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천재 식물학자

3화: 천년 신목의 비명과 뿌리 썩음
실비아 폰 시엘이 내민 잎은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로완은 잎자루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천천히 눌렀다. 바싹 말라야 할 검은 부분이 물을 먹은 천처럼 푹 꺼졌다.
“물을 얼마나 줬습니까?”
실비아의 가느다란 눈썹이 움직였다.
“수호 신목은 물을 주지 않아도 결계에서 마나를 얻는다. 정화 의식 때마다 이슬이 조금씩 내릴 뿐이지.”
“그 이슬이 뿌리까지 고이면 물이 됩니다.”
로완은 잎자루 끝에 코를 가까이 댔다. 오래된 지하실 바닥에서 맡던 냄새가 났다. 공기가 끊긴 물. 썩은 유기물. 그리고 뿌리가 죽을 때만 올라오는 시큼한 냄새.
실비아가 낮게 물었다.
“마나 부족은 아닌가?”
“잎끝이 마른 것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검은 반점이 잎맥을 따라 번졌고 잎자루가 물러졌습니다. 뿌리가 제 기능을 못 할 때 나오는 증상입니다.”
“뿌리라…….”
“현장을 봐야 확실합니다. 잎 한 장으로 신목의 병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로완은 잘라 말했지만 손에서 잎을 놓지 못했다. 수호 신목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거목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아카데미의 한복판에서 천 년 동안 결계를 버텨 온 나무라면 뿌리 하나의 상태가 수천 명의 안전과 이어져 있을 수 있었다.
실비아는 잠시 로완의 얼굴을 바라봤다. 심사 광장에서 모든 교수 앞에 섰을 때도 흔들리지 않던 엘프 부교수의 눈빛이 지금은 유난히 지쳐 있었다.
“수호 신목은 아카데미 결계의 심장이다. 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뒤로 북쪽 결계가 밤마다 흔들렸다. 관리국은 마나를 더 흘려 넣자고 했고 나는 정화 의식을 늘렸다.”
그녀가 검게 마른 잎을 내려다봤다.
“그런데도 잎은 매일 더 떨어진다.”
로완은 대답 대신 한스를 찾았다. 한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엿듣고 있었다. 펠릭스의 심사가 끝난 뒤에도 로완 곁을 떠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한스. 삽이랑 깨끗한 천을 챙겨. 작은 숯가루도 있으면 좋고.”
“신목 정원에 들어가는 거야?”
“그래. 흙을 봐야 해.”
실비아는 로완의 준비를 막지 않았다.
“따라오게. 다만 정원에는 관리 마법사들이 있다. 그들은 조수의 말을 반기지 않을 거다.”
“식물이 계급을 따집니까?”
로완의 대답에 실비아의 입가가 아주 잠깐 풀렸다.
수호 신목 정원은 아카데미 북쪽 탑 뒤에 숨듯 자리하고 있었다.
철문을 지나자 공기가 달라졌다. 바깥의 늦은 봄 햇빛은 따뜻했지만 정원 안에는 비가 갠 뒤처럼 축축한 냉기가 깔려 있었다. 흰 돌바닥에는 복잡한 결계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문양 틈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정원 중앙에 선 신목은 거대했다.
은회색 줄기는 다섯 사람이 팔을 벌려도 감싸지 못할 만큼 굵었다. 높은 곳에서 넓게 퍼진 잎들은 햇빛을 받아 옅은 금빛을 내야 했지만 절반 가까이가 잿빛으로 처져 있었다. 바람이 한 번 스치자 검은 잎 몇 장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나무 아래에서는 푸른 로브의 마법사 네 명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빛 마나가 뿌리 쪽 돌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더 강하게 유지하십시오. 뿌리까지 정화가 닿아야 합니다.”
가장 앞에 선 중년 마법사가 외쳤다. 그는 실비아를 보고 고개를 숙이더니 로완에게 시선을 옮겼다.
“부교수님. 심사장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조수를 데려오셨습니까?”
“조수 로완은 식물 상태를 진단할 줄 안다. 잠시 손을 멈춰 주게.”
“정화 주술을 멈추라고요? 결계가 약해진 지금 이 나무에 필요한 것은 순수한 마나입니다.”
로완은 대꾸하지 않고 돌바닥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무릎을 꿇은 뒤 문양과 문양 사이에 고인 물을 손끝으로 훑었다. 물은 차가웠고 손가락에는 미끈한 녹갈색 막이 묻어났다.
그는 흙 냄새를 맡았다.
“멈춰야 합니다.”
중년 마법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감히.”
“정화 주술이 아니라 물을 붓고 있잖습니까. 여기 흙은 이미 숨이 막혔습니다.”
“수호 신목은 보통 식물이 아니다. 마나는 물과 다르다.”
“뿌리는 보통 식물과 같습니다. 산소가 없으면 호흡을 못 합니다.”
로완은 돌바닥 바로 옆의 작은 식재 구멍을 가리켰다. 거기서 솟은 이끼는 짙은 녹색이었고 표면은 지나치게 윤이 났다. 버섯균의 하얀 실이 돌 틈을 따라 번져 있었다.
“이끼가 이만큼 퍼졌다는 건 늘 젖어 있다는 뜻입니다. 버섯 냄새도 나고요. 뿌리목이 물에 잠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이 정원은 결계석으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다.”
“그래서 물이 못 빠집니다.”
말이 떨어진 순간 정원이 조용해졌다.
실비아의 시선이 돌바닥을 훑었다. 관리 마법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결계석으로 밀봉했다는 말은 자신들이 배수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고백과 다르지 않았다.
중년 마법사가 지팡이를 세게 짚었다.
“결계석은 신목을 외부 오염에서 지키기 위한 것이다. 조수 하나가 감히 천 년의 관리법을 부정하겠다는 건가?”
“관리법이 나무를 살리고 있으면 잎이 저렇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로완은 일어섰다.
“흙을 열어 봐야 합니다. 뿌리를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불허한다.”
“그럼 계속 물을 붓고 나무가 죽는 걸 보시죠.”
실비아가 두 사람 사이로 한 걸음 나왔다. 나뭇잎 무늬가 수놓인 로브 끝자락이 돌바닥의 물기를 스쳤다.
“에르단. 정화 주술을 멈추게.”
“부교수님!”
“수호 신목의 식물 관리 권한은 내게 있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겠다.”
에르단이라 불린 마법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실비아의 목소리에는 더는 망설임이 없었다. 푸른 빛이 하나씩 꺼지자 돌바닥 위의 물방울이 그대로 남았다. 신목은 곧바로 쓰러지지 않았다. 다만 축축한 정원 안에서 검은 잎 하나가 또 떨어졌다.
로완은 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삽.”
한스가 침을 삼키며 작은 삽을 건넸다.
“정말 파도 되는 거지?”
“겉뿌리는 건드리지 말고 돌 틈 쪽 흙만 걷어 내. 젖은 흙은 천 위에 놓아.”
두 사람은 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흙을 조심스럽게 파기 시작했다. 위쪽은 검은 부엽토처럼 보였지만 삽날이 한 뼘쯤 들어가자 탁한 물이 고였다. 삽을 빼낼 때마다 진흙이 질척한 소리를 냈다.
한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이 아래가 전부 물이야.”
“아직 더.”
로완은 손으로 진흙을 헤쳤다. 차가운 물속에서 가는 뿌리 하나가 걸렸다. 그는 뿌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겉은 검었다. 손가락으로 살짝 문지르자 껍질이 벗겨져 나갔고 안쪽의 실 같은 조직이 미끈하게 따라 나왔다.
“보십시오.”
로완이 뿌리를 에르단 앞에 내밀었다.
“건강한 뿌리는 단단하고 속이 크림색입니다. 이건 검게 무르고 껍질이 미끄러집니다. 뿌리 썩음입니다.”
에르단은 뿌리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마나 부족으로 잎이 말랐던 게 아닙니다. 물에 잠긴 뿌리가 산소를 못 받아 죽었습니다. 죽은 부위에 균이 붙었고 그 균이 위로 번진 겁니다.”
“그렇다면 더 위험하다.”
에르단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그는 검은 뿌리를 보며 지팡이를 들었다.
“오염이 뿌리에 퍼졌다면 신목의 감염 부위를 잘라 내야 한다. 최악이면 줄기째 베어 결계석을 보존해야 해.”
실비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신목을 베겠다고?”
“결계가 먼저입니다. 나무 하나 때문에 아카데미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나무 하나가 아닙니다.”
로완이 단호하게 끼어들었다.
“살아 있는 뿌리가 아직 남았습니다. 이 뿌리는 물러지지 않았고 은빛 맥도 살아 있습니다. 죽은 부분만 있다는 판단으로 줄기를 베면 회복할 조직까지 없애 버립니다.”
“조수가 결계 관리국의 판단을 뒤집겠다는 건가?”
“이 나무를 살릴 방법이 있는데도 베겠다는 판단은 식물 관리가 아닙니다.”
로완은 흙을 더 걷어 냈다. 검은 뿌리들 사이에서 손톱만 한 굵기의 뿌리 하나가 드러났다. 그것은 물러지지 않았고 표면에 옅은 은빛이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뿌리가 있다는 건 회복할 여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실비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손을 뻗었지만 뿌리에 닿기 직전 멈췄다.
“정말 살릴 수 있나?”
로완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병든 나무에 확답은 독이 될 때가 많았다.
“확실한 건 지금처럼 두면 죽는다는 겁니다. 배수부터 해야 합니다. 썩은 뿌리를 제거하고 상처 부위를 말린 뒤에 균을 막아야 해요.”
“무엇이 필요하지?”
“돌바닥 일부를 열어야 합니다.”
에르단이 헛웃음을 흘렸다.
“결계 문양을 깨겠다고? 그건 허가할 수 없다.”
“문양 자체를 깨자는 게 아닙니다. 물이 고이는 바깥 선을 따라 얕은 길만 만들 겁니다. 대지 룬으로 흐름을 옆으로 돌리면 결계의 중심선은 건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로완은 손가락으로 돌바닥의 낮은 지점을 짚었다. 물방울들이 그곳으로 모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담장 밖 배수구까지 한 줄이면 됩니다. 뿌리 주위의 물을 빼지 못하면 어떤 정화 주술도 소용없습니다.”
에르단은 반박하려다 멈췄다. 그의 시선이 고인 물과 검은 뿌리를 오갔다.
실비아가 말했다.
“내 이름으로 허가한다. 로완의 지시대로 하게.”
그제야 한스가 숨을 내쉬었다.
“돌을 들어 낼게.”
“천천히. 흙이 무너지면 살아 있는 뿌리도 끊깁니다.”
로완은 한스와 함께 돌 세 장을 조심스럽게 들어 냈다. 그 아래에는 예상보다 더 많은 물이 고여 있었다. 탁한 물이 새로 열린 틈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정원에 갇혀 있던 부패 냄새가 더 짙게 올라왔다.
로완은 썩은 가는 뿌리만 가위로 잘라 냈다. 자른 자리에 숯가루와 참나무 재를 얇게 뿌렸다. 습기를 잡고 상처 주변을 말리는 응급 처치였다.
“마나를 넣지는 않습니까?”
실비아가 물었다.
“지금 필요한 건 마나가 아니라 숨 쉴 틈입니다. 물이 빠지고 살아 있는 뿌리가 버티면 그다음에 영양과 공생 균근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균근?”
“뿌리와 서로 돕는 작은 균입니다. 나무 혼자 못 끌어오는 물질을 가져다주고 대신 당을 받습니다. 하지만 먼저 이 진흙탕부터 끝내야 합니다.”
배수로의 물이 빠지며 바닥의 검은 진흙도 함께 밀려 나왔다.
그 속에서 딱, 하고 단단한 것이 삽날에 걸렸다.
한스가 몸을 굳혔다.
“로완. 이건 돌이 아닌데.”
로완은 진흙을 손으로 걷어 냈다.
손바닥 위에 올라온 것은 엄지손가락 두 마디만 한 은색 조각이었다. 자연석이 아니었다. 표면에는 물길을 막듯 맞물린 문양과 희미한 봉인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은색 조각의 뾰족한 끝은 신목의 뿌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물이 빠져야 할 방향을 정확히 가로막은 자리였다.
로완은 차가운 은빛을 내려다봤다.
이 정원에 물이 고인 것이 단순한 실수만은 아닐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