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꾼 객잔의 무림 상담소

2화: 문 앞의 약속
문짝이 다시 한 번 크게 울렸다.
"문 열어라. 정원표국 표사 하나가 이리로 달아들었다. 우리 짐을 훔친 놈이다."
연우진은 빗물이 고인 문턱 앞에 멈춰 섰다. 등잔불이 문창살에 비친 사내들의 그림자를 길게 흔들었다.
"부상당한 손님이 있습니다. 이 밤에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손님? 도둑놈을 손님이라 부르는 객잔도 있나."
평상 위의 진태수가 몸을 일으켰다. 막 감은 붕대 가장자리로 선홍빛 피가 다시 배어 나왔다. 그는 단도를 쥔 손을 이불 밑으로 감추려 했으나 손가락 끝의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우진은 손바닥을 들어 그를 말렸다.
"칼을 빼면 저들이 들어올 명분만 생깁니다. 어깨를 움직이면 묶어 둔 상처도 다시 벌어집니다."
문밖 사내가 헛웃음을 흘렸다.
"명분을 논할 처지냐? 궤짝만 내놓으면 다치지 않고 지나가게 해 주지."
우진은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문틈으로 스며든 냄새를 천천히 가늠했다.
젖은 가죽 냄새 아래로 끈적한 송진 기름 향이 났다. 그 뒤에는 붉은 이끼를 태울 때 남는 쓴내가 옅게 붙어 있었다. 문밖 사내들의 기침 소리와 충혈된 눈가까지 확인한다면 훈증재 곁에 오래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저들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다.
"짐의 주인이라면 표국 인장이나 위탁 문서를 보여 주십시오. 손님을 데려가려면 적어도 그 정도는 필요합니다."
잠시 빗소리만 객잔을 채웠다.
"우릴 시험하는 거냐?"
"아닙니다. 제 지붕 아래에서 사람을 내보내는 데 필요한 절차입니다."
매화가 부엌 문가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구석의 백서린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검자루 위에 손을 올렸다.
문밖의 우두머리가 낮게 기침했다. 짧았지만 끝이 갈라진 기침이었다.
우진은 말했다.
"진 표사님을 지금 비에 데리고 나가면 상처보다 기혈 경색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손발이 굳은 채 말을 타면 어깨가 다시 찢어질 겁니다. 그분이 숨을 잃으면 책임은 누가 집니까."
"아는 척하지 마라."
목소리는 거칠었으나 곧 다른 사내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처럼 거칠게 들이마신 뒤 연달아 두 번 기침하는 소리였다.
우진은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말을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날이 밝으면 관도 순찰대나 표국 사람을 데려오십시오. 그 앞에서 궤짝과 손님을 확인하면 됩니다."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 사이 숨이 답답해져도 찬물을 들이켜지는 마십시오. 화로에 쑥을 조금 태우고 젖은 도포부터 말리는 편이 낫습니다."
문밖에서 욕설이 터졌다.
쾅!
발길질이 문짝을 세게 걷어찼다. 매화가 움찔하며 약초 보관함 쪽으로 달려갔다.
"주인장, 문이 버틸까요?"
"버텨야지요."
우진은 담담하게 답했지만 손끝은 차가웠다. 문 하나를 지키는 일인데도 그가 가진 것은 말과 낡은 나무 빗장뿐이었다.
그때 문틈 아래로 작은 불빛이 굴러 들어왔다.
기름 먹인 심지였다.
매화가 비명을 삼키며 젖은 담요를 집어 들었다. 우진은 먼저 약초 보관함을 발로 밀어 벽 쪽으로 옮겼다. 심지가 짚멍석에 닿자 매화가 담요를 덮어 불을 껐다.
문이 반 뼘쯤 벌어졌다.
그 틈으로 검은 도포의 팔이 횃불을 밀어 넣으려 했다.
챙.
구석의 등잔불이 한 번 흔들렸다.
백서린의 검이 문틈을 스쳤다. 횃불의 나무 자루가 매끈하게 잘려 빗물 웅덩이로 떨어졌다. 불씨는 지지직 소리를 내며 꺼졌다.
서린은 문 앞에 서서 검끝을 낮게 내렸다.
"다음 것은 손목이다."
문밖이 조용해졌다.
우진은 서린의 옆모습을 보았다. 회색 도포의 소매 끝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우진은 그녀가 이곳에 왜 와 있는지 몰랐으나 방금 잘린 횃불 아래에는 손목 대신 빗물만 남아 있었다.
"객잔 안에서 칼을 쓰게 만들지 마십시오."
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들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불을 들이밀고 부상자를 끌고 가려는 일에는 협조할 수 없습니다."
우두머리가 낮게 웃었다.
"우린 종이만 찾는다. 붉은 도장 찍힌 종이. 그걸 내놓으면 표사도 객잔도 귀찮게 하지 않겠다."
진태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우진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말을 관도 순찰대 앞에서도 하실 수 있습니까?"
대답 대신 빗속에서 말고삐 당기는 소리가 났다.
"해 뜨기 전까지다. 그때도 문을 닫고 있으면 이 객잔은 손님을 숨긴 값을 치르게 될 거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객잔 앞을 벗어난 자들이 가까운 어딘가에 머문다는 기척이 비와 함께 남았다.
매화가 꺼진 심지를 발끝으로 밀어냈다.
"종이라니요. 약초 궤짝이라면서요."
진태수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단도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나도 몰랐소. 위탁받을 때는 분명 보약 재료라 했소. 하지만 봉인을 확인하라는 말은 듣지 못했지."
우진은 그 앞에 따뜻한 물을 놓았다.
"모른 채 운반한 일과 알고도 사람을 해친 일은 다릅니다. 다만 지금부터는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진태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 궤짝을 열면 당신도 엮일 수 있소."
"열지 않고 숨겨 두는 쪽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손님께서 먼저 결정하십시오. 다만 무엇을 결정하시든 상처를 치료할 시간은 지켜 드리겠습니다."
진태수는 궤짝의 젖은 끈을 천천히 풀었다.
"한 번만 보시오. 전부 꺼내 놓지는 않겠소."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의 손님 장부는 사연을 캐묻는 장부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목숨이 종잇장 아래에 깔려 있다면 눈을 감는 것 또한 중립은 아니었다.
"그 전에 손을 씻겠습니다."
우진은 작은 대야를 끌어와 따뜻한 물을 부었다. 진태수의 오른손을 물 위에 얹자 검푸른 손톱 밑에서 옅은 붉은 물이 번졌다. 피가 아니라 손가락 마디에 남아 있던 가루였다.
진태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닿기만 해도 살이 타는 줄 알았소. 마차 안에서는 장갑을 껴도 손끝이 저렸지."
"지금은 씻어 낸다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오늘 밤은 술도 진한 차도 드시지 마십시오. 심장이 빨라지면 손끝 저림이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우진은 씻은 손을 마른 천으로 감쌌다. 백초분을 상처에 쓸 때와 달리 붉은 이끼 흔적에는 함부로 약을 얹지 않았다. 무엇이 섞였는지 모르는 가루에 여러 약재를 겹치면 원인도 반응도 더 흐려질 수 있었다.
매화가 대야를 받아 들며 물었다.
"그럼 아무것도 못 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숨이 가빠지는지 보고 손발이 차가워지면 바로 알려 주세요.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면 됩니다."
매화는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다는 말 대신 대야를 부엌으로 옮기는 손이 한층 빨라졌다.
진태수는 천에 감긴 손을 내려다보았다.
"표두님도 이 냄새를 맡았을까. 그래서 물레재에서 길을 바꾸자고 했던 건가."
"그분이 왜 그랬는지는 찾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우진은 궤짝의 잠금쇠를 가리켰다.
"하지만 표사님은 오늘 밤 혼자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보이는 것만 확인하고 나머지는 날이 밝은 뒤 증인이 있는 곳에서 정합시다."
진태수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바깥에서 누군가 젖은 돌을 밟는 소리가 한 번 났다가 끊겼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깨 상처가 당겼는지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번에는 단도를 찾지 않았다.
뚜껑이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렸다. 말린 황기와 천궁 꾸러미가 위에 얹혀 있었다. 우진은 약재의 빛깔이 지나치게 새것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산길을 오래 건넌 짐치고 흙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진태수가 약재 꾸러미 하나를 옆으로 밀었다.
그 아래에서 기름 먹인 종이 모서리가 드러났다. 붉은 인장이 반쯤 찍혀 있었다.
매화가 숨을 삼켰다.
"저건 빚문서 같은데요. 시장에서 본 것하고 모양이 비슷해요."
"비슷해 보일 뿐이야."
우진은 조용히 말했다.
"글과 인장을 확인하기 전에는 단정하면 안 됩니다."
진태수는 급히 뚜껑을 닫았다. 이마의 식은땀이 붕대 끝에 떨어졌다.
"물레재를 넘기 전 표두님이 이상한 말을 했소. 약초 냄새보다 먹 냄새를 조심하라고. 그날 밤 습격이 시작됐고 동료들은 비탈 아래로 흩어졌소."
우진은 물레재라는 지명을 마음속에 새겼다.
"동료들이 살아 있다면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표사님은 아직 움직일 수 없습니다. 어깨를 다시 쓰면 피가 멎지 않을 겁니다. 우선 출발지와 동행한 분들의 이름을 적어 주십시오. 기억나는 만큼이면 됩니다."
진태수는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었다. 첫 획이 종이 위에서 비뚤어졌다. 매화가 말없이 벼루를 가까이 밀어 주었다.
서린은 검을 칼집에 넣었다.
"내가 새벽까지 바깥을 보겠다. 저들은 물러난 게 아니다."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빚이 되겠군요."
"아직 아니다."
서린은 짧게 답하고 문가로 향했다. 매화는 부엌 화로에 쑥 한 줌을 얹었다. 향긋하면서도 쌉싸래한 연기가 객잔 안에 천천히 퍼졌다.
우진은 문빗장을 한 번 더 살폈다. 문턱 바로 바깥에 붉은 이끼 가루가 얇게 번져 있었다.
빗물이 쓸어 가는 자리에서도 그 가루만은 이상할 만큼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