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시한부 명예교수가 되었다

4화: 비어 있는 검로의 증명
검술 훈련장 중앙에는 검은 측정석이 놓여 있었다.
사람 키만 한 돌기둥의 표면에는 은색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칼날에 부착된 마력의 양과 지속 시간을 재는 검술부 표준 장비였다.
카이엔은 그 앞에 섰다. 붕대로 감은 오른손바닥이 목검 손잡이 안에서 욱신거렸다.
훈련장 난간에는 검술부 학생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놓고 웃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낮게 새는 말들은 굳이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새벽의 푸른 잔상이라. 등불 심지가 흔들린 것 아니었나?"
"목검으로 마검술을 했다더군. F-Class는 아침부터 재밌어."
카이엔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말들보다 앞에 선 마르첼 보조교관의 눈빛이 더 거슬렸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카이엔과 측정석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절차는 간단하다. 검에 마력을 둘러 측정석 앞을 세 번 베라. 네가 남겼다는 현상이 마력이라면 수치가 남겠지."
"검에 두르지 않습니다."
카이엔의 말에 마르첼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럼 대체 무엇을 검증하자는 거지?"
카이엔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정확한 이름을 몰랐다. 검이 지나간 자리를 비운다는 말을 이해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남들 앞에서 설명하려 하자 손 안의 목검이 낯설어졌다.
한쪽 그늘에서 데인이 하품했다.
그는 강의용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잠이 덜 깬 눈가 아래로 옅은 그늘이 져 있었다. 무릎 위에는 헤르만이 건넨 검증 신청서가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끝나면 깨워."
헤르만이 난처하게 웃었다.
"루드윅 교수님께서 직접 관찰하셔야 공정성이 확보됩니다. 교수님 수업에서 나온 현상 아닙니까."
"수업에서 나온 건 소음이었는데."
헤르만은 그 말을 공책에 적지 못하고 펜끝만 떨었다.
마르첼이 측정석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시작해라."
카이엔은 자세를 잡았다.
시선이 등에 꽂혔다. 정식 훈련장 뒤편에서 남들의 수련을 구경하던 날들이 떠올랐다. 평민 장학생에게 누군가 목검을 던져 주던 날도 있었다. 한 번 휘둘러 보라는 뜻이 아니었다. 바닥이나 쓸라는 뜻이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데인이 보고 있었다.
그 생각이 손목을 굳게 만들었다.
카이엔은 목검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후웅.
목검 끝에 옅은 빛이 감겼다. 측정석의 은색 눈금이 한 칸 올랐다.
"보통 수준이군."
마르첼이 무심하게 말했다.
카이엔은 이를 악물고 다시 베었다. 이번에는 더 강하게 밀어 넣었다. 빛은 조금 진해졌지만 검이 지나간 자리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세 번째 휘두름에서는 손바닥 상처가 찢어졌다.
목검 손잡이 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측정석은 두 칸을 넘지 못했다.
난간 쪽에서 누군가 혀를 찼다.
"그게 끝인가?"
마르첼은 손을 내렸다.
"됐다. 새벽의 착시는 피로한 눈이 만든 것이겠지. 이 정도 결과를 특별 교육 성과처럼 보고한 쪽이 더 문제군."
헤르만의 얼굴이 붉어졌다. 카이엔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손바닥의 열감과 귀 안쪽의 웅웅거림만 남았다.
'또 붙였어.'
마력을 붙이지 말라는 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손은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돌아갔다.
데인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이 그 낙서를 이해할 자격이 있다는 것도.
그래서 검에 매달렸다.
카이엔이 목검을 다시 들었다.
"한 번 더 하겠습니다."
"그 손으로?"
데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또렷해졌다.
카이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려놔."
"아직 아닙니다."
"그래서 네가 방금 뭘 했는데."
말이 막혔다.
데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걸음 걷는 것뿐인데 안색이 더 희어 보였다. 그는 측정석 앞에 서지 않고 카이엔의 목검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돌이 보고 싶은 걸 보여 주려고 칼을 휘둘렀지."
"...예."
"그럼 그 돌한테 배워. 네 검한테 배우지 말고."
카이엔의 시선이 흔들렸다.
마르첼이 비웃었다.
"말장난으로 실패를 덮으실 셈입니까? 측정석은 검술부가 수십 년 동안 쓴 장비입니다."
"그러니까 칼날에 붙은 마력은 잘 보겠지."
데인은 은색 눈금을 바라보았다.
"안 붙은 흐름까지 읽도록 만든 건 아니고."
"안 붙은 흐름이란 게 존재합니까?"
"있었잖아. 어젯밤에."
데인은 귀찮다는 듯 덧붙였다.
"적어도 난 봤어."
잠깐 훈련장이 조용해졌다.
루나가 공책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왔다.
"측정석은 유입량과 지속량을 읽습니다. 어젯밤 현상은 검끝의 유입이 아니라 검이 지나간 뒤의 흐름 변화였어요. 같은 도구가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르첼이 차갑게 물었다.
"F-Class 학생이 검술부 장비를 평가하겠다는 건가?"
루나는 움찔했다. 공책을 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도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평가가 아니라 관찰 조건을 바꾸자는 겁니다."
엘리나도 카이엔 옆으로 섰다.
"바닥의 먼지가 너무 많습니다. 공기 흐름도 일정하지 않고요. 어젯밤에는 더 조용했습니다."
"너희 셋이 서로 도울 생각이라면 검증이 아니라 연극이지."
마르첼의 말에 카이엔이 고개를 들었다.
엘리나의 손끝에서 냉기가 튀었다. 그녀는 곧 손을 움켜쥐었다. 크게 얼리면 안 된다. 억누르면 다시 흔들린다. 작은 흐름만 만들면 된다.
데인이 짧게 말했다.
"연극이면 관객도 필요하겠네. 다 보고 있어."
마르첼은 이를 다물었다.
데인은 카이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증명하려고 휘두르지 마."
카이엔이 숨을 삼켰다.
"네 검은 네가 믿을 때 제일 무거워진다."
그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손목에 걸린 쇠사슬 같았다.
카이엔은 피 묻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늘 누군가에게 보여 주려고 검을 들었다. 귀족 학생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장학생 자리를 받을 만하다고. 이번에는 데인이 틀리지 않았다고.
그래서 검이 무거웠다.
"다시 할 수 있겠습니까?"
엘리나가 작게 물었다.
카이엔은 한 번 눈을 감았다.
"할 거야. 하지만 보여 주려고는 안 해."
루나가 공책을 펼쳤다.
"관찰식 하나만 쓸게. 빛을 만드는 식이 아니야. 종이가 움직인 횟수만 기록할 거야."
그녀는 얇은 종이 조각 세 장을 검로 옆에 띄웠다. 손끝의 작은 불씨가 종이 귀퉁이에 찍힌 기호 하나만 밝혔다.
엘리나는 훈련장 바닥을 보았다. 손가락 끝에서 얼음 잎이 하나 피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잎이 그 옆에 내려앉았다. 얼음은 바닥을 얼리지 않았다. 흩날리던 먼지와 급한 공기 흐름을 조금 가라앉혔다.
그 작은 변화만으로도 엘리나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더 많은 마력을 끌어오고 싶은 충동이 손끝을 당겼다.
그녀는 얼음 잎을 더 만들지 않았다.
카이엔은 목검을 들었다.
마르첼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검증인가."
"조용히 해요."
데인이 말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카이엔은 검끝을 보지 않았다. 측정석도 보지 않았다. 앞에 남은 빈 공간만 보았다.
첫 번째 휘두름.
후욱.
종이 조각 하나가 흔들렸다. 푸른빛은 없었다.
카이엔은 바로 두 번째 검을 내지르려다 멈췄다. 손목이 떨렸다. 조급함이 다시 올라왔다.
'한 번 더.'
그는 그 충동을 흘려보냈다.
숨을 내쉬었다.
다시 자세를 잡았다.
두 번째 휘두름.
목검이 공기를 갈랐다.
푸른 선은 검끝에 붙지 않았다. 검이 지나간 뒤 한 박자 늦게 허공이 가늘게 흔들렸다. 종이 조각 세 장이 같은 방향으로 밀려났고 바닥의 먼지가 길게 갈라졌다.
그 뒤에 아주 희미한 푸른 잔상이 남았다.
한 호흡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지기 전까지 측정석은 침묵했다.
루나의 손이 멈췄다.
"기록됐어. 종이 세 장이 같은 시간에 움직였어. 측정석 수치는 영이야."
엘리나는 숨을 죽인 채 잔상이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카이엔. 봤어."
카이엔은 대답하지 못했다. 피가 묻은 손가락이 목검에서 천천히 풀렸다.
난간의 학생들도 조용해졌다. 누구 하나 착시라고 말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종이와 먼지가 같은 선을 따라 움직였다.
마르첼만이 측정석을 노려보았다.
"측정석이 반응하지 않았어. 공식 기록으로 남길 수 없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카이엔이 물었다.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조금 전처럼 날카롭지도 않았다.
"제가 방금 한 걸 다시 할 수 있으면 됩니다."
마르첼의 얼굴이 굳었다.
"다시 할 수 있다고?"
"오늘은 두 번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카이엔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어제보다 하나 늘었습니다. 다음에는 하나 더 늘릴 겁니다."
데인은 그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학생이 또 이상한 방향으로 각오를 다졌다. 다만 당장 피를 흘리며 목검을 들려 하지 않는다는 점은 조금 나았다.
그 눈은 데인이 가장 싫어하던 종류의 눈이었다. 몸이 부서져도 한 줄만 더 적으면 된다고 믿던 연구소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헤르만이 감격한 얼굴로 공책에 적기 시작했다.
"수치로 포착되지 않는 결손형 검로. 기존 측정 체계의 사각을 드러내는..."
"그대로 쓰지 마."
데인이 말했다.
"그래도 핵심은 기록해야 합니다."
"핵심은 얘 손바닥이 찢어졌다는 거야."
헤르만은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한 반복을 경계시키는 지도 원칙까지."
데인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마르첼이 카이엔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일주일 뒤에 다시 한다. 정식 훈련생들이 보는 자리에서. 그때도 측정석이 읽지 못하는 현상만 내세울 생각은 아니겠지."
카이엔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데인은 그보다 먼저 말했다.
"정식 훈련생이 왜 와."
"검술부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목검 하나 휘두른 데 명예가 걸려?"
"그 목검 하나가 교수님의 특별 교육 성과로 떠들리고 있으니까요."
마르첼은 이번에는 헤르만을 노려보았다.
헤르만은 슬쩍 공책을 품에 안았다.
카이엔이 목검을 옆에 세웠다.
"받겠습니다."
데인이 고개를 돌렸다.
"뭘."
"재검증입니다."
"네 손부터 검증해. 더 하면 망가져."
카이엔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목검에서 손을 뗐다.
"오늘은 쉽니다."
데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내일부터 반복하겠습니다. 하루에 정한 횟수만."
"그것도 누가 정해."
"교수님이요."
"왜 내가."
"명령을 지켰으니까 다음 명령도 필요합니다."
데인은 한참 카이엔을 보았다.
그러다 무표정하게 말했다.
"열 번. 아프면 아홉 번."
"예."
카이엔은 고개를 숙였다.
엘리나와 루나는 서로를 보았다. 루나는 벌써 열 번을 기록할 표를 공책 귀퉁이에 그렸다. 엘리나는 얼음 잎을 거두고 카이엔의 붕대를 다시 묶었다.
데인은 그 모습을 보고 훈련장 출구로 향했다.
아침 햇빛이 바닥에 길게 내려앉았다.
난간에서는 검술부 학생들이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대신 서로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주일 뒤 재검증에 정말 F-Class가 다시 나오는지.
데인은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일주일이나 시끄럽겠네.'
그리고 그날 오후 검술부 게시판에는 짧은 공지가 붙었다.
[F-Class 카이엔의 비정규 검로 현상 재검증. 정식 훈련생 참관 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