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21화: 내부 단속
수요일 오전, 서울 역삼동 루미너스 기획 대표실.
옆 호실인 502호에서 철거 공사 소리가 낮게 울렸다. 벽 너머 전동 드릴이 짧게 끊겼다가 다시 이어질 때마다 책상 위의 펜꽂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강시우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새로 뽑은 조직 개편안을 내려다보았다.
‘대표 혼자 뛰는 회사는 여기까지다.’
영화 ‘낙화’의 흥행 정산금, 한성 캐피탈과의 지분 정리, 신우진의 차기작 ‘블랙 아웃’. 모든 성과는 기회였지만 동시에 회사의 속도를 감당할 체계를 요구했다.
유나린의 광고 촬영 콜타임은 오전 일곱 시. 최지환의 무대 인사 동선은 서울과 경기 세 곳. 신우진의 제작사 미팅은 아직 확정 전인데도 방송국 쪽 문의가 벌써 네 군데에서 들어왔다.
배우 셋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하자 기존 매니저 둘과 실무 매니저 하나로는 한계가 보였다.
오기태 정보실장이 태블릿을 밀어놓았다.
“502호 철거는 오후 세 시 전에 끝납니다. 주식회사 전환 서류도 법무법인에서 초안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면접자 중 두 명은 대표님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우가 시선을 들었다.
“특이 사항입니까?”
“한 명은 진짜 실무형입니다. 윤서연. 중소 제작사에서 조연출 보조와 매니지먼트 운영을 같이 했습니다. 화려한 이력은 없지만 현장 사고 수습 기록이 좋습니다.”
기태가 화면을 넘겼다.
“다른 한 명은 서민재. 신성 엔터 협력 홍보대행사 출신입니다. 이력서는 깨끗합니다. 다만 최근 통화 기록에 신성 1본부 라인이 걸립니다.”
시우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분으로 못 흔드니 사람을 넣겠다는 뜻이군요.”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우는 잠시 창밖을 보았다. 공사 먼지가 햇빛 속에서 희미하게 떠다녔다. 루미너스는 이제 작은 사무실이 아니었다.
문이 커지면 들어오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리고 그 틈으로 칼날도 들어온다.
“면접은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오 실장님은 밖에서 모든 반응을 기록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임시 면접실은 회의실에 흰색 테이블 하나를 놓아 만든 공간이었다.
유나린의 광고 콘티, 최지환의 무대 인사 일정표, 신우진의 ‘블랙 아웃’ 미팅 메모가 벽면 보드에 붙어 있었다.
첫 번째로 들어온 윤서연은 검은 정장 재킷에 낡은 노트북 가방을 든 여성이었다.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의자보다 벽면 보드의 일정표를 먼저 보았다.
시우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윤서연 씨. 배우 매니지먼트 경력은 길지 않군요.”
“예. 정식 매니저 직함은 1년뿐입니다. 대신 제작팀에서 배우 동선과 스태프 콜타임을 같이 관리했습니다.”
“현장에서 가장 크게 막아본 사고가 뭡니까?”
윤서연은 잠깐 숨을 고르고 답했다.
“새벽 촬영 때 주연 배우가 교통 체증으로 40분 늦었습니다. 촬영 순서를 바꾸면 조명 세팅을 전부 다시 해야 했고 그대로 기다리면 보조출연자 80명 대기비가 늘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당시 저는 단역 두 명의 리액션 컷과 소품 인서트를 먼저 찍도록 제안했습니다. 감독님께 콘티 변경표를 손으로 그려 드렸고 제작부장에게 보조출연자 식사 시간을 앞당기자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연 비용은 30% 정도로 줄었습니다.”
시우의 눈앞에 상태창이 조용히 떠올랐다.
[윤서연]
- 직무 적성: 매니지먼트 운영 A-
- 위기 대응력: A
- 충성 가능성: 82/100
- 특이 성향: 배우의 감정보다 현장 구조를 먼저 읽음. 대형화 초기 조직에 적합.
시우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를 알아보는 눈만으로는 회사가 굴러가지 않는다. 스타가 무너지지 않도록 받치는 구조를 볼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루미너스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고치고 싶은 게 뭡니까?”
윤서연의 시선이 벽면 보드로 다시 향했다.
“스케줄판이 너무 대표님 머릿속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면접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윤서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배우 세 분의 일정이 동시에 커지고 있는데 접근 권한과 변경 승인 절차가 안 보입니다. 지금은 대표님 판단이 빠르니까 굴러가지만 인원이 두 배만 늘어도 누가 어떤 자료를 봤는지 추적하기 어려울 겁니다.”
시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좋습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외부에서 연봉을 두 배 주며 배우 계약서 사본을 요구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거절하고 보고합니다.”
“상대가 업계 대기업 임원이라면?”
“더 빨리 보고합니다. 그 정도 사람이 직접 움직였으면 단순 호기심이 아닐 테니까요.”
두 번째 핵심 면접자 서민재는 완전히 다른 공기를 몰고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정장, 정돈된 미소, 빈틈없는 포트폴리오. 말투는 매끄러웠고 신성 엔터 협력사에서 진행했던 홍보 캠페인 사례도 깔끔했다.
“루미너스는 지금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입니다. 저는 그 성장 곡선을 더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서민재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스템 창을 열었다.
[서민재]
- 직무 적성: 홍보 실무 B+
- 대외 커뮤니케이션: A-
- 충성 가능성: 21/100
- 위험 요소: 신성 엔터 1본부 비공식 접촉. 입사 후 배우 계약 조건 및 투자 자료 접근 의도.
- 현재 상태: 과도한 자기 통제. 숨기는 목적 존재.
황금빛 글씨를 확인한 순간 시우의 표정은 더 부드러워졌다.
면접에서 가장 위험한 상대는 어설픈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자기 거짓말을 잘 다듬은 사람이다.
“서민재 씨는 입사하면 어느 자료부터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홍보 전략을 세우려면 배우별 계약 조건과 수익 구조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특히 신우진 배우의 ‘블랙 아웃’ 관련 조건은 빠르게 확인하고 싶습니다.”
시우는 손끝으로 펜을 돌렸다.
“홍보 담당자가 계약 조건을 먼저 봐야 합니까?”
“메시지를 설계하려면 사업 구조를 알아야 하니까요.”
“그럼 오늘 이 자리에서 보안 서약서와 자료 접근 등급표 초안을 드리겠습니다. 입사 후 3개월 동안은 배우 계약서와 투자 계약서 열람 권한이 없습니다. 이 조건으로도 입사 의사가 있습니까?”
서민재의 미소가 아주 짧게 굳었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다만 실무 효율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료 공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시우는 앞에 놓인 파일을 닫았다.
“루미너스가 지금 가장 경계하는 것은 효율을 가장한 무단 접근입니다.”
서민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셔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면접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서민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를 하는 허리는 정중했지만 문고리를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문이 닫히자 오기태가 조용히 들어왔다.
“통화 기록 추가 확인됐습니다. 어젯밤 신성 1본부 비서실 번호와 7분 12초 통화했습니다.”
“탈락 처리하십시오. 제출한 포트폴리오 파일은 외부 저장장치 검사 후 폐기합니다.”
“예.”
시우는 회의실 유리 너머에서 아직 대기 중인 윤서연을 보았다. 그녀는 면접장 쪽을 보지 않고 루미너스의 공개 채용 안내문을 다시 읽고 있었다.
“윤서연 씨를 다시 들여보내십시오.”
윤서연은 예상보다 빠른 재호출에 놀란 얼굴이었다.
“제가 뭐 빠뜨린 서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과제를 드리려고 부른 겁니다.”
시우는 벽면 보드에 붙어 있던 일정표 세 장을 떼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유나린 광고 촬영, 최지환 무대 인사, 신우진 제작사 미팅. 루미너스가 당장 굴려야 할 세 개의 축이었다.
“이 세 일정이 같은 날 겹친다고 가정하십시오. 대표가 외부 미팅으로 부재중이고 현장 매니저는 두 명뿐입니다. 윤서연 씨라면 무엇부터 정리하겠습니까?”
윤서연은 곧장 펜을 들었다.
잠시 뒤 종이 위에는 배우별 이동 시간, 현장 대기 리스크, 대체 승인자, 외부 공유 금지 자료가 네 칸으로 나뉘어 적혔다.
“유나린 배우의 광고 촬영은 브랜드 측 대기 비용이 커서 지연되면 안 됩니다. 최지환 배우의 무대 인사는 현장 팬 대응 경험이 있는 매니저가 필요합니다. 신우진 배우의 제작사 미팅은 대표님이나 권한 있는 임원이 동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운영 담당은 배우 동선보다 결정권자 동선부터 고정해야 합니다.”
시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자료 접근 등급은요?”
“배우별 계약서와 투자 자료는 분리해야 합니다. 홍보팀에는 공개 가능한 키 메시지만 내려가야 하고 원계약서는 대표님, 법무 담당, 운영 책임자만 열람해야 합니다. 누가 언제 열람했는지 기록이 남아야 합니다.”
오기태가 뒤쪽에서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정답이었다.
시우는 더 묻지 않았다.
“윤서연 씨. 루미너스 운영팀장 대행으로 입사하시죠. 수습 3개월, 권한은 제가 직접 부여합니다. 첫 업무는 방금 말한 자료 접근 등급표와 배우별 스케줄 통제표를 오늘 안에 문서로 만드는 겁니다.”
윤서연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곧이어 깊은 긴장이 올라왔다.
“팀장 대행이요? 저는 아직 그렇게 큰 직함을 받을 경력이…….”
“경력은 직함을 따라오면 됩니다. 루미너스에 필요한 건 이름값이 아니라 사고를 막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윤서연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누군가가 자신이 해온 보이지 않는 일을 정확히 봐준 순간이었다.
“하겠습니다. 대신 허술한 부분이 보이면 대표님께도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걸 기대하고 뽑는 겁니다.”
그때 실무 매니저가 급히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SBS ‘블랙 아웃’ 제작사에서 연락 왔습니다. 오늘 오후 긴급 미팅을 요청했습니다. 신우진 배우 캐스팅 건으로 꼭 대표님이 직접 와달랍니다.”
시우는 윤서연에게 첫 번째 업무 파일을 넘겼다.
“오 실장님. 윤 팀장 대행에게 내부 자료 등급 현황을 공유하십시오. 원계약서 원본은 제외합니다.”
“알겠습니다.”
윤서연은 방금 자신에게 붙은 호칭에 숨을 멈췄다가 곧장 고개를 숙였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시우는 재킷을 걸치며 대표실 밖으로 나섰다.
502호 공사 소리가 다시 울렸다. 벽 하나가 뜯겨나가는 소리였다. 동시에 루미너스 안쪽에는 보이지 않는 새 벽이 세워지고 있었다.
같은 시각, 청담동 신성 엔터 1본부장실.
차형준은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기기가 대리석 바닥에 튕기며 검은 화면을 드러냈다.
“서민재 탈락? 면접 한 번으로?”
비서실 직원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강시우 쪽에서 보안 권한 문제를 집요하게 물었다고 합니다. 자료 접근이 막히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철수했습니다.”
차형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분도 막혔다. 자금줄도 막혔다. 이제 사람을 심는 길마저 막혔다.
“그놈이 매니저 출신 맞아?”
낮게 갈라진 목소리에 방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
차형준은 책상 위에 놓인 ‘블랙 아웃’ 캐스팅 회의 자료를 움켜쥐었다. 신우진의 이름 옆에는 굵은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좋아. 안으로 못 들어가면 밖에서 꺾어주지.”
그는 이를 악물고 비서에게 명령했다.
“SBS 미팅 라인 전부 확인해. 주태건 역 후보군에 우리 배우를 다시 밀어 넣는다. 강시우가 그렇게 아끼는 사냥개가 지상파 문턱에서 짖어보지도 못하게 만들어.”
창밖의 햇빛이 본부장실 유리벽에 차갑게 부서졌다. 차형준의 패배감은 이제 노골적인 집착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편 엘리베이터에 오른 시우의 눈앞에는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조직 안정화 1단계 달성]
- 운영 핵심 인재 윤서연 확보
- 내부 자료 접근 통제 체계 오픈
- 외부 침투 위험 1차 차단 완료
[신규 위협 감지]
- 프로젝트 '블랙 아웃' 캐스팅 회의에 신성 엔터 개입 가능성 상승
- 신우진 배우의 이미지 전환 골든타임을 방해하려는 외부 압력 예측
시우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턱에서 막을 생각이라.”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 문, 우리가 통째로 열고 들어가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