다.
“울면 더 때리거든요. 아저씨는 알아요? 시끄럽다고, 우는 소리 듣기 싫다고 머리채 잡혀서 차가운 화장실 타일 바닥에 짓눌려 본 적 있어요? 그래서 안 울어요. 눈물을 흘리는 건 지는 거니까. 소희는 지기 싫거든요.”
나린은 최현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두 눈동자 속에 서린 서늘한 증오와 생존을 향한 집념이 93%의 싱크로율을 타고 최현우에게 다이렉트로 내리꽂혔다.
최현우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대본을 읽는 것이 아니었다. 최현우는 실제 검사 강민재로서 지옥 같은 고통을 견뎌낸 소희의 영혼과 마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대사를 주고받을 때마다 회의실 내부의 텐션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터질 듯이 긴장되었다.
“……이상입니다.”
두 사람의 긴 장면이 끝나자, 대회의실 안에는 숨소리조차 내기 힘든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와…….”
어디선가 나직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한혜원 작가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역시 내가 소희를 제대로 골랐어! 나린 씨, 방금 최 배우님과의 호흡은 정말 최고였어요. 내가 글을 쓰면서 꿈꿨던 소희가 대본을 뚫고 걸어 나온 기분이에요.”
최현우 역시 대본을 내려놓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은 채 나린을 바라보았다.
“유나린 씨라고 하셨죠? 신인이라 들었는데 에너지가 엄청나네요. 저도 모르게 몰입해서 대사를 던졌습니다. 현장에서의 호흡이 무척 기다려지네요.”
“가,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린이 얼굴을 붉히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대본 리딩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웃지 않았다. 박철우의 덫이 이미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딩이 종료되자마자 조감독 김우현이 굳은 얼굴로 시우에게 다가왔다.
“강 대표님. 잠시 비상구 쪽으로 오시죠.”
복도 구석,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어두운 비상구 계단 참.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대표님…….”
김우현 조감독이 머리를 푹 숙이며 탄식했다.
“방금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유나린 배우의 캐스팅을 취소하고, 다른 신인으로 대체하라고 합니다.”
“방금 리딩 보셨잖습니까. 작가님도 대만족하셨고, 주연인 최현우 배우도 극찬을 보냈습니다. 현우 배우와의 연기 싱크로율은 현장에 있던 누구라도 인정할 수준이었는데, 교체라니요?”
시우가 나직하지만 뼈가 서린 목소리로 다그쳤다. 김우현은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저도 죽을 맛입니다! 이 감독님이랑 한 작가님도 지금 상무실로 뛰어 올라가서 문을 부술 기세로 항의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정태원 상무님이 신성 엔터 박철우 실장의 외압을 받고 요지부동입니다. 신성 쪽에서 유나린을 빼지 않으면 최현우 배우의 촬영 스케줄 협조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압박한 모양입니다. 차기 대작 공동 제작 건도 걸려 있어서…… 죄송합니다. 제 선에선 도저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김우현의 절망적인 한탄을 들으며 시우는 가방을 고쳐 멨다.
“조감독님. 정태원 상무님 집무실이 8층이죠?”
“예? 맞긴 합니다만…… 가셔도 소용없을 겁니다. 이미 결정이 끝난 사안이라…….”
“상관없습니다. 제가 직접 올라가서 정 상무님 도장을 받아오겠습니다.”
시우는 망설임 없이 비상구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HN 콘텐츠 본사 8층의 상무 집무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잔뜩 성이 난 한혜원 작가의 고성이 복도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 상무님! 다 결정된 캐스팅을 당일 리딩까지 마친 마당에 뒤엎는 게 말이 됩니까? 이건 연출팀과 작가에 대한 기만이자 횡포입니다!”
“한 작가, 진정하세요! 드라마라는 게 예술만 가지고 됩니까? 신성 엔터와의 오랜 파트너십, 그리고 내년도 텐트폴로 기획 중인 ‘도심의 별’ 공동 제작 지분까지 얽혀 있는 문제입니다. 회사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결정이니 대국적인 차원에서 양해하세요!”
책상 뒤에 앉은 정태원 상무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서 이민우 감독과 한 작가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때, 상무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활짝 열렸다.
두꺼운 문을 열고 성큼 걸어 들어오는 강시우의 등장에 정 상무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당신 뭐야? 비서! 경비원 안 부르고 뭐 하는 거야?”
“비서분 탓할 것 없습니다. 정 상무님이 그렇게 금지옥엽처럼 여기시는 신성 엔터 박철우 실장의 ‘도심의 별’ 계약에 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제 발로 왔습니다.”
시우는 조소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정 상무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 당당한 기세에 정 상무는 헛기침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애송이 1인 기획사 대표가 뭘 안다고 여길 함부로 들어와? 당장 나가!”
“박철우가 ‘도심의 별’ 독점 제작권과 판권을 HN 콘텐츠에 넘겨주는 대가로 유나린의 하차를 요구했겠죠. 하지만 상무님, 그거 아십니까?”
시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에 띄운 텍스트를 정 상무에게 보여주었다.
“박철우가 약속한 ‘도심의 별’ 해외 배급권 및 원작 판권은 이미 3일 전, 신성 엔터가 이태준 배우를 이적시키는 뒷거래 조건으로 경쟁사인 ‘초코 엔터’에 100% 매각 완료되었습니다. 이미 이사회 결재와 특허권 양도 계약 날인까지 전부 마친 상태죠.”
정 상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개소리야! 그 기획은 신성 엔터의 독점 판권인데 초코에 넘어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거짓말 같으시면 지금 즉시 초코 엔터 사업개발본부의 김 본부장님께 전화 걸어 확인해 보시죠. 양수 안건 승인 번호는 ‘CHOCO-2026-0701-A’일 겁니다. 박철우는 이미 아무런 권한도 없는 깡통 기획안을 미끼로 던져, 상무님을 속이고 신성 내부의 똥을 HN 콘텐츠를 이용해 치우려던 겁니다.”
시우가 읊어대는 승인 번호와 날짜는 지나치게 디테일했다.
정 상무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권한도 없는 사기꾼에게 속아 자사 최고 화제작인 ‘정의의 온도’의 황금 캐스팅을 망치고, 회사의 투자금을 허공에 날릴 대형 징계감 사고를 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정 상무는 급하게 스마트폰을 낚아채 비밀번호를 풀었다. 그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수화기 너머로 연결되는 동안 정 상무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어, 김 본부장? 나 HN 정태원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3일 전에 초코에서 양수한 신성 기획안 중에 ‘도심의 별’이 들어 있나? ……뭐? 진짜야? 독점 해외 판권 계약까지 싹 다 넘어갔다고?”
수화기를 들고 있던 정 상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의 턱관절이 부르르 떨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실 확인은 강시우의 말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박철우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뒷거래로 이중 계약을 맺어 사기를 쳤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정 상무가 터덜터덜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의 두 눈에 박철우를 향한 맹렬한 분노가 들끓었다.
“박철우…… 이 개새끼가 감히 나를 속여? 깡통을 쥐여주고 나를 장난감처럼 굴려?”
시우는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늑대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쐐기를 박았다.
“신성 엔터가 제안한 딜은 사기 계약입니다. 상무님은 사기꾼의 장단에 맞춰 유나린 배우를 하차시키고, 이민우 감독님과 한혜원 작가님과의 신뢰를 깨며, 최현우 배우와의 93% 연기 시너지를 자랑하는 진짜 원석을 날려버리는 우를 범하시겠습니까?”
시우는 가방 안에서 정성스레 준비해 온 유나린의 출연 계약서 두 부를 정 상무의 책상 위에 부드럽게 올려놓았다.
“아니면, 지금 즉시 이 계약서에 서명하셔서 드라마의 완성도를 사수하시겠습니까? 박철우에게는 이 이중 계약의 책임을 물어 법적으로 신성 엔터의 목덜미를 쥐고 HN 콘텐츠의 이익을 극대화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상무님이 이중 계약 사기를 선제적으로 밝혀내어 회사의 위기를 구한 영웅이 되는 길이죠. 선택은 상무님이 하시는 겁니다.”
정태원 상무는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와 그 앞에 서 있는 강시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일개 무명 1인 기획사의 풋내기 대표라고 생각했던 강시우의 배후에는 거대한 정보망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정 상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서랍에서 만년필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좋네. 계약서에 싸인 하지.”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정 상무의 서명이 계약서 위를 달렸다. 그리고 무거운 철제 직인이 찍혔다.
쿵! 쿵!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시우의 망막 위로 찬란한 황금빛 시스템 알림창들이 화려하게 쏟아져 내렸다.
[알림: 네 번째 연계 퀘스트 ‘유나린의 정식 출연 계약 체결’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보상: 시스템 포인트 1,000 SP를 획득했습니다. (현재 보유 포인트: 1,800 SP)]
[보상: 스킬 ‘배우 싱크로율 분석’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D -> C)]
[보유 스킬 정보 업데이트]
- 배우 싱크로율 분석 (C): 인물 간의 연기 싱크로율 분석 정확도가 대폭 향상되며, 상대 배우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해 자사 배우에게 실시간 연기 피드백(버프 제공 가능)을 주는 기능이 해금됩니다.
시우는 계약서 한 부를 정중히 챙겨 품에 넣었다. 상무실 구석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던 이민우 감독과 한혜원 작가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와 함께 시우를 향한 깊은 리스펙트가 감돌았다.
“감사합니다, 상무님. 드라마 ‘정의의 온도’에 결코 후회 없는 선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우는 허리를 숙여 예의를 표한 뒤, 거침없이 상무실을 걸어 나왔다.
사옥 밖으로 나오자 늦가을의 차가우면서도 맑은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시우는 품속에 넣은 정식 계약서의 묵직한 감촉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박철우가 기세등등하게 뻗은 첫 번째 발톱을 완벽하게 뭉개버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