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4화: 첫 번째 기회, 첫 번째 오디션
마포구 성산동의 비좁은 공유 오피스 창밖으로 늦가을의 차가운 빗줄기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뿌옇게 김이 서린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던 강시우는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 인터넷 뱅킹 앱에 찍힌 숫자는 그의 심장을 서늘하게 옥죄어 왔다.
[잔액: 13,870,000원]
불과 이틀 만에 자금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유나린에게 선지급한 첫 달 활동 지원비 150만 원, 공유 오피스의 1인 데스크 월세 25만 원, 오래된 쏘나타 차량의 리스료와 주유비, 그리고 하루 두 끼를 겨우 때우는 저렴한 식비까지.
1인 기획사 ‘루미너스 기획’의 돛을 올리자마자 돈은 마치 모래밭에 쏟아진 물처럼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길어야 석 달이다.”
시우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대형 기획사인 신성 엔터테인먼트에 몸담고 있을 때는 몇억 원짜리 예산안도 무감각하게 결재하곤 했다. 하지만 오롯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만 원짜리 한 장은 뼈가 시릴 만큼 무겁게 와닿았다.
이 재정적 압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 유나린을 하루빨리 시장에 데뷔시켜 확실한 매출을 발생시키는 것뿐이었다.
시우는 침을 삼키며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에는 새로 해금된 시스템 스킬로 포착한 드라마의 상세 정보가 띄워져 있었다.
[작품명: 정의의 온도]
[장르: 법정 휴먼 드라마]
[극본: 한혜원 / 연출: 이민우]
[미래 흥행도: ★★★★☆ (4.5)]
[특이사항: 아동 학대 피해자 역의 조연 ‘한소희’ 배역 캐스팅 난항 중. 제작진은 대본의 감정선을 살릴 수 있는 미성숙하지만 깊은 눈빛의 신인 배우를 물색하고 있음.]
시청률 보증수표라 불리는 스타 작가 한혜원과 꼼꼼한 심리 묘사로 유명한 이민우 감독의 신작. 게다가 흥행도 별점이 4.5개라는 것은 이 드라마가 방영 즉시 신드롬을 일으킬 대작이라는 확증이었다.
비록 한 에피소드의 조연에 불과한 역할이었지만, 사건의 핵심 열쇠를 쥔 인물인 만큼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다.
시우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남색 수트를 꺼내 입었다. 신성 엔터 시절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마다 입던 옷이었다. 소매 가장자리가 조금 닳아 있었지만, 거울 속 시우의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그는 가방에 유나린의 프로필 인쇄본을 챙겨 넣고 곧장 상암동으로 향했다.
드라마 제작사 ‘에이치엔 콘텐츠(HN Contents)’가 입주해 있는 상암동 IT 타워 8층.
사무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와 팩스기가 종이를 뱉어내는 거친 소음이 귀를 찔렀다. 복도 양옆으로는 배달된 퀵서비스 박스들과 배우들의 프로필이 담긴 투명 비닐 파일 상자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쌓여 있었다.
“프로필 접수는 이미 마감됐습니다. 그냥 저기 캐비닛 옆 상자에 두고 가세요.”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은 시우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모니터 화면을 보며 기계적으로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상자 안에는 수백 명의 배우 프로필이 무덤처럼 쌓여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저곳에 프로필을 던져두고 가는 것은 쓰레기통에 바로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신인 기획사의 프로필이 연출자의 책상 위에 올라갈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시우는 물러서지 않고 데스크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루미너스 기획 대표 강시우입니다. ‘정의의 온도’ 캐스팅을 총괄하시는 김우현 조감독님을 뵈러 왔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약속 없으시면 면담 불가능합니다. 지금 조감독님 회의 중이시라…….”
직원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받으려 수화기를 들던 그때였다.
사무실 안쪽 유리문이 벌컥 열리며,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다크서클이 턱끝까지 내려온 청년이 머리를 짚으며 걸어 나왔다. 그의 품에는 반려된 듯한 두꺼운 대본 뭉치가 안겨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시스템의 반투명한 스탯 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름: 김우현]
[직업: 드라마 ‘정의의 온도’ 조감독]
[현재 상태: 극심한 정신적 피로, 신경과민]
[고민: 한혜원 작가가 추천된 조연 후보들의 연기가 너무 가식적이고 정형화되어 있다며 전부 퇴짜를 놓음. 당장 이틀 뒤가 최종 오디션인데 쓸만한 신인을 찾지 못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음. 학대의 그늘 속에서도 살아남으려는 강인한 눈빛을 지닌 원석을 갈망하고 있음.]
시우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시스템이 제공해 준 상대의 정보는 완벽한 무기였다.
시우는 직원의 제지를 가볍게 피하며 김우현 조감독에게 성큼 다가갔다.
“김우현 조감독님. 루미너스 기획의 강시우입니다. 잠시 3분만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아, 바쁩니다. 프로필은 저기 모아두는 곳에…….”
김우현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지나치려 했다. 시우는 그의 등 뒤를 향해 나직하지만 정확한 톤으로 말을 건넸다.
“한혜원 작가님이 찾는 ‘한소희’는 동정표를 구걸하며 눈물을 흘리는 유약한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김우현의 걸음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우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피로로 충혈된 그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서렸다.
“……당신,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직 외부에 피드백이 나가지 않았을 텐데.”
“업계에서 7년을 굴렀습니다. 한 작가님의 전작들을 분석해 보면 답이 나오죠. 작가님이 그리는 생존자들은 결코 나약하지 않습니다. 학대의 고통 속에서도 눈물을 삼키고 복수를 설계하는 단단한 독기를 가졌죠. 지금 대형 기획사들이 밀어 넣는 신인들의 기계적인 눈물 연기가 작가님 눈에 차릴 리가 없잖습니까?”
김우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 저녁 비공개 회의실에서 작가와 감독이 나눈 대화의 본질을 이 낯선 기획사 대표가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유나린이라는 배우입니다.”
시우는 가방에서 나린의 프로필 봉투를 꺼내 김우현의 손에 쥐여주었다.
“오디션을 오십 번 떨어졌습니다. 전형적인 예쁘고 착한 배역에 맞추기에는 눈빛이 너무 강하고 독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죠. 하지만 한소희 역에는 이 아이 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딱 5분만 오디션 기회를 주십시오. 만약 감독님과 작가님이 만족하지 못하신다면, 앞으로 에이치엔 콘텐츠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김우현은 봉투에서 흘러나온 프로필 사진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비치는 서늘하고도 맑은 눈동자. 기존의 정형화된 미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날 것 그대로의 아우라가 사진을 뚫고 나오는 듯했다.
조감독의 머리 위 상태창에 표시된 ‘신경과민’ 수치가 미세하게 완화되며 호기심으로 채워졌다.
김우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프로필을 챙겼다.
“……목요일 오후 2시. 원래 예약했던 대형 기획사 배우 한 명이 스케줄 문제로 펑크를 냈어요. 그 타임에 밀어 넣을 테니까 늦지 않게 오세요. 만약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강 대표님도 이 바닥에서 얼굴 보기 힘들 겁니다.”
“감사합니다, 조감독님.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시우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거대한 장벽의 틈새를 기어코 벌려놓은 순간이었다.
합정동의 한 지하 대여 연습실.
환풍기도 제대로 돌지 않아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공간이었지만, 유나린은 온몸이 땀에 젖도록 대본을 외치고 있었다.
“눈물이요? 안 나는데요. 아저씨는 매일 밤 맞으면서 울어봤어요? 울면 더 때려요. 시끄럽다고……!”
나린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목소리를 떨었다. 슬픔이 뚝뚝 묻어나는 처연한 오열이었다. 50번의 오디션을 거치며 연출자들이 신인에게 요구하는 전형적인 ‘피해자 캐릭터’의 정석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대본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린 씨, 잠깐 멈춰봐.”
시우가 차가운 생수병을 건네며 연습실 거울 앞에 섰다. 나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대표님, 방금 연기는 어땠나요? 최대한 불쌍하고 억울한 감정을 살려보려고 했는데…….”
“연기의 기술은 훌륭했어. 하지만 완전히 틀린 해석이야.”
나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또다시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공포가 그녀의 어깨를 굳어지게 만들었다.
시우는 나린의 눈을 따뜻하지만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마주했다.
“한소희는 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옥 같은 가해를 견딘 아이야. 그 지옥 속에서 매번 눈물을 흘렸다면 진작에 정신이 무너졌겠지. 소희의 눈물샘은 이미 오래전에 말라붙었어. 검사나 경찰 앞에서 소희가 덤덤할 수 있는 건,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야.”
시우는 나린의 대본을 톡톡 두드렸다.
“울지 마. 목소리를 떨지도 마. 오히려 차분하고 건조하게 대사를 뱉어. 대신 눈빛에는 뼛속까지 시린 복수심과 생존을 향한 집념을 담는 거야. 나린 씨가 그동안 오디션에서 떨어진 건 연기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야. 본인이 가진 그 거대하고 서늘한 날것의 재능을 억지로 감추고, 남들의 입맛에 맞는 착하고 약한 피해자 흉내를 내려고 했기 때문이지. 이번에는 숨기지 마. 나린 씨가 가진 그 날카로운 독기를 온전히 뿜어내 봐.”
나린은 멍하니 대본의 글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오십 번의 오디션 동안 모든 심사위원들은 그녀에게 ‘더 약하게 보여라’, ‘더 눈물을 흘려라’ 하고 강요했다. 가슴속에 들끓는 뜨거운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여지없이 주연을 위협하는 과한 연기라며 질책당했다.
그런데 시우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족쇄를 풀고 마음껏 이빨을 드러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린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지하실의 서늘한 공기가 허파 깊숙이 들어오자,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시 해볼게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싹 가셨다. 서늘한 독기가 거울 너머의 공간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오디션 당일. HN 콘텐츠의 대기실 복도는 얼음장 같은 긴장감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획사의 신인 배우들이 저마다 완벽한 메이크업과 고급스러운 의상을 차려입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곁에는 소속사 로고가 박힌 자켓을 입은 매니저들이 서성거리며 배우의 컨디션을 체크하느라 분주했다.
그 틈에서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캐주얼한 데님 자켓을 걸친 유나린의 모습은 유독 초라해 보였다.
“어라? 이게 누구야? 강시우 선배 아니신가?”
복도 끝에서 얄개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걸어왔다.
신성 엔터테인먼트의 주니어 매니저, 송민호였다. 시우 밑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던 녀석이었는데, 시우가 해고당한 틈을 타 박철우 실장의 라인으로 잽싸게 갈아타 입지를 다진 모양이었다.
“회사 잘리고 길거리에 나앉았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진짜로 이런 보잘것없는 애를 데리고 오디션을 돌고 계셨네. 선배, 감 떨어졌어요? 이런 애들은 백날 굴려봤자 차비도 안 나와요.”
송민호가 나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음을 섞어 혀를 찼다. 주변에 있던 다른 기획사 관계자들의 시선이 쏠리자 나린의 어깨가 눈에 띄게 위축되며 떨리기 시작했다.
시우는 한 걸음 나아가 나린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송민호 옆에 얌전히 서 있는 신인 여배우의 머리 위를 보았다.
[이름: 한채아]
[재능: 연기(C), 비주얼(A), 스타성(B)]
[미래 흥행도: ★★☆☆☆ (2.0)]
얼굴은 반질반질하게 예쁘장했지만, 배우로서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는 연기 재능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시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송민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민호야. 남 걱정하기 전에 네가 데려온 배우 단속이나 잘해라. 비주얼은 번지르르한데 눈빛이 텅 비어 있네. 한혜원 작가님 눈빛이 얼마나 매서운지 벌써 잊었나 본데, 그런 영혼 없는 연기로 심사장에 들어갔다간 1분도 안 돼서 대본으로 머리 맞고 쫓겨날 테니까.”
“뭐, 뭐라고요? 이 인간이 진짜 정신을 못 차렸나……!”
송민호가 얼굴을 붉히며 다가서려던 찰나, 심사장의 문이 열리며 조감독 김우현이 밖을 내다보았다.
“루미너스 기획, 유나린 씨 들어오세요.”
시우는 이를 부득부득 가는 송민호를 완전히 스쳐 지나가며 나린의 양 어깨를 지시하듯 꾹 눌러주었다.
“나린 씨. 문 너머는 오직 나린 씨만의 무대야. 복도의 잡소리들은 전부 쓰레기통에 버려두고, 아까 지하실에서 했던 그대로만 쏟아내고 와.”
나린은 움켜쥐었던 주먹을 천천히 풀며 시우를 응시했다. 시우의 눈 속에 담긴 절대적인 확신이 그녀의 혈관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나린이 허리를 곧게 펴고 심사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방음문을 열고 들어선 심사장 내부는 무거울 정도의 피로와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마시다 만 에스프레소 컵들과 이리저리 뒤섞인 서류 뭉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심사위원석 중앙에 앉은 이민우 감독과 한혜원 작가는 수십 명의 판에 박힌 오디션을 보느라 영혼이 반쯤 가출한 표정이었다.
“필모도 전혀 없는 생신인이네요. 시간도 없는데 빨리 봅시다.”
한혜원 작가가 한숨 섞인 어조로 대본을 뒤적이며 말했다.
나린은 심사위원들 앞 표시된 라인 위에 섰다. 데님 자켓 아래로 살짝 드러난 하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민우 감독이 마이크를 켜고 차분하게 말했다.
“유나린 씨. 준비되면 시작하세요.”
나린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오십 번의 쓰라린 거절, 자신을 외면하던 수많은 카메라들. 하지만 그 어둠을 뚫고 시우의 단단한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당신은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진짜 천재 배우입니다.’
나린이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대기실에서 보였던 위축된 신인의 기색은 단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갑고 서늘한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머리 위에 보이지 않는 황금빛 S급 재능의 상태창이 찬란하게 번쩍였다.
“……눈물이요?”
나린의 첫 대사가 방 안의 공기를 찢고 흘러나왔다.
억지로 쥐어짜 내는 슬픔도, 억울한 울음소리도 없었다. 오직 기가 막힌다는 듯한, 차가운 조소만이 가득 찬 나직한 톤이었다.
“안 나는데요. 아저씨는 매일 밤 맞으면서 울어봤어요? 울면 더 때려요. 시끄럽다고 시끄럽다고 소리 지르면서.”
그녀는 테이블에 앉은 한혜원 작가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 눈빛은 동정을 바라는 약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상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려는 집요한 생존자의 눈이었다.
“그래서 참는 법을 배웠어요. 눈물을 흘리는 건 지는 거니까. 제가 지금 바라는 건 딱 하나예요. 그 인간이 저 차가운 철창 안으로 들어가는 거. 내가 살려면, 그 인간이 죽거나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하니까요.”
나린의 대사는 감정이 메마른 듯 건조하게 툭툭 던져졌다. 하지만 대사를 읊는 동안 테이블을 움켜쥔 그녀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짓눌려 굳어 있었다. 얼굴은 극도로 평온했으나, 전신은 분노와 공포를 억누르느라 터질 듯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절제된 표현 속에 숨겨진 날 선 감정의 파괴력이 심사장을 압도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대본 위를 움직이던 한혜원 작가의 볼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한 작가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나린의 연기에 넋을 잃고 있었다.
이민우 감독 역시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전율에 모니터 화면을 보던 눈을 떼고 나린을 직시했다. 카메라 프레임을 설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 궤적 자체가 그대로 완벽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연기가 끝났음에도 심사장 안에는 숨소리조차 내기 힘든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나린이 거친 숨을 내쉬며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서늘하던 공기가 걷히고, 다시 평범한 신인 여배우의 맑은 눈빛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이민우 감독이 마른침을 삼키며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묻어났다.
“……유나린 씨. 왜 울지 않았죠? 다른 지원자들은 전부 오열을 하던데.”
“소희는 우는 법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울음이 자신을 구해주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아이니까요. 소희에게 지금 가장 시급한 건 눈물이 아니라 생존입니다.”
나린의 대답에 한혜원 작가가 의자에서 상체를 완전히 앞으로 기울였다.
대본을 쓸 때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한소희의 복합적인 내면을, 이 이름 없는 신인 배우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고스란히 체화하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밖에서 대기해 주세요.”
이 감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린은 정중히 인사하고 심사장을 빠져나왔다.
방음문이 굳게 닫히자마자, 한혜원 작가가 흥분한 목소리로 테이블을 탁 쳤다.
“이 감독님! 얘예요! 소희는 무조건 얘로 가야 해요! 신성이고 대형 기획사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내가 찾던 소희가 저기서 걸어 들어왔잖아요!”
이민우 감독 역시 깊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동감입니다. 진짜 물건을 발견했네요.”
오디션장 건물 1층 로비.
두꺼운 철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긴장이 풀린 나린의 무릎이 꺾였다. 시우가 재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단단하게 지탱했다.
“나린 씨, 괜찮아?”
“대표님…… 저 진짜 어떻게 연기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지하실에서 말씀해 주신 생각만 하면서 그냥 뱉었는데…… 반응이 너무 조용해서 망한 줄 알았어요.”
나린의 하얀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시우는 손수건을 건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완벽했어. 내가 보장하지. 자, 고생했으니 밥 먹으러 가자.”
시우는 나린을 데리고 상암동 모퉁이에 있는 허름하지만 국물이 끝내주는 순대국밥집으로 향했다. 사실 첫 오디션을 마친 배우에게 근사한 레스토랑의 파스타라도 대접하고 싶었지만, 시우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1,300만 원이라는 한정된 예산이 아른거렸다.
뚝배기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국밥 두 그릇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초조함이 맴돌았다. 나린은 숟가락으로 국물만 휘휘 저을 뿐,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업계의 캐스팅이라는 것은 도장을 찍기 전까지는 언제든 대형 기획사의 압력이나 낙하산으로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을 시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철우가 눈치채기 전에 확실하게 계약을 묶어두어야 하는데…….’
바로 그 순간, 시우의 바지 주머니에서 요란한 진동이 울렸다.
징-, 징-.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은 ‘HN 콘텐츠 김우현 조감독’이었다. 시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통화 버튼을 밀어 올렸다.
“예, 조감독님. 강시우입니다.”
- 강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방금 이민우 감독님이랑 한 작가님 최종 조율 끝났습니다. 유나린 씨 캐스팅 확정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김 조감독의 들뜬 목소리에 시우는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정말입니까?”
- 예! 한 작가님이 유나린 씨 아니면 대본 수정도 안 하겠다고 배수진을 치셨어요. 이번 주 금요일에 대본 리딩이 있으니 일정 비워두시고, 계약서 작성은 그때 진행하시죠. 회당 출연료는 80만 원 선으로 낙찰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감독님.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시우가 멍하니 폰을 내려놓자, 눈이 동그래진 나린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대표님…… 설마……?”
“나린 씨. 캐스팅됐어. '정의의 온도' 한소희 역, 정식 합격이야.”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린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오디션장에서는 독하게 삼켰던 그 눈물이, 이제는 주체할 수 없는 환희의 강물이 되어 뺨을 적셨다.
오십 번의 쓰라린 거절 끝에 마침내 쟁취해 낸 인생 첫 번째 배역이었다.
“흐윽…… 대표님…… 저 진짜 배우 하는 거 맞죠? 진짜 촬영 나가는 거죠?”
“그래. 나린 씨가 본인의 실력으로 당당하게 따낸 거야.”
시우가 나린에게 휴지를 건네며 안도의 미소를 짓는 찰나,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우며 눈이 부실 정도의 황금빛 알림창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띡!
[알림: 세 번째 연계 퀘스트 ‘유나린의 첫 배역(단역 이상) 확정을 완료하라!’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보상: 시스템 포인트 500 SP를 획득했습니다. (현재 보유 포인트: 800 SP)]
[보상: 보유 스킬 ‘프로젝트 분석’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D -> C)]
[보상: 새로운 패시브 스킬 ‘배우 싱크로율 분석 (D)’이 해금되었습니다.]
[보유 스킬 정보 업데이트]
- 프로젝트 분석 (C): 분석 가능한 범위가 드라마/영화의 조연 이하 캐스팅 정보에서 ‘주연 및 제작사 내부 핵심 기획/보안 동향’까지 확대됩니다.
- 배우 싱크로율 분석 (D): 특정 배우가 특정 대본의 캐릭터를 연기할 때의 연기 합치율 및 매칭 확률을 백분율(%) 수치로 가시화하여 제공합니다.
시우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강렬한 희열을 느꼈다.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시작했던 무모해 보이던 도박이 마침내 그 첫 번째 결실을 맺었다. 이로써 루미너스 기획의 찬란한 등대가 본격적으로 어두운 연예계 바다를 밝힐 준비를 마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