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꾼 객잔의 무림 상담소

3화: 손님의 규칙
새벽비가 잦아들자 솔개골 어귀에 짙은 물안개가 깔렸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만이 고요한 객잔 안을 울렸다. 등잔불의 기름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어 심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연우진은 평상 옆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진태수가 떨리는 손으로 눌러쓴 먹글씨는 비뚤어져 있었지만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정원표국 삼조 소속 표두 한대석, 표사 조원길, 장상필……."
우진이 낮은 목소리로 적힌 이름들을 읊었다.
평상에 기댄 진태수가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열을 내렸음에도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어깨 붕대에는 옅은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물레재 고갯길에서 기습을 받았을 때 표두님이 소리쳤소. 궤짝 하나라도 관도 밖으로 빼내야 한다고. 그러고는 홀로 칼을 뽑고 뒤를 막았지."
진태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른 동료들이 살아남았는지는 나도 알지 못하오.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지며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피 냄새뿐이었소."
우진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 품속에 넣었다.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니 찾을 길도 있을 겁니다. 살아 있는 자가 먼저 숨을 고르고 힘을 차려야 사람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진은 말린 당귀와 감초를 빻은 약통을 열어 따뜻한 물에 풀었다. 은은한 단내가 찻잔을 타고 피어올랐다.
"이걸 천천히 비우십시오. 기혈을 안정시키고 뱃속을 덥혀 줄 겁니다."
진태수는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며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칼 한 자루 쥐지 못하는 마른 체격의 객잔 주인이었지만 그가 내미는 찻잔에는 흔들리지 않는 무게가 있었다.
그때 객잔 창가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인장…… 저기 좀 봐요."
소매화가 창살 틈에 이마를 대고 바깥을 내다보며 파랗게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진이 다가가 문틈 너머를 살폈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검은 도포를 두른 사내 넷이 청운객잔 앞마당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그들의 삿갓 아래로 번뜩이는 눈빛이 객잔 현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밤새 툇마루 바깥에서 기척을 숨기던 자들이었다. 동이 트고 사위가 밝아오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쿵, 쿵.
묵직한 가죽 장화가 젖은 툇마루를 딛는 소리가 객잔 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쾅!
거친 손길이 객잔 문을 홑겹으로 밀어젖혔다. 차가운 새벽바람과 함께 눅눅한 비 냄새가 들이닥쳤다.
"약조한 시간이 되었다."
맨 앞에 선 사내가 삿갓을 젖히며 문턱을 넘어섰다. 뺨에 깊은 흉터가 파인 사내였다. 그의 등 뒤에는 세 명의 무인이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위압적인 기세를 뿜어냈다.
흉터 사내의 시선이 평상 위에 누운 진태수와 그 곁의 나무 궤짝에 가닿았다.
"얌전히 짐을 넘기고 도둑놈을 내놓아라. 그러면 이 객잔의 기물은 손대지 않겠다."
매화가 숨을 들이켜며 우진의 등 뒤로 숨었다.
진태수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상처 입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억눌린 신음과 함께 비틀거렸다.
우진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이나 공포의 기색이 없었다.
"이곳은 관도의 길손들이 묵어가는 청운객잔입니다. 손님의 짐과 신병을 무단으로 빼앗아갈 권리는 뉘게도 없습니다."
흉터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객잔 주인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찾으러 온 것은 우리 상단의 귀중한 물품이다. 도둑을 감싸는 객잔은 관아에 고발해도 할 말이 없을 텐데?"
"정당한 상단의 물품이라면 위탁 표문이나 관아의 공증 인장을 보여 주십시오. 그것이 없다면 강호의 무뢰배가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진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으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흉터 사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네놈이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말장난이 아닙니다. 객잔의 법도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날이 밝았으니 관도의 순찰대나 표국의 정식 장로를 불러오십시오. 공적인 입회하에 사실을 가리면 될 일입니다."
우진의 단호한 태도에 사내들 사이에 순간적인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관아나 표국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미세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우진은 그들의 사소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사내들의 손목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헐렁한 도포 깃 사이로 마른기침이 새어 나왔다. 눈가에는 핏발이 서 있었으며 도포 자락에서는 젖은 흙 냄새 사이로 떫고 쓴 향이 은근히 풍겼다.
'붉은 이끼의 훈증 가루를 오래 다룬 자들의 전형적인 징후.'
우진의 머릿속에서 스승에게 배웠던 독초와 약재의 성질이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저들은 정당한 상단의 호위 무사가 아니었다. 금지된 독초나 비밀 약재를 다루며 그 독기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파의 하수인들이었다.
"상단의 물건을 호송하는 분들이라 하기에는 호흡이 지나치게 거칠군요. 흉부에 열이 차고 손끝이 저려오지 않으십니까?"
우진이 사내의 손목을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흉터 사내가 흠칫 놀라며 손을 뒤로 감추었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독성이 강한 훈증재를 환기 없는 밀실에서 오래 다루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지금 무기를 휘두르면 체내에 잠든 화독이 혈도를 타고 역류할 텐데요."
우진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사내 둘이 당황한 기색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겪고 있던 은밀한 신체적 고통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약점이 드러나자 흉터 사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시건방진 약초꾼 놈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채앵!
흉터 사내가 허리춤에서 시퍼런 도를 뽑아 들었다. 살기가 뿜어져 나오며 객잔 내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궤짝을 뒤지고 방해하는 놈은 모조리 베어 버려라!"
사내 셋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객잔 안으로 들이닥쳤다.
"주인장, 피해!"
진태수가 단도를 들고 소리쳤다.
그러나 우진은 피하지 않았다. 그가 뒤로 물러서면 곧바로 진태수와 매화가 칼날에 노출될 터였다.
흉터 사내의 도가 우진의 어깨를 향해 매섭게 내리쳐졌다.
파아앗!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객잔 구석에서부터 번개처럼 쏘아져 들어왔다.
챙! 콰아앙!
귀를 찢는 쇳소리와 함께 흉터 사내의 도가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사내의 손아귀가 찢어지며 핏물이 튀었다. 도가 객잔 대들보에 깊숙이 박히며 부르르 떨렸다.
"크악!"
흉터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어느새 우진의 앞을 가로막고 선 자가 있었다.
회색 도포를 걸치고 낮게 묶은 검은 머리를 휘날리는 여인, 백서린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은 칼집에서 반 뼘가량만 뽑혀 있었으나 그 서슬 퍼런 칼날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검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 누구냐!"
뒤따르던 사내들이 멈칫하며 검을 겨누었다.
서린의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은 한 냥."
서린이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뭐라고?"
"내가 이 객잔에 하룻밤 방값과 찻값으로 치른 돈이다."
서린은 칼집을 가볍게 쥔 채 사내들을 차갑게 훑어보았다.
"값을 치른 손님은 날이 밝아 온전히 떠날 때까지 편안히 쉴 권리가 있다. 객잔 주인이 정한 규칙이지."
서린의 검끝이 흉터 사내의 목덜미를 정확히 겨누었다.
"그리고 나는 돈값을 하지 못하는 소란을 매우 싫어한다. 얌전히 물러나라. 다음에는 칼등이 아니라 칼날이 목을 스칠 테니."
흉터 사내는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부여잡고 서린을 노려보았다. 방금 전 찰나의 순간 검을 쳐내고 자신의 손목을 꺾어버린 솜씨는 일류 고수의 그것이었다.
"네년은 이 일에 상관없는 자다! 공연히 강호의 은원에 끼어들면 목숨이 온전치 못할 것이다!"
사내가 악을 썼으나 서린의 표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상관이 없다? 방금 말했을 텐데. 나는 이 객잔의 손님이다. 손님이 쉬는 지붕 아래로 칼을 들이민 자는 누구든 내 검의 상대다."
서린이 검을 완전히 뽑아 들었다.
스르릉 하는 맑은 마찰음과 함께 뿜어져 나온 서슬 퍼런 검광이 객잔 바닥을 서늘하게 물들였다.
사내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여인의 기세는 숫자로 밀어붙여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때마침 멀리 관도 너머에서 방울 소리가 짤랑거리며 들려왔다.
비가 그친 새벽길을 따라 이른 행상들과 관도의 순찰 마차가 솔개골 어귀를 지나가기 시작한 소리였다. 날이 완전히 밝아오고 있었다.
우진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관도의 순찰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상단의 정당한 호위라면 지금 관원들에게 이 궤짝의 소유권을 주장해 보시지요."
흉터 사내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낮의 관도 한복판에서 관원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눈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실력의 여검객이 버티고 있었다.
사내는 피가 흐르는 손을 쥐어짜며 이를 갈았다.
"청운객잔…… 연우진이라 했더냐."
사내의 눈에 독기가 가득 찼다.
"손님을 감싼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솔개골이 언제까지 평온할 줄 아느냐."
사내들은 대들보에 박힌 도를 뽑아 챙긴 뒤 썰물처럼 객잔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은 안개 낀 숲길 속으로 말을 몰아 빠르게 사라졌다.
객잔 안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문밖에서 불어오는 아침 바람이 객잔의 매캐한 기운을 씻어냈다.
"하아…… 살았다."
매화가 주저앉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태수는 벽에 기대어 안도의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서린은 검을 칼집에 갈무리했다. 맑은 소리와 함께 검이 칼집에 물려 들어가자 객잔 안을 짓누르던 살기도 씻은 듯 사라졌다.
우진은 서린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의 검이 아니었다면 큰 화를 입을 뻔했습니다."
서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찻상을 향해 걸어갔다.
"감사할 것 없다. 말했듯이 돈을 내고 산 평온을 지켰을 뿐이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우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부엌으로 다가갔다.
"식은 차는 향이 상합니다. 다시 따뜻하게 우려 드리지요."
우진은 새로 끓인 맑은 솔잎차를 들고 와 서린의 잔을 채웠다. 따스한 김이 오르며 은은한 향이 서린의 메마른 얼굴을 감쌌다.
서린은 찻잔을 받아 들며 우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칼 한 자루 쥐지 못하면서도 무장한 사내들의 칼끝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사내. 약초와 사람의 기혈을 짚어 상대의 억지를 무너뜨리던 기묘한 객잔 주인.
그녀의 마음에 단단히 둘러쳐져 있던 경계의 벽에 작은 틈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때 평상에서 진태수가 비틀거리며 내려왔다. 그는 우진과 서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장, 그리고 여협님. 두 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목숨을 잃고 짐도 빼앗겼을 것이오."
"일어나십시오 진 표사님. 상처가 덧납니다."
우진이 그를 부축하려 하자 진태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더는 숨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관아의 눈을 피하면서까지 이 궤짝을 노리는 이유를…… 이제는 확인해야겠습니다."
진태수의 눈빛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던 표사가 아닌 진실을 마주하려는 결단이 담겨 있었다.
진태수가 손을 뻗어 바닥에 놓인 나무 궤짝의 덮개를 잡았다.
"열어 주십시오. 이 안에 무엇이 들었기에 내 동료들이 피를 흘려야 했는지…… 주인장께서 직접 봐 주셨으면 합니다."
우진은 서린을 바라보았다. 서린 역시 찻잔을 내려놓고 궤짝으로 시선을 돌렸다.
솔개골의 아침 햇살이 창살을 뚫고 들어와 궤짝의 낡은 모서리를 비추기 시작했다.
비밀의 문이 마침내 열리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