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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4화

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

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

4화: 듀엘론 신청서

복도에 모인 학생들의 시선은 젖은 잉크처럼 번졌다.

하진은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품 안에는 제라드 교수가 학사위원회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악보가 들어 있었다. 푸른 잉크는 말랐지만 종이 깊은 곳에서 아직도 희미한 박동이 느껴졌다.

“낙제생 주제에 교수님을 홀렸다고 들었다.”

금장 단추가 박힌 교복을 입은 학생이 복도 끝에서 걸어왔다.

곧게 빗어 넘긴 금발. 흠 하나 없는 장갑. 사람을 내려다보는 일이 몸에 밴 눈매. 주변 학생들은 누가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길을 비켰다.

루카스가 하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에드릭 로웰이야. 작곡과 2학년 수석. 로웰 백작가 후계자고 화염 계열 공명으로 유명해.”

“유명하면 뭐가 달라지나?”

“달라지지. 보통 저런 놈한테는 먼저 시비 안 걸어.”

“이미 저쪽이 걸었는데.”

루카스는 입을 다물었다.

에드릭은 하진 앞에서 멈췄다. 그는 하진의 낡은 교복과 잉크 자국이 남은 손끝을 천천히 훑었다. 그 시선에는 사람이 아니라 흠집 난 악기를 보는 듯한 냉소가 배어 있었다.

“공명 수치 0인 학생이 하루아침에 대기 에테르를 유도했다라. 재미있는 소문이군.”

“재미있었으면 다행이고.”

복도에 낮은 숨소리가 번졌다.

에드릭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말버릇도 바뀌었나. 교수의 비호를 받게 되니 겁이 사라졌나 보지?”

“겁낼 만한 소리를 아직 못 들어서.”

루카스가 이마를 짚었다.

에드릭은 품에서 붉은 봉투를 꺼냈다. 봉투 표면에는 두 개의 음표가 칼처럼 교차한 문장이 찍혀 있었다. 그가 봉인을 뜯자 양피지가 스스로 펼쳐지며 허공에 떠올랐다.

“그럼 들려주지.”

붉은 글자가 양피지 위에 새겨졌다.

“듀엘론. 악보와 연주로 상대의 공명장을 깨는 정식 마법 음악 결투다. 실기 무대에서 나와 마주 서라. 네가 교수님을 속인 게 아니라면 모두 앞에서 다시 증명하면 되지 않나.”

학생들이 술렁였다.

하진은 양피지에 떠오른 문장을 읽었다. 결투 장소. 참관 교수. 보호 결계. 승패 판정.

형식은 정중했다.

목적은 노골적이었다.

공개 처형.

“거절하면?”

에드릭은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아카데미 전체가 알게 되겠지. 하진이라는 학생은 밀실에서는 기적을 만들 수 있어도 실기 무대에서는 악보 한 줄 울릴 배짱이 없다고.”

그때 제라드 교수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렸다.

탁.

소음이 단숨에 끊겼다.

“에드릭 로웰.”

제라드의 목소리는 낮았다.

“학사위원회 앞에서 결투 신청서를 흔드는 건 규정 위반 직전이다.”

에드릭은 곧장 허리를 숙였다. 태도는 예의 바르고 문장은 매끄러웠다.

“정식 절차를 따르겠습니다. 교수님. 작곡과 수석으로서 학과의 명예를 확인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검증되지 않은 이론이 교수님의 선언 하나로 평가 체계를 흔드는 상황입니다. 학생들에게도 납득할 기회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명분은 그럴듯했다.

제라드 교수는 하진을 돌아보았다.

“하진. 학생 간 듀엘론은 거절할 수 있다. 자네는 오늘 재분류 절차가 막 끝났다. 준비 기간을 요청할 권리도 있다.”

하진은 복도에 늘어선 학생들을 보았다.

호기심. 의심. 불쾌감.

제라드의 선언은 보호막이었다. 그러나 보호막 안에만 있으면 하진은 영원히 예외로 남는다. 낙제생이 운 좋게 교수의 호기심을 샀다는 소문은 악보보다 빠르게 퍼질 것이다.

부수려면 무대가 필요했다.

“받겠습니다.”

루카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야!”

제라드의 눈이 좁아졌다.

“충동으로 대답하지 마라.”

“충동 아닙니다.”

하진은 양피지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조건은 저위 공명전. 보호 결계 안에서 공명장 파괴 판정만 봅니다. 신체 손상은 즉시 패배로 넣죠.”

에드릭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목숨은 아까운 모양이군.”

“네 화염 선율이 결계도 못 지키면 그게 더 창피하지 않나?”

이번에는 복도 양쪽에서 짧은 탄성이 터졌다.

에드릭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결투 관리 조교가 서둘러 다가왔다. 그는 제라드의 표정을 살핀 뒤 양피지를 받아 조건을 적었다.

“저위 공명전. 실기장 제3무대. 내일 정오. 제라드 벨라시온 교수 참관. 보호 결계 삼중 전개. 승패는 공명장 파괴로 판정합니다.”

조교가 하진에게 펜을 내밀었다.

“서명하면 철회할 수 없습니다.”

하진은 펜을 받았다.

손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 푸른 시스템 격자가 시야 위로 내려왔다.

[결투형 공명 환경 감지]
[상대 예상 속성: 화염 계열 고마력 압박 선율]
[권장 대응: 속도 우위, 궤도 분산, 단일 슬롯 무기 변환]

단일 슬롯.

새로 열린 저위 공명 변환 슬롯은 하나뿐이었다. 방어를 넣으면 공격이 약해진다. 공격을 넣으면 방어가 빈다.

하진은 웃었다.

‘맞기 전에 뚫으면 되지.’

그는 서명했다.

양피지의 붉은 글자가 빛나더니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장은 에드릭에게 돌아갔고 다른 한 장은 하진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에드릭은 종이를 접으며 낮게 말했다.

“내일 무대에서 네 악보가 얼마나 얇은지 보여주겠다.”

“조심해.”

하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얇은 종이에 베이면 더 아프거든.”

기숙사로 돌아온 루카스는 문을 닫자마자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 진짜 미쳤어? 에드릭 악보 하나가 훈련장 허수아비 세 개를 태운 적도 있어!”

“허수아비가 잘못했네.”

“농담할 때 아니라고!”

루카스가 책상 위에 꾸러미를 쏟아냈다. 저급 공명석 네 개. 푸른 악보지 한 묶음. 은색 마법 잉크 한 병. 잉크 병마개에서는 쇠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하진은 물건들을 내려다보았다.

“구해 왔네.”

“네가 또 이상한 짓 할 것 같아서. 그리고 제발 이상한 짓을 할 거면 재료라도 제대로 쓰라고.”

“좋은 판단이야.”

“좋은 판단은 결투를 안 받는 거였어.”

하진은 대답 대신 의자에 앉았다.

빈 악보지를 펼치자 시스템 격자가 오선 위로 맞물렸다. 음표를 찍기도 전에 작고 푸른 숫자들이 줄 사이를 헤엄쳤다.

[악보 실시간 분석 활성화]
[에테르 오차 자동 표시 활성화]
[저위 공명 변환 슬롯: 1/1 사용 가능]

평균율 공명 공식은 증명용이었다.

대기를 설득하고 기록석을 밝히고 오르간을 울리는 데에는 완벽했다. 하지만 결투장은 청음 기록실이 아니다. 상대는 하진이 마지막 마디를 짚을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에드릭의 화염 선율은 밀어붙이는 힘으로 공명장을 찢을 것이다. 마력량을 앞세워 열과 압력을 만들고 약한 악보를 그대로 태워 버리는 방식.

하진에게 필요한 건 힘이 아니었다.

속도.

짧은 시간에 밀도를 폭발시키고 하나의 음이 다음 음을 물고 가며 같은 지점을 연속으로 찌르는 구조.

그 순간 머릿속에서 어두운 피아노 소리가 솟구쳤다.

낮게 깔린 밤. 그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오른손의 아르페지오. 상행과 하행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교차하며 청자를 몰아붙이는 서늘한 곡.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3악장.

하진은 첫 음표를 찍었다.

사각.

은색 잉크가 악보지에 스며드는 순간 시스템이 붉은 경고선을 띄웠다.

[속도 과다]
[현재 악보지 내구도 부족]
[변환 대상 설정 필요]

“화살.”

하진이 중얼거렸다.

루카스가 멈칫했다.

“뭐가?”

“이 선율은 불덩이가 아니야. 터지는 순간 끝나면 의미가 없지. 음 하나하나를 화살촉으로 바꿔야 해. 첫 음이 길을 열고 다음 음이 같은 상처를 넓히는 방식으로.”

그는 오른손 아르페지오의 음들을 짧은 궤도선으로 쪼갰다.

선율은 하나였다. 그러나 발사점은 여럿이었다. 위로 치솟는 음은 사선으로 뻗고 내려찍는 음은 상대 공명장의 빈틈을 향해 접혔다.

[저위 공명 변환 후보: 에테르 화살]
[적합도: 47퍼센트]

“낮아.”

하진은 두 번째 줄을 찢었다.

루카스는 찢어진 악보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밤은 빠르게 깊어졌다.

첫 번째 시도는 공명석을 금가게 했다. 두 번째 시도는 악보지 가장자리를 태웠다. 세 번째 시도는 화살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은색 먼지로 흩어졌다.

하진은 멈추지 않았다.

월광의 질주를 원곡 그대로 옮길 수는 없었다. 이세계 에테르는 지나치게 빠른 반음 이동을 칼날처럼 받아들였다. 조금만 틀어지면 화살은 상대가 아니라 악보 자체를 찢는다.

그래서 그는 보정했다.

상행 아르페지오 사이에 숨 쉴 수 있는 아주 짧은 무음을 끼워 넣었다. 하행 선율에는 대기 에테르가 따라붙을 수 있도록 미세한 지연 기호를 붙였다. 겉으로는 폭주처럼 들리지만 안쪽에서는 정확한 계단을 밟는 구조였다.

[적합도: 62퍼센트]

“더.”

네 번째 장.

[적합도: 71퍼센트]

“더.”

다섯 번째 장에서 은색 잉크가 푸르게 식었다.

[적합도: 83퍼센트]
[저위 공명 변환 슬롯에 등록하시겠습니까?]

하진은 손을 멈췄다.

등록하면 되돌리기 어렵다. 슬롯은 하나뿐이다. 내일 정오까지 다른 해답을 얻을 시간도 없다.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진. 진짜 괜찮아?”

하진은 피곤한 눈으로 악보를 내려다보았다.

강하진은 늘 다른 사람의 이름 뒤에 숨어 곡을 썼다. 박수는 무대 위의 누군가에게 갔고 돈은 회사가 가져갔고 완성된 음악은 광고 문구 아래에 묻혔다.

이번에는 다르다.

자신의 악보가 자신의 이름으로 울린다.

그것도 자신을 짓누르려는 무대 위에서.

“괜찮냐고 묻지 마.”

하진은 등록 확인선을 눌렀다.

[저위 공명 변환 슬롯 등록 완료]
[등록명: 월광식 속사 아르페지오]
[변환 현상: 에테르 화살]
[주의: 안정 시간 3.2초]

“이길 거냐고 물어.”

루카스는 멍한 얼굴로 하진을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길 거야?”

하진은 마지막 마디를 손끝으로 튕겼다.

기숙사 방의 공기가 얇게 갈라졌다. 은색 선 하나가 악보 위에서 튀어 올라 벽을 향해 날아갔다.

화살은 벽에 닿기 직전 사라졌다.

그러나 벽에 걸린 낡은 시간표에는 바늘로 뚫은 듯한 작은 구멍이 남았다.

루카스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하진은 새 악보 상단에 제목을 적었다.

<월광식 속사 아르페지오 제1초안>

창밖으로 아카데미의 결투장이 보였다.

내일 정오.

화염으로 윽박지르는 수석 학생 앞에서 이 세계는 처음으로 음표가 화살이 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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