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23화: 빈자리의 값
목요일 오전, 역삼동 루미너스 기획 501호.
신우진은 소파 끝에 앉은 채 휴대폰 화면만 보고 있었다. 전날부터 이어진 기사 알림은 없었다. 그게 더 불길했다.
정식 계약서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확정된 것이 아니었다. 우선 협상각서는 이름 그대로 먼저 이야기할 권리일 뿐이었다.
오기태가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먼저 자료부터 내밀었을 그가 잠시 신우진을 보았다.
“SBS 쪽에서 연락 왔습니다. 광고주 두 곳이 집행 보류를 걸었습니다.”
신우진의 시선이 들렸다.
“저 때문입니까?”
“아직 이유는 확인 중입니다.”
“이유야 뻔하죠.”
우진은 짧게 웃었지만 웃음 끝이 거칠었다.
“어제는 카메라 테스트가 좋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광고주가 싫다고 하면 저는 다시 깡패 역할이나 하라는 얘기겠죠.”
강시우는 책상 위에 놓인 우선 협상각서 사본을 접었다.
“지금부터는 추측으로 자기 값을 깎지 마십시오.”
“대표님.”
“광고주가 보류한 이유와 누가 그 이유를 만들었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둘을 섞으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시우는 오기태에게 태블릿을 받았다. 화면에는 문세진 CP가 보낸 메일 일부가 떠 있었다.
두 광고주는 방영 초반 노출 효과를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보류 규모는 합계 6억 원이었다.
제작비 전체를 무너뜨릴 액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후반 작업과 첫 주 홍보비를 동시에 줄이면 편성팀은 안전한 시간대를 고집할 명분을 얻는다. 그 상태로 다음 날 오후 우선 협상각서가 만료되면 제작사는 캐스팅을 다시 열 수밖에 없었다.
차형준이 노린 곳도 바로 그 틈일 가능성이 컸다.
“오 실장님은 보류 메일이 들어가기 전 누가 광고주를 만났는지 확인해 주세요. 윤 팀장 대행은 제작사에 필요한 돈의 시점부터 받아 보시고요.”
윤서연은 이미 노트북을 열고 있었다.
“제작비 공백과 현금 흐름 공백을 나누겠습니다. 광고주는 계약을 끊은 게 아니라 집행을 멈췄습니다. 필요한 건 돈을 대신 넣는 사람이 아니라 불안을 없애는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진 씨는 오늘 다른 인터뷰나 연락 받지 마십시오. 누가 묻더라도 작품 이야기는 제작사 공식 창구로 돌리세요.”
우진은 입술을 다물었다.
“제가 나가겠다고 하면 빨리 끝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시우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건 끝나는 게 아니라 배우 하나를 희생양으로 바꾸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계약 안 합니다.”
한 시간 뒤, 윤서연의 노트북 화면에는 표가 세 개 떠 있었다.
첫 번째는 <블랙 아웃>의 주차별 제작비 집행표였다. 두 번째는 광고주가 요청한 디지털 노출 항목이었다. 마지막은 전날 회의에서 시우가 요구한 액션 안전 계획이었다.
“두 회사가 요구한 문구는 다릅니다. 그런데 질문은 똑같습니다.”
윤서연이 화면을 돌렸다.
“신우진 배우의 주연 전환이 실패했을 때 누가 손해를 책임지느냐입니다. 액션 장면 사고 가능성도 같이 적혀 있습니다.”
“배우 리스크 자료를 받은 모양이군요.”
오기태가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자료를 보낸 곳은 브릿지미디어라는 미디어 바잉사입니다. 광고주 두 곳 모두 그 회사를 통해 캠페인을 집행합니다. 어젯밤 브릿지미디어 외주 계좌로 신성 협력사가 돈을 보낸 흔적도 확보했습니다.”
시우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위협 연결 분석]
- 신성 엔터 1본부 협력사 ↔ 브릿지미디어 외주 계좌: 고위험 연결
- 공격 의도: 캐스팅 철회보다 초기 제작비 공백 조성
- 현재 약점: 광고주의 우려는 조작된 공포와 실제 집행 리스크가 혼재됨
시우는 창을 지웠다.
“돈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 광고주를 압박하면 역효과입니다. 저쪽은 자문료라고 할 겁니다.”
“그럼 자료를 덮고 갑니까?”
“아니요. 제작진에게는 전달합니다. 광고주에게는 우리가 채워 줄 수 있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윤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 감독 배치와 촬영 보험 증액을 계약 조건으로 확정하면 액션 리스크는 답이 됩니다. 주연 이미지 문제는 사전 해명보다 첫 장면을 먼저 보여주는 쪽이 낫고요.”
“티저를 앞당기자는 겁니까?”
“시청자가 신우진 배우를 조폭으로 기억하는 게 문제라면 형사 주태건으로 기억할 화면을 먼저 줘야 합니다. 말로 해명하면 논란만 커집니다.”
신우진은 자기 이름이 들어간 표를 한참 바라봤다.
“그 장면을 제가 망치면요?”
윤서연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배우님이 할 일은 도망가는 게 아니라 준비하는 겁니다. 운영팀이 사고가 나지 않게 만들겠습니다.”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어깨에서 조금 전의 힘이 빠졌다.
시우는 김성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대표님. <블랙 아웃>에 단기 브리지 자금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조건은 의결권과 캐스팅권 없는 선집행입니다. 광고 계약이 복구되면 자동 상환으로 묶겠습니다.”
잠시 뒤 김성태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최대 6억입니다. 아직 집행을 확정한 건 아닙니다.”
“필요하면 오늘 이사회 확인서부터 보내겠네. 대신 작품에 손대는 돈은 한 푼도 안 넣겠다고 제작사에 분명히 말해주게.”
시우는 짧게 웃었다.
“그 약속을 받으려고 전화드렸습니다.”
금요일 오후, SBS 드라마센터 회의실.
한미라는 시우의 요청을 받아 광고주 실무자와 브릿지미디어 담당자까지 회의에 불러 놓았다. 문세진 CP는 테이블 위의 제작비 수정안을 바라보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광고주가 보류를 풀지 않으면 홍보 예산 일부를 줄여야 합니다. 한성 캐피탈 브리지는 고맙지만 외부 자금이 하나 더 들어오는 모양새도 부담입니다.”
한미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 조건을 거절한 직후라 더 조심스럽습니다. 배우를 정해 놓고 돈을 끌어오는 제작사처럼 보이면 안 됩니다.”
시우는 수정안 옆에 한 장짜리 확인서를 올려놓았다.
“그래서 브리지 자금은 제작 의사결정과 완전히 분리했습니다. 회수 조건은 광고 계약 복구와 방송 매출 정산뿐입니다. 캐스팅권도 없고 대본 검토권도 없습니다.”
한미라가 확인서를 넘겼다.
“안전 감독 비용까지 포함돼 있네요.”
“그건 루미너스가 요구한 계약 조항입니다. 우진 씨가 무리한 액션으로 신뢰를 사는 방식은 하지 않겠습니다.”
문 CP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광고주 쪽 의견을 듣겠습니다.”
광고주 실무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가 신우진 배우를 반대한 건 아닙니다. 다만 주연 전환 첫 작품이고 액션 비중이 높아서 첫 주 반응이 없으면 집행 근거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우려는 이해합니다.”
시우가 답했다.
“그래서 첫 주 디지털 캠페인은 캐스팅 기사에 기대지 않겠습니다. 주태건의 사건 장면 티저와 제작진 인터뷰로 작품 자체를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안전 계획도 별도로 제공하겠습니다.”
브릿지미디어 담당자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배우의 기존 이미지가 너무 강합니다.”
“그 이미지를 확인할 장면을 준비했습니다.”
백도현 감독이 회의실 뒤쪽 문을 열었다. 신우진이 대본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광고주 쪽을 보지 않고 감독이 지정한 자리로 갔다. 대역 배우가 아이 사진이 놓인 책상 앞에 앉았다.
“지금 이 장면은 홍보용 연기가 아닙니다.”
백도현 감독이 말했다.
“주태건이 왜 사건을 놓지 못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대역 배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이를 혼자 보냈어요.”
신우진은 대답 대신 사진을 한 번 봤다. 그리고 의자에 앉은 남자의 팔꿈치가 테이블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조용히 손을 올렸다.
“혼자 보낸 게 아니라 돌아올 거라고 믿으신 겁니다.”
낮은 목소리였다.
“그 믿음이 틀린 게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찾겠습니다. 그러니까 기억나는 걸 버리지 마세요.”
짧은 리딩이 끝나자 아무도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광고주 실무자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티저가 이 결로 나온다면 첫 주 디지털 집행은 유지하겠습니다. 대신 액션 안전 계획과 주간 반응 보고를 계약서에 붙여 주세요.”
문 CP의 얼굴이 처음으로 풀렸다.
“그 조건이면 두 회사 모두 보류 철회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예.”
브릿지미디어 담당자의 표정이 굳었다. 오기태는 그 모습을 보고 말없이 휴대폰 화면을 잠갔다.
계약서 마지막 페이지에 신우진의 이름이 적혔다.
한미라가 펜을 건넸다.
“주태건 역 정식 출연 계약입니다. 캐릭터 핵심 변경 사전 협의와 액션 안전 감독 배치, 공식 창구 외 홍보 금지 조항은 모두 반영했습니다.”
신우진은 펜을 받았지만 바로 서명하지 않았다. 그는 계약서의 안전 조항을 다시 읽었다.
예전 촬영장에서 팔이 빠질 듯한 와이어를 매고도 괜찮다고 말했던 날이 떠오른 듯했다. 그때 그는 다음 배역을 받으려면 참는 편이 낫다고 믿었다.
“대표님. 이거 정말 제가 지켜도 되는 겁니까?”
우진이 낮게 물었다.
“현장에서는 배우가 참는 게 당연하다고 배웠는데요.”
“참는 건 연기가 아닙니다.”
시우가 말했다.
“배우가 다치면 장면도 무너집니다. 이 조항은 부탁이 아니라 현장을 지키는 약속입니다.”
우진은 천천히 이름을 썼다.
[계약 성립]
- 프로젝트: SBS 드라마 '블랙 아웃'
- 배역: 주태건
- 신우진 배우와의 배역 싱크로율: 96%
- 잠재력 순간 개방 조건: 신뢰 기반 상대 연기 충족 가능
시우는 떠오른 창을 조용히 닫았다.
복도에 나온 윤서연은 새로 만든 촬영 준비 권한표를 시우에게 건넸다.
“안전 감독 후보 검토와 티저 촬영 동선은 오늘 중으로 배정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우진 씨 일정은 팀장 대행이 최종 확인하세요.”
그때 오기태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신성 쪽 외주 인력이 신우진 배우의 예전 작품 원본 영상을 찾고 있습니다.”
시우의 걸음이 멈췄다.
정식 계약서가 손에 들어온 바로 그날이었다.
누군가는 이미 다음 칼날을 고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