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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16화

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16화: 파도의 시작

서울 강남구 역삼동. 빌딩 숲 사이로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이 루미너스 기획 대표실의 넓은 유리 통창을 통해 쏟아져 내렸다.

그 아늑한 햇살 아래, 넓은 원목 회의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 PC 화면 속에서 30초짜리 짧은 영상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쓸쓸하고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낙후된 부둣가. 거친 바람 소리를 뚫고 슬픔과 분노, 그리고 지독한 죄책감에 젖어 억지로 눈물을 참아내는 주인공 태성(최지환 분)의 얼굴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이어 화면이 급박하게 흔들리며 어둠 속에서 스산하고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빌런 동하(신우진 분)가 나타나 그의 멱살을 난폭하게 낚아챘다.

단 10초 남짓한 두 배우의 숨 막히는 눈빛 대결이 프레임을 터질 듯 장악했고, 이내 화면은 검게 암전되며 붓글씨로 묵직하게 적힌 ‘낙화’라는 제목이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조회수가 벌써 55만을 넘었어요! 게다가 인스타그램 릴스랑 틱톡, 쇼츠에 배경음악 얹어서 사람들이 퍼 나른 숏폼 영상들은 조회수를 다 합치면 벌써 100만 뷰가 훌쩍 넘었어요!”

유나린이 가죽 소파 위에서 태블릿을 품에 안은 채 어린아이처럼 제자리에서 붕붕 방방 뛰며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머리 위로 명멸하는 스타메이커 시스템의 알림창에는 소속사 대표인 시우를 향한 무한한 신뢰와 성취감이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신우진은 쑥스러운 듯 거칠고 굵직한 손가락으로 자신의 뒷목을 쓸어내렸다.

“저 화면 속에서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 담글 것처럼 서늘하게 눈을 부라리는 깡패 같은 놈이 진짜 저 맞습니까? 카메라 렌즈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건지, 제 험악한 얼굴이 묘하게 분위기 있는 누아르 톤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우진 씨가 촬영 현장에서 진짜 배역에 빙의한 것처럼 엄청난 살기를 뿜어주셔서 그런 겁니다. 우진 씨의 그 독보적인 안광이 받쳐주지 않았으면, 제 비겁하고 위축된 시선 피하기 연기도 그냥 묻혔을 거예요. 이건 100% 우진 씨 덕분입니다.”

최지환이 잔잔하지만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지환의 눈가에는 아직도 벅차오르는 감격의 붉은 기운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평생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피해 무대 뒤로 숨고 공포증에 신음했던 그가, 이제는 대중들이 열광하는 화제의 영상 한가운데 서 있었다.

강시우는 소속 배우들의 붉게 상기된 얼굴들을 묵묵히 짚어보다가, 갓 내린 따뜻한 아메리카노 세 잔을 테이블 위에 부드럽게 올려놓았다.

“세 사람 모두 들뜨지 마세요. 이제 겨우 30초짜리 맛보기 티저 예고편 하나가 인터넷에 올라갔을 뿐입니다. 독립영화라는 장르는 정식 개봉관을 제대로 잡고, 최종 관객 수 스코어가 찍혀 매출이 정산되기 전까지는 성공을 입에 올릴 수 없습니다. 흥행이란 판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시우의 음성은 지나치게 차분했고, 얼음처럼 냉정했다. 하지만 그의 동공 너머로 명멸하는 황금빛 시스템 알림창은 이미 정반대의 완벽한 승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소속 배우 미디어 노출 부스트 버프 상시 적용 중: 온라인 노출 및 인지도 상승 효과 +20% 추가 보정]
[최지환 대중 인지도: 삼류 무명 -> 충무로의 기대주 (급격한 상승 중)]
[신우진 대중 인지도: 대학로 무명 -> 라이징 악역 루키 (급격한 상승 중)]
[루미너스 기획의 업계 위상: 신생 강소 기획사로 주목받기 시작함]

시우의 냉철한 팩트 폭격에 나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지환과 우진은 이내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시우의 차가운 이성은 언제나 그들을 가장 완벽한 목적지로 데려다주었기에, 배우들은 그의 말이라면 맹목적인 믿음을 품고 있었다.

바로 그때, 시우의 양복 안주머니에서 묵직한 진동음이 울렸다. 발신인은 독립영화 ‘낙화’를 연출한 민지훈 감독이었다.

시우가 전화를 받아 귀에 대는 순간, 수화기 너머로 귀가 먹먹할 정도의 데시벨로 흥분한 음성이 와락 쏟아졌다.

수화기 건너편 민 감독의 목소리는 너무 흥분해서 숨이 턱턱 막히는 듯 떨리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 신성의 악질적인 외압으로 주연 배우를 빼앗기고 영화가 통째로 엎어질 뻔했던 절망적인 상황은 이미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이미 예상했던 동향입니다, 민 감독님. 픽스온 측과의 판권 및 배급 협상은 제가 직접 여의도로 넘어가 조율할 테니, 감독님은 흔들리지 말고 후반 편집 작업과 사운드 믹싱에만 전념하십시오. 계약은 기획사 대표인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예술가는 오직 예술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전화를 끊은 시우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굶주린 승냥이처럼 몰려드는 투자 배급사들. 하지만 그들이 쥔 얄팍한 주판알을 걷어내고 가장 거대한 고깃덩어리를 물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기획자의 냉철한 칼날에 달려 있었다.


같은 시각, 서울 청담동 신성 엔터테인먼트 사옥의 1본부장실.

과거 김도식이 자신의 졸부 같은 취향을 뽐내기 위해 호사스럽게 채워 넣었던 고급 이탈리아제 가죽 소파와 도금된 스탠드 조명들이 인부들에 의해 무참하게 복도로 실려 나가고 있었다.

그 어수선한 텅 빈 사무실 한가운데, 짙은 회색빛 쓰리피스 수트를 자로 잰 듯 완벽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날카롭게 날이 선 콧날 위에 얹어진 은빛 무테안경, 그리고 그 너머로 번뜩이는 독사처럼 차가운 안광. 신성 엔터테인먼트 기획조정실의 핵심 실세이자, 김도식의 배임 징계 이후 1본부의 수습을 위해 신임 본부장으로 급파된 차형준 상무였다.

차형준은 책상 위에 흩어진 김도식의 징계 의결서와 법인 자금 배임 영수증을 훑어보더니, 혀를 쯧 차며 서류 뭉치를 옆의 쓰레기통으로 가차 없이 내던졌다.

“머리가 멍청하면 탐욕이라도 적당히 부려야지. 사채 빚에 쪼들리는 하류 사설탐정이 파놓은 초딩 수준의 낚시질에 걸려 본부 제작 예산을 통째로 헌납해? 진짜 눈뜨고 봐줄 수가 없는 쓰레기 같은 짓이군.”

차형준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섞여 있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차갑고 위압적이었다. 그는 쓰레기통을 걷어차듯 시선을 돌려, 책상 위에 놓인 파란색 서류철을 들어 올렸다. 서류철 표지에는 ‘루미너스 기획 및 대표 강시우 동향 보고서’라는 문구가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강시우…… 신성 엔터의 꼴찌 로드 매니저 출신이라더니. 기조실 특별감사팀조차 파악하지 못하게 김도식의 탐욕을 자극해서 제 발로 쥐덫을 밟아 죽게 만들었어. 꽤나 흥미로운 쥐새끼로군.”

차형준의 무테안경 너머로 차가운 호기심과 정복욕이 교차했다.

김도식처럼 감정적으로 화를 내며 상대의 멱살을 잡거나, 무식하게 캐스팅 외압을 넣는 짓은 차형준의 사전에 없었다. 그에게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란 철저한 수치와 데이터, 그리고 거대 자본의 논리로 짓눌러버리는 영토 전쟁이었다.

그때, 비서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 머리를 숙였다.

“본부장님, 지시하신 대로 루미너스의 배우들이 출연한 독립영화 ‘낙화’의 판권 관련 움직임을 파악했습니다. 오늘 오후 여의도 모처에서 국내 최대 OTT 플랫폼인 ‘픽스온’의 정선우 콘텐츠 구매 팀장과 강시우 대표가 독점 스트리밍 계약을 위한 극비 회동을 가질 예정입니다.”

“픽스온이라…….”

차형준이 가볍게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원목 책상을 톡, 톡 일정한 템포로 두드렸다.

“그들이 요즘 오리지널 드라마의 연이은 폭망으로 본사 특별 감사를 앞두고 목줄이 탄탄하게 죄어 있는 상태지. ‘낙화’의 화제성을 헐값에 선점해서 돌파구를 만들려 할 텐데. 과연 강시우가 그 굶주린 늑대들의 이빨 사이에서 제 밥그릇을 지켜낼 수 있을지 궁금하군.”

차형준은 입꼬리를 서늘하게 올리며 비서에게 나지막한 지시를 내렸다.

“신성 계열의 극장 체인을 동원해 배급을 방해하는 짓은 하지 마라. 모양새 빠지게 노이즈를 만들 필요는 없어. 대신 픽스온의 정선우 팀장에게 가볍게 흘려만 둬라. 우리 신성 1본부의 하반기 200억 대작 상업영화 라인업 공급 계약 건을 논의하는 도중에, 우리가 루미너스와의 판권 협상 결과를 아주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예, 본부장님. 자연스럽게 귓속말을 넣어두겠습니다.”

비서가 깍듯하게 물러나자, 차형준은 창문 너머로 굽어보이는 강남의 번화가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강시우. 네가 아무리 잔꾀를 굴리며 날뛰어봐야 대기업이 쳐둔 자본의 그물망 안이다. 네가 소중히 갈고닦은 그 원석들을 내가 어떻게 합법적으로 수확해 가는지 조용히 지켜봐라.”


수요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적하고 정갈한 비즈니스 전용 카페.

은은한 정통 재즈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안쪽의 예약 룸에, 픽스온 코리아의 콘텐츠 구매 팀장 정선우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이탈리아제 고급 맞춤 정장에 고가의 명품 시계를 찬 그는, 강시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품 안에서 두툼한 계약서 초안 한 부를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강 대표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저희 픽스온은 이번 독립영화 ‘낙화’의 시장 가능성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극장 개봉을 생략하고 저희 플랫폼의 독점 오리지널 스트리밍으로 넘겨주는 조건으로, 저희가 제안하는 금액은 무려 1억 5천만 원입니다. 저예산 독립영화 판에서는 가히 파격적인 금액이라는 건 강 대표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정선우는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 커피를 들이켰다. 그의 눈빛에는 ‘이런 1인 구멍가게 대표 놈들은 목돈 조금 쥐여주고 압박하면 알아서 넙죽 엎드릴 것’이라는 거만한 태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강시우는 계약서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정선우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시우의 마음속 호출과 함께 스타메이커 시스템의 투명한 정보 창이 허공으로 소리 없이 떠올랐다.

[이름: 정선우 (36세)]
[직업: 픽스온 코리아 콘텐츠 구매 팀장]
[상태: 극심한 불안 및 초조함 (올 상반기 독점 판권을 샀던 로컬 드라마들의 연속 흥행 참패로 본사의 특별 감사 대기 중. 이번 달 내에 확실하게 대중의 눈길을 끌 만한 독점 매물을 저렴하게 선점하여 자신의 실적을 증명해 내지 못하면 직위 유지가 곤란한 상황)]
[대상에 대한 평가: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 계약을 헐값에 타결시키기 위해 짐짓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나, 내면의 심리적 방어선은 붕괴 직전임]

시우의 입가에 차가운 실소가 스쳐 지나갔다.

겉으로는 거대한 호랑이 가죽을 쓰고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속은 당장이라도 모가지가 날아갈까 봐 벌벌 떠는 가여운 고양이에 불과했다. 상대의 패를 완전히 까뒤집어 확인한 시우가 계약서 뭉치를 손가락 끝으로 정선우 쪽으로 슬며시 밀어냈다.

“정 팀장님. 픽스온의 급박한 실적 압박을 때우기 위한 헐값 방어용 매물로 던져주기에, 우리 ‘낙화’의 가치는 너무 과분하게 높습니다.”

정선우의 꼬고 있던 다리가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그가 들고 있던 커피 컵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실적 압박이라니요? 강 대표님,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저희 픽스온은 국내 최고의 가입자를 보유한 독보적인 OTT 플랫폼입니다. 독립영화 한 편에 1억 5천이면 제작비 전액을 100% 보전받는 셈인데, 극장에 걸어봤자 총관객 수 1만 명도 안 드는 게 요즘 한국 영화 시장의 참혹한 현실인 걸 모르십니까?”

“그건 신성 엔터테인먼트가 백현우처럼 연기 재능 C급짜리 껍데기들을 낙하산으로 꽂아 공장형으로 찍어내는 쓰레기 영화들의 흥행 참패 기록이겠죠.”

시우가 상체를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며 정선우의 눈동자를 날카롭게 꿰뚫었다.

“정 팀장님. 픽스온 코리아가 최근 독점 계약으로 엄청난 선급금을 태웠던 80억 규모의 오리지널 드라마 두 편이 연속으로 최악의 뷰어십을 기록했죠. 덕분에 이번 주 금요일에 아태지역 지사에서 특별 감사단이 파견된다면서요? 정 팀장님의 목줄을 쥐고 있는 건 바로 이번 달 내에 성사시켜야 할 화제성 있는 독점 콘텐츠의 유무입니다. ‘낙화’의 티저 예고편은 공개 사흘 만에 통합 조회수 200만을 넘었고, 픽스온 내부 시뮬레이션에서도 가입 전환율 지수 최고점을 기록한 걸로 압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정선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의 이마와 콧등 위로 식은땀 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자신이 처한 극비 감사 상황과 픽스온 내부 구매전략실의 기밀 시뮬레이션 수치까지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읊조리는 이 젊은 기획사 대표의 정보력은 대체 어떤 괴물 같은 원천에서 나오는 것인가.

정선우는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테이블 밑으로 두 손을 맞잡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신성 쪽에서 들어온 귓속말도 그렇고, 대체 무슨 꿍꿍이지?”

“조건을 다시 제안하겠습니다.”

시우는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계약서 첫 페이지에 굵게 적혀 있는 ‘독점’이라는 글자 위에 가차 없이 두 줄의 흑색 선을 그어버렸다.

“극장 개봉을 선행합니다. 배급은 태양 시네마와 공동으로 진행하되, 극장 개봉 3주 후에 픽스온에 논독점(Non-Exclusive) 스트리밍 권한을 넘기겠습니다. 선급금(MG)은 3억 원. 그리고 극장 관객 수 및 픽스온 내 뷰어십 수치에 연동된 추가 러닝 개런티 15%를 지급 조건에 명시해 주십시오.”

“3, 3억에 러닝 개런티 15%라니요! 독립영화 판에 그런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 선례가 없습니다! 본사 투자위원회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안을 결재해 줄 리가 없어요!”

정선우가 억눌린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시우는 여유롭게 서류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선례는 만드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싫으시면 이 계약안은 찢으셔도 좋습니다. 마침 오늘 저녁에 태양 미디어 투자전략 팀장과의 미팅도 잡혀 있으니, 저는 그쪽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시우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정선우의 머릿속은 하얗게 타들어가다 못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 이 미팅마저 빈손으로 끝내고 돌아간다면, 금요일 특별 감사에서 자신의 책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명백했다. 신성에서 은밀하게 건네왔던 압박이나 눈치 따위는, 당장 내 목을 조여오는 본사의 감사 칼날 앞에서는 한낱 사치스러운 걱정에 불과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강 대표님!”

정선우가 자리에서 튀어나가듯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만했던 팀장의 가식은 온데간데없고, 파멸을 앞둔 직장인의 절박함만이 가득 묻어 있었다.

“……도장, 도장 가져오셨습니까? 합의…… 합의해 봅시다.”

시우는 등을 돌린 채 소리 없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만년필을 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눈앞의 투명한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기분 좋은 황금빛 불꽃을 뿜어내며 갱신되었다.

[배급 계약 완결: 픽스온(PixOn) 선급금 3억 원 확보 및 러닝 개런티 15% 획득]
[독립영화 '낙화' 예상 흥행도: ★★★★☆ (대형 플랫폼 배급 연동으로 파급력 +35% 추가 적용)]
[소속 배우 최지환, 신우진의 신인상 획득 가능성 대폭 상승]


늦은 저녁, 어둠이 짙게 깔린 역삼동 루미너스 기획의 대표실.

시우는 픽스온과의 선명한 계약 도장이 찍힌 서류 원본을 서랍에 넣고, 따뜻한 우롱차를 마시며 깊어가는 밤을 정리하고 있었다.

유리 통창을 가볍게 두드리는 밤바람 소리 사이로, 문이 열리며 루미너스의 정식 정보실장 오기태가 조용히 걸어 들어왔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말끔한 블랙 수트. 예전의 사채 빚에 쫓겨 야비하게 눈치를 살피던 탐정의 찌든 티를 완벽하게 털어낸 기태의 눈빛에는, 이제 오직 대표 강시우를 향한 절대적인 맹신과 경외심만이 깃들어 있었다.

“대표님, 신성 1본부의 새로운 동향이 파악되었습니다. 김도식이 즉각 대기발령된 공석에 기획조정실 출신의 차형준 상무가 임명되어 오늘부터 공식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차형준…….”

시우가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차분하게 상대의 이름을 곱씹었다.

“네. 김도식 같은 뇌가 없는 무식한 불도저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뱀 같은 인물입니다. 김도식이 주말 동안 싸질러 놓은 초코 엔터 이면 배임 계약 건의 증거들을 법무팀을 동원해 완벽하게 세탁하고 있으며, 대표님과 루미너스의 설립 초기 자료부터 소속 배우들의 뒷조사 보고서를 완벽하게 리빌딩했습니다. 오늘 오후에는 픽스온의 정선우 팀장 측에 우회적인 경고를 넣어 계약 체결에 간접 방해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기태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어겨 있었다. 김도식은 멍청해서 역정보만 툭 던져줘도 스스로 쥐덫에 대가리를 박았지만, 차형준은 대기업 신성의 전폭적인 자본과 지능적인 법률적, 물리적 수단을 완벽하게 조합해 목을 죄어올 진짜 독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우는 오히려 소리 없이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동공 너머로 흐릿한 푸른 안광이 스쳐 지나갔다.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적당히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는 놈이 판에 기어 들어와 줘야, 판돈을 크게 키워서 판을 통째로 엎어버릴 때 루미너스가 쓸어 담을 수확물이 많은 법입니다.”

시우가 가볍게 기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독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오 실장님. 차형준이 앞으로 우리를 향해 어떤 영리한 쥐덫을 파놓을지, 그 뱀의 꼬리를 놓치지 말고 계속 밀착 감시하십시오. 뱀이 대가리를 치켜들고 우리를 삼키려 드는 바로 그 순간이, 그 대가리를 으깨버리고 신성 엔터를 뿌리째 흔들 완벽한 기회가 될 테니까요.”

기태는 시우의 흔들림 없는 서늘한 미소 앞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짜릿한 소름이 돋는 전율을 느꼈다. 그는 시우를 향해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맹세를 되새겼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림자처럼 붙어서 그자의 모든 동선을 꿰뚫어 보고드리겠습니다.”

기태가 조용히 노크를 하고 물러나자, 시우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밤거리는 오색 빛깔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빌딩의 불빛들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이제 거대한 시대의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파도의 정점에 올라타 세상을 굽어볼 날이 결코 멀지 않았다. 시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어둠의 심연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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