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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18화

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18화: 거인의 그물망

금요일 오후, 서울 역삼동 루미너스 기획 대표실. 창밖으로 내리쬐는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무색하게도, 대표실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습니다.”

넓은 가죽 소파에 걸터앉은 독립영화 ‘낙화’의 연출자 민지훈 감독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의 스마트폰 화면에는 태양 시네마 배급팀으로부터 날아온 정식 메일 공문이 선명하게 띄워져 있었다.

강시우 대표는 테이블 위의 머그잔을 내려놓고 메일의 세부 내용을 담담하게 훑어내렸다.

[독립영화 ‘낙화’ 상영관 배정 조정 안내 건]

정식 개봉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수준의 최악의 편성표였다. 관람객이 아예 발걸음을 할 수 없는 이른 아침과 심야 시간대로 영화를 밀어버리는 것. 업계 용어로 ‘퐁당퐁당’이라 불리는 교차 상영이자, 사실상의 고사(枯死) 작전이었다.

민 감독이 울화통이 터지는지 가슴을 쾅쾅 치며 억울함을 토해냈다.

“기자간담회 반응이 그렇게 뜨거웠고, 인터넷 예매 대기 지수도 폭발적인 상황입니다! 태양 시네마 배급 팀장 놈도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한테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며 온갖 아첨을 떨었는데…… 갑자기 오늘 오전부터 태도를 싹 바꾸더니 내부 편성 회의 결과라며 이따위 일방적인 통보를 보냈습니다. 대기업 신성이 뒤에서 압박을 넣은 게 아니고서야 이게 설명이 됩니까?”

시우는 패닉에 빠진 민 감독의 머리 위로 명멸하는 상태창을 조용히 불렀다.

[민지훈: 상태 - 극도의 배신감 및 무력감 (신성 엔터의 유통 방해 공작으로 인해 자신의 첫 상업 개봉작이 빛도 보지 못하고 고사할 위기에 처해 멘탈이 붕괴하기 직전)]

시우는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에서 따뜻한 우롱차 한 잔을 받아와 민 감독에게 부드럽게 건넸다.

“민 감독님. 진정하십시오. 링 위에 올라왔으면 잽 몇 대 맞는 건 일상다반사입니다. 차형준 상무가 임명되자마자 우리에게 던진 첫 번째 비즈니스 펀치일 뿐입니다.”

“하, 하지만 대표님! 상영관이 오전이랑 심야로 다 쫓겨나면 예매율이고 뭐고 관객들이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픽스온과 계약을 맺고 홍보를 잘했어도, 극장 스코어가 박살 나면 배우들의 신인상이고 러닝 개런티고 전부 물거품이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차형준 상무가 노리는 게 바로 그겁니다. 유통망이라는 거대한 댐의 수문을 닫아 우리를 말려 죽이겠다는 거죠. 하지만 댐이 크면 클수록, 작은 균열 하나에도 한순간에 붕괴하는 법입니다. 유통을 쥐고 흔드는 대기업 극장 체인들이 과연 신성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만큼 바보들인지, 그 틈새를 찔러봐야죠.”

시우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단단한 기백이 서려 있었다. 그 냉철하고 여유로운 안광을 마주하자, 민 감독은 요동치던 불안감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제가 판을 다시 짤 테니, 감독님은 극장 측에 항의 전화를 걸거나 흥분해서 언론에 하소연하지 마십시오. 대기업을 상대로 감정 싸움을 해봤자 우리 손해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강 대표님만 믿겠습니다.”

민 감독이 무거운 어깨를 이끌고 대표실을 나가자, 시우는 곧장 내선 전화를 걸어 오기태 실장을 불렀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기태는 이미 상황을 짐작한 듯 매서운 표정이었다.

“오 실장님. 태양 시네마와 멀티플렉스 3사가 일제히 ‘낙화’의 상영관 배정을 교차 상영으로 밀어낸 배후의 정확한 정황을 보고해 주십시오.”

기태가 준비해 온 태블릿을 켜며 신속하게 브리핑했다.

“예, 대표님. 첩보에 따르면 신성 1본부의 차형준 상무가 어제 저녁 태양 시네마의 투자배급총괄 본부장과 극비 회동을 가졌습니다. 차 상무가 제시한 카드는 하반기 신성이 제작 배급하는 200억 규모의 판타지 사극 텐트폴 대작, ‘용의 제국’의 스크린 쿼터 독점권이었습니다.”

“용의 제국이라…….”

“네. 올해 극장가의 최고 기대작 중 하나로 꼽히는 대작입니다. 차 상무는 태양 시네마 측에 ‘용의 제국의 황금 상영관 배정 지분을 타사보다 5% 더 얹어 주겠다’는 파격적인 미끼를 던졌습니다. 단, 조건으로 현재 예매율 추이가 심상치 않은 독립영화 ‘낙화’의 스크린 배정을 최하로 떨어뜨리고, 상영 시간대를 관객이 들지 않는 쓰레기 시간대로 밀어버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태양 시네마 입장에서는 3억짜리 독립영화 한 편 지키겠다고 200억 텐트폴 대작을 놓칠 수 없으니 결국 굴복한 겁니다.”

시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맴돌았다. 자본의 논리로 링 자체를 좁히는 차형준의 지능적인 봉쇄망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오히려 눈동자를 빛내며 기태를 응시했다.

“오 실장님. 신성 엔터 내부에서 ‘용의 제국’에 관한 극비 보고서를 빼낼 수 있습니까? 완성된 편집본의 내부 시사회 결과라든가, 기조실 특별감사팀이나 투자위원회에 제출된 모니터링 자료 같은 것 말입니다.”

기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내 대표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깊은 신뢰를 담은 눈빛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용의 제국 말씀이십니까? 가능합니다. 신성 기조실 내부 감사망에 아직 제 정보원들이 건재하고, 마침 지난주에 투자 위원회 보고용으로 비밀리에 진행된 ‘용의 제국 1차 내부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보고서가 기밀 폴더에 저장되어 있을 겁니다. 바로 빼내서 가져오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뱀의 목을 꺾으려면 놈이 가장 자랑스럽게 휘두르는 칼날의 녹슨 부분을 찾아내야 하니까요.”


한 시간 뒤, 기태가 보안 이메일로 송신해 온 문서를 다운로드하여 확인한 시우의 눈앞에 황금빛 시스템 알림창이 맹렬하게 피어올랐다.

[프로젝트 분석 완료: 신성 엔터테인먼트 ‘용의 제국’]

시우는 시스템이 보여주는 처참한 미래 스탯을 보며 나지막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200억이라는 거대한 겉껍데기 속에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를 숨겨둔 채, 그것을 무기로 극장사들을 협박하고 있었다니. 차형준이 던진 올가미는 실상 제 목을 조를 썩은 동아줄에 불과했다.

“차 상무, 네가 자랑스럽게 흔드는 그 텐트폴이 바로 극장 체인들의 목줄을 끊어놓을 시한폭탄이다.”

시우는 즉시 전화를 켜 픽스온의 정선우 팀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정 팀장은 지난 기자간담회에서의 여론 대반전 이후 시우의 날카로운 정보력에 완전히 매료되어, 루미너스의 든든한 아군으로 협력하고 있었다.

“정 팀장님. 픽스온도 이번 ‘낙화’의 극장 흥행 스코어에 러닝 개런티와 플랫폼 가입자 유치 사활이 걸려 있죠?”

“좋습니다. 그렇다면 태양 시네마의 목줄을 쥐고 판을 흔들 제안을 던질 테니, 픽스온의 마케팅 예산과 플랫폼 쿠폰 지원책을 들고 오늘 저녁 약속 장소로 나와 주십시오. 극장 체인이 신성의 압박을 물리치고 우리에게 스스로 상영관을 헌납하게 만들 겁니다.”


금요일 저녁, 서울 청담동의 한적하고 정갈한 일식 파인다이닝 예약 룸.

은은한 주황색 조명 아래, 정갈하게 차려진 테이블 앞으로 미닫이문이 열리고 태양 시네마의 송민우 대표가 다소 굳은 표정으로 걸어 들어왔다. 대기업 극장 체인의 수장다운 품채를 지녔으나, 최근 픽스온과의 거대 배급 연계 및 신성의 압박 사이에서 머리가 터질 듯한 고민을 거듭한 탓인지 미간의 주름이 깊었다.

“강 대표, 바쁜 와중에 갑자기 보자고 해서 놀랐소. 그리고 픽스온의 정 팀장까지 함께 배석할 줄은 몰랐군.”

송 대표가 자리에 앉으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시우는 조용히 따뜻한 사케를 송 대표의 잔에 따르며 부드럽게 운을 뗐다.

“송 대표님. 갑작스러운 상영관 배 조정을 일방 통보받고도 이렇게 정중하게 자리를 마련한 것은, 감정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 시네마가 내린 비즈니스적 선택의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송 대표가 다소 긴장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해 준다니 고맙소. 우리도 참 곤란했소. 신성 엔터의 차형준 상무가 하반기 대작 ‘용의 제국’의 독점 스크린 쿼터를 들고 흔들며 으름장을 놓는데, 독립영화 한 편 지키겠다고 연간 매출을 책임질 대작을 날릴 수는 없지 않소. 비즈니스란 원래 그런 냉혹한 링이니까.”

“맞습니다. 비즈니스는 철저한 이익의 논리로 움직이죠.”

시우가 잔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서류 가방에서 파란색 서류철 하나를 꺼내 송 대표의 앞에 슬며시 밀어놓았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만약 신성이 제공하겠다는 그 ‘용의 제국’이 태양 시네마의 매출을 책임질 구원투수가 아니라, 극장 체인 전체를 적자의 수렁으로 끌고 들어갈 시한폭탄이라면…… 그래도 신성의 편에 서시겠습니까?”

송 대표의 찻잔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

“시한폭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용의 제국은 제작비만 200억이 넘는 올해 최고의 기대작인데…….”

“직접 확인해 보시죠. 신성 엔터테인먼트 기조실 특별감사팀과 투자위원회가 지난주 극비리에 시행한 ‘용의 제국’ 내부 블라인드 테스트 최종 보고서입니다.”

송 대표는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서류철을 펼쳤다. 하지만 첫 페이지에 적힌 종합 평가 점수와 관객 반응 통계 그래프를 확인하는 순간, 송 대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 갔다.

“이…… 이럴 수가. 모니터 시사 평점이 2.1점이라고? 주연 배우의 연기력 미달로 감정선 붕괴, CG 미완성으로 인한 관객 중도 퇴장 욕구 90% 이상……?”

송 대표의 안경 너머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극장 체인의 수장으로서 수많은 흥행작과 실패작을 스크린에 걸어온 그였다. 이 정도 수치의 테스트 보고서라면, 개봉 첫 주 반짝 예매율만 찍은 뒤 바로 다음 날부터 티켓 환불 소동과 관객들의 혹평이 쏟아져 상영관 전체가 텅텅 비어버릴 재앙의 징조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옆에 있던 픽스온의 정선우 팀장 역시 보고서 수치를 확인하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시우가 나지막하게 쐐기를 박았다.

“신성은 이미 실패를 감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장 체인들을 압박해 무리하게 스크린 독점권을 따내고, 초반 마케팅 물량 공세로 선판매 매출만 챙겨서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먹튀’ 전략을 짜고 있는 겁니다. 그 미끼에 걸려 황금 상영관을 전부 ‘용의 제국’에 내어준 태양 시네마는, 텅 빈 상영관을 돌리며 발생하는 고정비와 전기세, 그리고 브랜드 이미지 실추라는 막대한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겁니다. 이것이 차형준 상무가 말하는 비즈니스의 냉혹함이죠.”

송 대표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신성과의 관계를 끊고 편성표를 되돌릴 수는 없소. 낙화가 아무리 화제라 해도 독립영화는 극장 스코어의 한계가 명확하지 않소?”

그때, 대기하고 있던 정선우 팀장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준비해 온 계약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 저희 픽스온과 루미너스가 공동으로 대안을 제시합니다, 송 대표님. 픽스온은 국내 가입자 800만을 보유한 거대 플랫폼입니다. 저희가 다음 주부터 픽스온 메인 배너와 앱 푸시를 통해 ‘태양 시네마에서 낙화를 관람한 회원에게 픽스온 1개월 무료 이용권 및 독점 굿즈 증정’ 프로모션을 전면 가동하겠습니다. 프로모션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액 픽스온 본사 마케팅 예산으로 집행합니다.”

송 대표의 눈이 번쩍였다. 국내 최대 OTT인 픽스온의 전폭적인 공동 마케팅 지원은, 백억 대 상업영화에서도 쉽게 얻기 힘든 엄청난 유치 혜택이었다.

시우가 미소를 지으며 제안의 정점을 찍었다.

“더불어 루미너스는 태양 시네마 전국 주요 100개 지점의 프라임 타임(18:00 ~ 22:00) 상영관 최소 200개 배정을 요구합니다. 이에 대한 ‘최소 예매율 보장제(MG)’ 조항을 계약서에 명시해 드리겠습니다. 만약 낙화의 프라임 타임 관객 점유율이 25% 미만으로 떨어질 경우, 그 차액 손실분은 루미너스와 픽스온이 공동으로 100% 보전해 드리겠습니다. 송 대표님 입장에서는 리스크 제로의 완벽한 안전장치입니다.”

리스크 제로.

신성이 던진 썩은 동아줄과 달리, 눈앞의 강시우와 픽스온이 제시한 제안은 태양 시네마에 실리와 안전장치, 그리고 미래의 파트너십까지 고스란히 보장해 주는 거부할 수 없는 황금 동아줄이었다.

송 대표는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경외감 어린 시선으로 시우를 응시했다. 만년 꼴찌 매니저 출신이라는 소문과 달리, 비즈니스의 판을 짜고 상대를 흔드는 기백이 대기업 기조실 엘리트들을 능가하고 있었다.

“강 대표…… 정말 대단한 기획자요. 이 판을 다 짜두고 나를 부른 거였군. 허허, 내가 완전히 졌소.”

송 대표가 잔을 들어 시우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좋소. 신성 놈들이 썩은 고기를 들고 협박했다면, 우리는 가장 신선하고 영양가 높은 딜을 선택하는 게 상도의지. 내일 오전 중으로 ‘낙화’의 전국 200개 상영관 프라임 타임 고정 배정 승인 공문을 정식으로 띄우겠소. 차형준 상무에게는 극장 내부 컴퓨터 알고리즘 배정 핑계를 대며 적당히 둘러대지.”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송 대표님.”

시우가 잔을 들이켜자, 그의 망막 너머로 찬란한 황금빛 시스템 알림창이 화려한 폭죽을 터뜨리며 떠올랐다.

[배급망 유통 봉쇄 돌파 완료!]
[3자(루미너스-태양 시네마-픽스온) 배급 동맹 정식 체결!]
[독립영화 '낙화'의 골든타임 상영관 점유율: 28% 공식 확보!]
[태양 시네마 대표 송민우의 루미너스에 대한 신뢰도: +50% 상승 (향후 차기작 배급 우선협상권 개방)]
[시너지 효과로 인해 '낙화'의 개봉 첫 주 예상 좌석 점유율: +40% 대폭 보정 상승]

시우는 사케 잔을 내려놓으며 창밖의 강남 야경을 바라보았다.

차형준 상무가 쳐둔 자본의 그물망은 이미 찢겨 나갔다. 이제 역으로 그 그물망을 뱀의 목에 걸어 목을 죄어줄 시간이었다. 시우의 서늘한 안광 속에서 깊은 어둠이 침묵 속에 깊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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