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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22화

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22화: 캐스팅 테이블의 역전

수요일 오후, SBS 드라마센터 7층 회의실.

긴 타원형 테이블 위에 <블랙 아웃>의 인물 관계도와 편성 검토표가 펼쳐져 있었다.

신우진은 자기 앞에 놓인 대본 표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주태건’이라는 이름 아래에 붙은 포스트잇은 이미 여러 번 뜯겼다 붙은 듯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했다.

그 맞은편에는 신성 엔터의 서강혁이 앉아 있었다. 사극과 법정물에서 주연을 맡아 온 배우답게 단정한 인상과 안정된 발성이 장점인 남자였다. 단순히 대형 기획사의 이름값만으로 밀어 넣을 카드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까다로웠다.

한미라 제작총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우진 배우가 가진 에너지는 분명합니다. 다만 해외 판권 쪽에서 우려가 있어요. 기존 필모그래피가 너무 한쪽으로 쏠렸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녀가 태블릿 화면을 돌렸다. 신우진의 과거 출연작 캡처가 빼곡히 나열돼 있었다. 조직의 행동대장, 사채업자, 경호원, 조폭 두목의 오른팔.

“주태건은 첫 회부터 시청자가 따라가야 하는 형사입니다. 무섭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문세진 CP가 서강혁 쪽 자료를 넘겼다.

“반대로 서강혁 배우는 수사물 경험이 있죠. 신성 쪽에서는 제작 지원도 검토하겠다고 했고요. 해외 마케팅 비용으로 8억을 추가 편성할 수 있다는 제안입니다.”

신우진의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시우는 그 손을 봤다. 우진이 화를 낼 때마다 손부터 굳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한 번이라도 거친 배우처럼 보이면 상대가 원하는 결론을 대신 써 주는 셈이었다.

“제작 지원에는 조건이 붙었겠죠.”

시우의 말에 한미라가 잠깐 눈을 피했다.

“배우 교체 검토권과 홍보 문구 사전 협의권 정도입니다. 통상적인 제안이에요.”

“통상적이라고 해서 가벼운 조건은 아닙니다.”

시우는 대본을 한 장 넘겼다.

“주태건은 거친 형사가 아닙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자기 삶도 앞으로 못 나가는 사람입니다. 피해자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걸 잃으면 이 드라마는 범인 찾기만 남습니다.”

백도현 감독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료보다 대본에 적힌 문장을 오래 보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해석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신우진 배우에게 그 결이 있습니까?”

시우는 우진을 보지 않고 답했다.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는 대신 지금 보여드리죠. 열 분이면 됩니다. 카메라 테스트를 부탁드립니다.”

회의실 공기가 잠깐 멎었다.

서강혁이 낮게 웃었다.

“현장에서 보는 게 제일 정확하긴 하죠. 저도 준비해 온 장면이 있습니다.”

그 말에는 여유가 있었다. 준비된 배우의 여유이자 이미 몇 개의 문이 자신 쪽으로 열려 있다는 사람의 여유였다.

백도현 감독은 잠시 생각하다가 스태프에게 손짓했다.

“소회의실 비어 있죠? 테스트 갑시다.”


소회의실 한쪽에는 오디션용 카메라와 모니터가 남아 있었다.

신우진은 대본을 들고 창가에 섰다. 회의실에서 나온 뒤에도 그의 어깨는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대표님. 저런 자료를 들이밀면 제가 뭘 해도 깡패처럼 보일 겁니다.”

“그럼 깡패처럼 하지 마십시오.”

시우는 대본의 조사 장면을 펼쳤다. 실종된 아이의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다가 무너지는 장면이었다.

“주태건은 범인을 몰아붙이는 사람 아닙니다. 저 아버지가 무너지면 아이를 찾을 마지막 단서도 사라진다는 걸 아는 사람입니다. 압박하지 말고 붙들어 주세요.”

우진이 대본을 내려다봤다.

“붙든다.”

“눈은 아이 사진에 먼저 가고 그다음에 아버지 손으로 갑니다. 손이 떨리면 목소리를 더 낮추세요. 힘을 주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도망가지 않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겁니다.”

시우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배우-배역 싱크로율 분석]

- 신우진 ↔ 주태건: 93%
- 불안 요소: 외부 평가에 반응할 때 공격성 과잉
- 권장 조정: 시선의 우선순위 고정. 발성의 끝을 누르지 말 것.

시우는 창을 지우고 우진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누구를 이기려는 장면이 아닙니다. 주태건이 왜 형사를 그만두지 못하는지 보여주세요.”

우진의 거친 숨이 길게 빠져나갔다. 그는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알겠습니다.”

그때 복도 끝에서 서강혁이 걸어왔다. 그는 대본을 접으며 우진에게 말했다.

“형님은 액션 장면에서는 정말 좋으시던데요. 여기서는 너무 힘 빼면 장점이 사라지는 거 아닙니까?”

우진의 시선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들린 대본을 가볍게 펴고 카메라 앞으로 걸어갔다.

시우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우진이 상대 배우가 아니라 배역을 보고 있었다.


먼저 테스트에 들어간 서강혁은 흠잡기 어려웠다.

그는 아버지 역의 대역 배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차분한 발성으로 질문을 쌓았고 감정이 무너지는 타이밍에는 한 박자 늦게 물을 건넸다. 화면 속 형사는 믿음직스럽고 반듯했다.

한미라가 모니터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정적이네요.”

백도현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우진이 카메라 앞에 섰다.

처음에는 그의 몸이 너무 커 보였다. 낡은 셔츠 위로 벌어진 어깨가 좁은 조사실 세트를 거의 가려 버릴 것 같았다.

대역 배우가 흐느끼며 말했다.

“제가… 제가 그날 전화를 안 받았습니다.”

우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아이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의 모서리가 구겨져 있었다. 그 뒤에야 떨리는 손등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버님.”

낮은 목소리였다. 억누른 분노가 아니라 밤새 같은 전화를 기다린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 전화에서 들은 말이 뭐였습니까.”

대역 배우가 고개를 숙였다.

“기억이 안 납니다.”

우진은 의자를 밀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서 테이블 모서리에 손끝을 얹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안 날 수 있습니다.”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화면 안에서 넓은 어깨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막아서는 벽처럼 보였다.

“그래도 찾겠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혼자 무너지지는 마십시오. 기억나는 게 하나라도 생기면 제일 먼저 저한테 말해 주세요.”

모니터 뒤가 조용해졌다.

우진은 마지막 대사를 끝낸 뒤에도 카메라를 보지 않았다. 아이 사진과 아버지 사이에 남은 빈 공간을 계속 보고 있었다.

[배우-배역 싱크로율 분석]

- 신우진 ↔ 주태건: 96%
- 장면 몰입도: A
- 잠재력 순간 개방 조건: 신뢰 기반의 상대 연기 구축 시 충족 가능

백도현 감독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태건은 저렇게 들어와야 합니다.”

문 CP가 모니터와 우진을 번갈아 봤다.

“기존 이미지가 오히려 장점이 됐군요. 사람을 겁주게 생긴 형사가 가장 먼저 겁먹은 사람 곁에 남는 거니까.”

신우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굳었던 손을 천천히 폈다.

이번에는 누군가가 기회를 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카메라 안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었다.


테스트가 끝나자 한미라가 다시 회의실로 모두를 불렀다.

그녀는 신우진의 이름표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감독님 의견은 알겠습니다. 그래도 8억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신성의 제안이 빠지면 해외 마케팅과 후반 작업 예산을 다시 짜야 해요.”

“그래서 오늘 결론을 서두르신 겁니까?”

시우의 말은 낮았지만 단단했다.

한미라가 대답하기 전에 회의실 문이 열렸다. 오기태가 들어와 시우 옆에 섰다. 그의 손에는 봉인된 서류 봉투와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방송국 법무 확인을 거친 자료입니다.”

오기태가 문 CP에게 먼저 봉투를 건넸다.

“신성 협력 홍보대행사가 오늘 오전 외부 기자 다섯 곳에 배포한 보도자료 초안입니다. 배포 대상과 발송 시각이 남은 메일 헤더도 첨부했습니다.”

문 CP가 화면을 넘기다 표정을 굳혔다.

자료 첫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신성 엔터 서강혁, SBS <블랙 아웃> 주태건 역 사실상 확정.’

아직 제작진의 최종 서명도 없는 자리였다.

오기태는 두 번째 서류를 꺼냈다.

“이건 제작 지원 제안서의 부속 합의서입니다. 투자금 집행 뒤 주요 배역 교체 사유를 신성 측과 협의하고 주연 배우 관련 홍보 문구는 사전 승인을 받는 조항이 있습니다.”

한미라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그건 협의 조항이지 강제 조항은 아닙니다.”

“분쟁이 생기면 지원금 일부를 상환한다는 문구가 뒤에 붙습니다.”

시우가 조용히 페이지를 짚었다.

“배우 하나를 들이는 대가로 제작진이 작품의 운전대를 넘겨받는 구조입니다. 저희가 이걸 기사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그는 한미라와 백도현 감독을 차례로 바라봤다.

“다만 감독님과 제작사 쪽이 그 사실을 알고 선택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금은 부족하면 함께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넘긴 주도권은 되찾기 어렵습니다.”

백도현 감독이 대본을 덮었다.

“저런 조건이면 돈을 받아도 작품은 제 작품이 아니겠네요.”

문 CP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도자료부터 선을 넘었습니다. 이쪽에서 정식으로 확인하겠습니다.”

한미라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녀는 제작비 표와 신성의 제안서를 번갈아 보다가 마침내 태블릿 화면을 껐다.

“좋습니다. 신성 제안은 보류하겠습니다. 대신 루미너스는 어떤 조건을 생각하고 계세요?”

시우는 기다렸다는 듯 답하지 않았다. 잠시 우진을 보았다.

배우를 캐스팅 테이블에서 이겼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대본이 바뀌고 촬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다치는 것은 현장의 약한 사람이었다. 이번 작품은 우진에게 이미지 전환의 기회인 동시에 다시는 물러설 수 없는 시험대였다.

“출연료를 올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회의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대신 세 가지를 계약서에 넣어 주세요. 주태건의 캐릭터 핵심을 바꾸는 대본 수정은 배우와 감독이 사전에 논의할 것. 액션 장면에는 별도 안전 감독을 배치할 것. 그리고 배우 개인 홍보는 제작사와 방송국의 공식 창구를 통해서만 진행할 것.”

문 CP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지막 조건은 왜 필요합니까?”

“오늘처럼 누군가 작품보다 먼저 배우 이름을 소비하면 드라마가 흔들립니다. 우진 씨는 이 작품으로 변신을 증명해야지 소문으로 캐스팅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우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시우는 그를 봤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배우가 지켜져야 할 이유를 대신 설명해 주는 것과, 배우가 그 이유를 스스로 아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한미라가 계약팀 직원에게 말했다.

“48시간 우선 협상각서부터 준비해 주세요. 세 조건은 반영 여부를 오늘 안에 검토하죠.”

백도현 감독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강 대표. 저는 신우진 배우로 갑니다.”

시우가 손을 잡았다.

“좋은 현장으로 만들겠습니다.”

우진은 감독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표정에는 조금 전 회의실에서의 억울함 대신 낯선 차분함이 남아 있었다.

“주태건이 왜 끝까지 남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회의실 밖 복도에서 오기태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는 발신 번호를 확인하고 시우에게 낮게 말했다.

“신성 쪽에서 보도자료 회수 지시가 내려갔답니다. 차형준 상무가 직접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물러날까요?”

시우가 묻자 기태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성격이면 아닐 겁니다.”

시우는 유리문 너머에서 각서 초안을 검토하는 우진을 바라봤다.

“그럼 다음 수를 기다리죠. 우리는 작품으로 답하면 됩니다.”


같은 시각, 청담동 신성 엔터 1본부장실.

차형준은 비서가 내민 태블릿을 거칠게 밀어냈다.

“우선 협상각서?”

“예. SBS 쪽에서 신우진 배우와 진행하겠다고 합니다. 제작 지원 제안도 보류됐습니다.”

차형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가 곧 붉게 달아올랐다.

“강시우가 자료를 들고 갔군.”

그는 책상 위의 <블랙 아웃> 편성표를 집어 들었다. 금요일 저녁 편성 후보 시간대와 광고 패키지 검토란이 눈에 들어왔다.

캐스팅 하나를 빼앗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판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방송국은 드라마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광고와 편성, 숫자와 책임이 함께 움직인다.

차형준은 천천히 휴대폰을 들었다.

“광고국 쪽 연결해.”

비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 쪽을 말씀하시는지….”

“<블랙 아웃>에 돈을 넣을 회사들 말이야.”

차형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배우를 못 바꾸면 돈이 들어오는 길부터 흔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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