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17화: 가시밭 위의 무대
목요일 오전, 서울 역삼동 루미너스 기획 대표실. 유리 통창 너머로 비쳐 드는 아침 햇살은 눈부시도록 아늑했지만, 사무실 내부에 감도는 분위기는 팽팽한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죄어들어 있었다.
넓은 가죽 소파의 한쪽에 앉은 최지환은 양복바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연신 꼼지락거리며 옷깃을 매만졌다. 평소와 달리 핏기가 가신 얼굴이었고, 이마 위에는 미세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맞은편의 신우진 역시 검은 재킷을 입은 채 턱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큰 덩치의 우진도 시선은 바닥을 헤매며 긴장을 억누르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강시우는 책상 위의 시사회 진행 서류를 차분하게 정리하며, 두 배우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는 시스템 상태창을 조용히 불렀다.
[최지환: 상태 - 과도한 긴장 (생애 첫 대규모 기자간담회를 앞두고 과거 신성 엔터 시절의 무대공포증 트라우마가 자극됨)]
[신우진: 상태 - 심리적 위축 (자신의 거친 외모와 배달원 출신 이력이 회사와 동료들에게 해가 될지 염려함)]
시우는 자리에 일어나 정수기에서 따뜻한 보리차 두 잔을 받아와 그들 앞 테이블 위에 부드럽게 올려놓았다.
“지환 씨, 우진 씨. 두 사람 모두 얼굴에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힘이 잔뜩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은 무슨 심판의 장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 동안 두 사람이 땀 흘려 찍은 독립영화 ‘낙화’를 언론과 평단에 떳떳하게 증명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일 뿐입니다.”
지환이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 설 때는 소수의 관객 분들만 봐주셔서 괜찮았는데…… 이렇게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백 명 넘게 모이는 공식 배급 시사회는 처음이다 보니 몸이 굳네요. 자꾸 옛날 신성 시절에 관객들의 차가운 조롱 속에 무너졌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렇습니다.”
“그때의 지환 씨와 지금의 지환 씨는 아예 다른 사람입니다. 지환 씨의 연기는 스크린 안에서 ‘태성’이라는 완벽한 결과물로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관객들은 지환 씨의 과거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오늘 스크린 위에 흐를 처절한 삶을 보기 위해 온 겁니다. 스스로를 믿으세요.”
시우의 차분하고 단단한 음성이 지환의 흔들리던 동공을 묵직하게 붙잡았다.
옆에서 묵묵히 보리차만 쳐다보고 있던 우진이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저도…… 험악하게 생긴 제 마스크나 배달 오토바이나 몰던 하류 인생 이력이 대표님이 힘들게 쌓아 가시는 루미너스의 품격에 먹칠을 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듭니다. 언론사 놈들은 이런 시시콜콜한 꼬투리를 잡기 좋아한다고 들어서요.”
“우진 씨.”
시우가 우진의 넓은 어깨를 강하게 짚으며 두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
“배달 오토바이를 몰았던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과 꿈을 책임지기 위해 매서운 길 위에서 고군분투해 온 훌륭한 훈장입니다. 그리고 우진 씨의 거칠고 깊은 안광은 요즘 충무로가 가장 목말라하는 독보적인 악역의 원석입니다. 오늘 기자들은 우진 씨의 연기에 완전히 매료되어 기사를 쏟아내게 될 겁니다. 이 판을 짠 기획자인 제가 보장하죠.”
시우의 확신에 찬 말통은 지환과 우진의 어깨에 눌려 있던 해묵은 압박을 한결 가볍게 털어내 주었다. 두 배우의 얼굴에 비로소 잔잔한 생기가 감돌았다.
그 순간, 대표실의 불투명 유리문이 거칠게 열리며 오기태 정보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기태의 손에는 태블릿 PC와 파란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기태는 소파의 두 배우를 슬쩍 보더니, 시우에게 다가와 조심스러운 억양으로 신속하게 보고했다.
“대표님, 신성 1본부 쪽에서 이른 아침부터 움직인 흔적을 확인했습니다. 차형준 상무의 지시로 신성 홍보팀이 삼류 연예 매체 기자 세 명을 급히 매수했습니다. 특히 악의적인 루머 확산으로 악명 높은 일간연예의 김태식 기자에게 거액의 정보 제공료를 쥐여주며, 오늘 기자간담회에서 던질 저격 질문 리스트를 미리 협의했다고 합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최지환 배우의 과거 무단이탈 사건과 심각한 공황장애, 무대공포증 이력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작정입니다. 그리고 신우진 배우의 경우, 배달원 시절 오토바이 운전자들과 있었던 폭력 시비 찌라시를 엮어 ‘진짜 폭력배 출신의 무명인을 캐스팅해 영화의 이미지를 흐린다’는 프레임을 씌우려 합니다. 언론 반응이 가장 뜨거울 때 두 배우의 멘탈을 완전히 박살 내고 루미너스의 싹을 자르겠다는 차형준의 지능적인 잽입니다.”
기태의 말을 들은 시우의 동공 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번뜩였다. 김도식처럼 주먹부터 날아오는 단순한 깡패 짓이 아니었다. 사회적 평판과 이미지를 무참히 짓밟아 신인 배우들의 복귀 길을 영구히 끊어버리는, 철저히 조율된 칼춤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오히려 엷은 비웃음을 흘렸다.
“차형준 상무가 우리 애들에게 아주 호된 데뷔 선물을 주려나 보군요. 오 실장님, 김태식이 신성 측 홍보 대행사 계좌로부터 뒷돈을 받은 구체적인 송금 정황은 확보되었습니까?”
“예, 대표님. 놈들이 꼬리를 자르려고 우회 계좌를 썼지만 기조실 쪽 감사 정보망을 통해 송금 내역 캡처본과 거래 장부를 완벽하게 땄습니다. 그리고 신우진 배우가 작년 10월에 배달 대행 중에 빗길 뺑소니 사고 가해자를 추격해 검거하고 경찰서장에게 직접 받았던 공식 ‘시민 감사장’ 서류도 여기 챙겨두었습니다. 깡패 시비라고 알려진 건 당시 면허 취소 수준으로 만취한 음주운전자가 적반하장으로 난동을 부려 정당방위로 붙잡아두었던 건입니다.”
“완벽합니다.”
시우가 서류철을 덮으며 낮게 읊조렸다.
“차 상무가 가시밭길을 깔아주었으니, 그 위에서 우리가 얼마나 화려한 춤을 출 수 있는지 똑똑히 보여주도록 하죠. 지환 씨, 우진 씨. 시사회장으로 출발합시다.”
목요일 오후, 서울 코엑스 아셈타워 시네마의 언론배급시사회장.
독립영화 ‘낙화’의 상영을 알리는 스크린의 불빛이 꺼지고 상영관의 조명이 환하게 밝아왔다. 영화가 상영되는 100분 내내 객석에 앉은 언론인과 영화 관계자들은 숨죽인 채 팽팽하게 집중하고 있었다. 거칠고 쓸쓸한 부둣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태성의 억눌린 슬픔과, 동하의 서늘한 악마적 안광이 스크린을 터뜨릴 듯 장악했기 때문이다.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압도적인 누아르의 걸작이 그들 눈앞에 완성되어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검은 암전 속에 엔딩 크레딧이 오르자마자, 잠시의 정적을 깨고 객석 곳곳에서 이례적으로 뜨거운 박수갈채와 감탄 섞인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와, 이건 물건이다. 연출도 연출인데 저 신인 배우들 연기력이 진짜 미쳤네.”
“최지환 저 눈빛 연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고, 빌런 역할의 신우진은 도대체 어디 묻혀 있다가 이제 나온 거야?”
기자들의 열띤 호평 속에서 단상 위로 민지훈 감독과 최지환, 신우진이 올라가 착석했다. 간담회가 시작되자 마이크 데시벨 조율과 함께 초반에는 영화의 깊이 있는 연출 방식과 두 주연 배우의 숨 막히는 캐스팅 비화 등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질문들이 무난하게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간담회 중반, 단상 아래 구석진 2열에 앉아 있던 일간연예 김태식 기자가 마이크를 건네받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김태식은 안경을 검지손가락으로 툭 치켜올리며, 입꼬리를 뒤틀어 비열한 호선을 그린 채 단상의 두 배우를 쏘아보았다.
“일간연예 김태식 기자입니다. 영화의 완성도 자체는 매우 훌륭합니다만, 배우들의 사생활과 과거 자질 논란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군요. 먼저 최지환 씨에게 묻겠습니다. 과거 국내 최고의 기획사인 신성 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로 활동하실 당시, 무단으로 스케줄을 이탈하고 심각한 정신적 불안과 무대공포증을 겪어 회사에 수억 원대의 손실을 입히고 불명예스럽게 방출되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대중 앞에 다시 배우로 나서는 것은 다소 무책임한 처사가 아닌가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순간 상영관 내부에 깊은 침묵이 강림했다. 다른 기자들은 노트북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선을 한참 넘은 악의적인 폭로성 질문이었다.
최지환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머릿속을 사정없이 짓누르던 과거 신성 시절의 억압적인 조롱들이 해일처럼 밀려와 그의 숨통을 틀어쥐었다. 단상 위 마이크를 잡으려던 그의 얇은 손끝이 수치심과 공포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김태식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은 신우진을 향해 마이크의 칼날을 겨누었다.
“더불어 신우진 씨. 대학로 무명 연극을 전전하다 배우의 길을 포기하고 배달 오토바이를 몰며 강남 일대에서 주먹다짐을 벌이고 경찰서를 드나들었다는 찌라시가 돌고 있습니다. 오늘 영화 속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폭력배 빌런 동하 역을 아주 소름 끼치게 잘 하셨는데, 혹시 본인의 어두운 과거와 폭력적인 심성이 연기에 그대로 반영된 덕분입니까? 이러한 범죄 우려가 있는 거친 성정의 인물을 대중에게 신인 배우로 소개하는 루미너스 기획의 자질에도 큰 의구심이 드는데, 성실한 답변 바랍니다.”
상영관 안은 카메라 플래시가 두 배우의 창백해진 얼굴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번쩍였다. 민지훈 감독은 당황하여 마이크를 쥐고 항의하려 했으나, 섣불리 화를 내다가는 대기업 신성의 언론망에 더 큰 미끼를 제공해 줄 뿐이었다.
신우진은 거친 이빨을 바득 갈았다. 그의 두꺼운 주먹이 바지 주머니를 찢을 듯 꽉 쥐어졌다. 억울함과 슬픔, 그리고 자신을 믿고 거둬 준 대표님에게 해를 입혔다는 깊은 자책감이 그의 눈가를 붉게 물들였다.
그때, 단상 아래 어두운 통로 맨 뒤편에서 차분하고 단호하면서도, 상영관 스피커를 터뜨릴 듯한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질문, 루미너스 기획의 대표인 제가 이 자리에서 직접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모든 기자의 고개와 수십 대의 카메라 렌즈가 일제히 뒤편으로 향했다.
완벽한 테일러드 감청색 수트를 입은 강시우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보폭으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차가운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고, 시우의 눈동자 너머로 김태식 기자의 이마 위에 소리 없이 떠오른 투명한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스캔 되었다.
[김태식: 상태 - 매수됨 (신성 엔터테인먼트 1본부 홍보팀으로부터 500만 원 상당의 뇌물 및 단독 기사 배포 약속을 받고 고의로 배우들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유도 질문을 수행하는 중)]
시우는 김태식 기자의 옆줄에 서서 마이크를 가볍게 들어 올린 뒤, 조용히 읊조렸다.
“일간연예 김태식 기자님. 질문의 전제부터가 추악한 왜곡과 날조로 점철되어 있군요. 먼저 최지환 배우의 과거 신성 시절 이탈에 대해 팩트를 짚어 드리겠습니다. 당시 최지환 배우가 겪었던 심리적 공황 상태는 본인의 자질 부족이 아니라, 신성 엔터테인먼트 1본부 전임 매니저들의 강압적인 스케줄 요구와 비인간적인 혹사가 원인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만행을 저지르고 배우의 인권을 유린했던 신성의 전임 1본부장 김도식은 현재 회사 자금 수억 원대의 배임 및 횡령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구속 영장이 접수되어 정식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과연 대중 앞에서 책임을 지고 부끄러워해야 할 쪽이 누구입니까?”
그 순간, 상영관 곳곳에서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타다닥 소리가 폭풍처럼 빨라졌다. 대기업 신성 엔터 본부장의 검찰 구속 수사 소식은 아직 업계에 공식 배포되지 않은 사안이었기에, 현장에 모인 백여 명의 기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초대형 단독 특종이었다.
시우는 쉴 틈을 주지 않고 김태식 기자를 차갑게 내리누르며 쐐기를 박았다.
“더불어 신우진 배우의 폭력 시비 찌라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참으로 교묘하게 앞뒤를 자른 선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년 10월, 신우진 배우가 배달 근무 중 빗길에 넘어진 80대 할머니를 치고 그대로 도주하려던 무면허 음주운전 차량을 몸을 던져 막아섰고, 가해자를 현장에서 정당방위로 제압해 경찰에 인계했습니다. 그로 인해 당시 강남경찰서로부터 받은 ‘시민 감사장’ 공식 문서 사본이 제 서류철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간담회 직후 모든 기자 분께 증빙 서류를 아낌없이 배포해 드리지요.”
시우가 파란 서류철 속의 붉은 경찰청 직인이 선명한 감사장 서류를 가볍게 치켜들자, 김태식 기자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시푸르게 질리기 시작했다.
“거친 배달 일 속에서도 타인의 생명을 지켜 냈던 의로운 청년을, 단지 무명 배우라는 이유와 배달원 출신이라는 편견을 악용해 폭력배라 매도하려 드는 행위야말로…… 펜을 칼 삼아 죄 없는 사람을 난도질하려는 잔인한 폭력 아닙니까, 김 기자님?”
시우의 날카로운 팩트 폭격에 김태식 기자는 마이크를 쥔 손을 덜덜 떨며 뒤로 주저앉듯 주춤했다. 주위의 동료 기자들이 그를 한심하고 싸늘한 시선으로 힐난하기 시작했다.
그때, 단상 위에서 지환이 붉어진 눈시울을 굳건히 바로잡으며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대표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과거의 상처로 숨어 지내던 패배자였습니다. 하지만 저를 하나의 도구가 아닌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해 주시고 이끌어 주신 강시우 대표님을 만나며 제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스크린 속에 녹아든 태성의 처절한 죄책감은 제가 가진 상처를 배우로서 승화시킨 눈물입니다. 부디 저희의 연기만을 온전히 지켜봐 주십시오.”
우진 역시 울컥 쏟아지려는 눈물을 삼키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묵직하게 말했다.
“어두운 밤길 위에서 배달 일을 하며 세상의 참으로 춥고 거친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힘겨웠던 경험들이 제게는 배역을 분석하는 가장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제 손을 잡아주시고 세상의 빛을 보게 해주신 강 대표님과 감독님께 절대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겠습니다.”
두 배우의 떨리지만 진심 어린 답변이 상영관 안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자,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장내의 맨 뒷줄에서 시작된 박수가 사방으로 번져나가더니, 곧 상영관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박수갈채와 환호로 바뀌었다.
기자들의 눈동자는 더 이상 자극적인 가십거리를 쫓는 맹수의 눈빛이 아니었다. 역경을 극복한 배우들의 위대한 드라마와, 그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준 기획자 강시우를 향한 무한한 경탄과 리스펙트로 가득 차 있었다.
시우의 망막 너머로 찬란한 황금빛 시스템 알림이 잇달아 피어올랐다.
[기자간담회 악의적 공격 방어 완료! 여론의 대폭적인 반전 발생!]
[최지환의 무대공포증 트라우마 극복 지수: +40% (내면 상태 안정 및 디버프 영구 소멸)]
[신우진의 평판 상태 갱신: 배달원 출신 의인 배우 (대중적 호감도 대폭 상승)]
[루미너스 기획의 업계 위상: 배우를 아끼는 최고의 명가 기획사로 급부상!]
[시너지 효과로 인해 영화 '낙화'의 초기 예매 대기 지수: +55% 추가 상승]
시우는 미소를 머금은 채 통로를 걸어나갔다. 그의 시선은 이미 다음 판을 향하고 있었다.
금요일 오전, 서울 청담동 신성 엔터테인먼트 본사 1본부장실.
탁, 탁, 탁.
정갈한 월목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가락 끝 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 화면 속 포털 사이트 메인은 어제 있었던 시사회의 기사들로 뒤덮여 있었다.
[‘낙화’ 최지환 폭로, “신성 엔터의 부당한 강압에 꺾였던 시간들”]
[뺑소니범 제압한 의인 신우진, 독립영화로 충무로 흔드는 진짜 괴물 빌런]
[루미너스 강시우 대표, 뇌물 매수된 기자에 “펜으로 사람 죽이지 마라” 일침 폭발]
차형준 상무는 무테안경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조회수 1위 기사들을 무덤덤하게 검토했다. 보고를 올리던 홍보팀 비서가 구석에서 벌벌 떨며 머리를 깊이 숙였다.
“송구합니다, 본부장님…… 현장에서 강시우가 김태식이 매수된 계좌 정보와 신성 1본부장의 구속 수사 기밀까지 쥐고 역공을 펼치는 바람에 손쓸 틈이 없었습니다. 현재 당사 법무팀이 김도식 건의 추가 유출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만 여론이 심각합니다.”
차형준은 화를 내며 물건을 집어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얇은 입꼬리에 서늘한 미소가 조용히 걸려 있었다.
“아니, 사과할 필요 없다. 내 예상을 아주 경쾌하게 짓밟아 주었어. 강시우…… 만년 꼴찌 로드 매니저의 겉껍질 아래에 꽤 날카롭게 벼려진 독니를 감추고 있었군. 팩트를 교차 분석하는 안목과 치명상을 꽂아 넣는 기백이 아주 훌륭해. 흥미진진하군.”
차형준의 은빛 안경테로 흘러든 푸른 아침 빛이 그의 차가운 수집욕을 부추겼다.
“언론을 동원한 이 따위 얄팍한 잽은 이제 걷어치워라. 상대는 그런 가벼운 수로 흔들릴 만한 피라미가 아니다. 그렇다면 대기업의 진짜 체급 차이가 무엇인지 가르쳐줘야겠지.”
차형준이 정갈하게 정리된 기획서 서류를 비서의 앞에 놓아주었다.
“루미너스가 제작한 ‘낙화’의 극장 배급망을 담당하는 ‘태양 시네마’와 신성 계열의 극장 체인 쪽에 직접 조율을 시도해라. 하반기에 우리가 공급할 200억 대작 상업영화의 상영관 배정 쿼터를 협상 미끼로 던지고, 독립영화 ‘낙화’의 정식 개봉 상영관 배정률을 최하로 축소하라고 압박해라. 상영 시간을 아침 일찍이나 심야 시간대로만 밀어내라는 소리다.”
차형준의 어조는 비즈니스 서류를 읽듯 지극히 합리적이고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자본의 논리는 독립영화 제작진의 목을 조르는 가장 잔혹한 밧줄이었다.
“아무리 플랫폼 계약을 맺고 언론에서 극찬을 해봤자, 관객이 극장 상영관에서 영화를 예매할 수 없다면 아무런 수익도, 화제성도 생기지 않는 법이다. 링 자체를 좁혀서 숨통을 끊어놓으면, 강시우는 결국 살기 위해 제 발로 그 배우들을 들고 내 방으로 찾아오게 되겠지. 과연 이 유통의 장벽을 그가 어떻게 돌파할지 지켜보자고.”
유리창 밖으로 비쳐 드는 서울 강남의 차가운 고층 빌딩들 위로, 거대 자본이 드리우는 거대한 그물망이 다시 한번 루미너스의 안위를 향해 넓게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