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꾼 객잔의 무림 상담소

1화: 폭우 속의 손님
산골 어귀의 밤은 거친 물소리로 가득 찼다.
솔개골 산자락을 휘감고 내리는 억수 장대비는 청운객잔의 낡은 처마를 부술 듯 두드렸다. 창살 틈으로 스며든 차가운 산바람이 등잔불을 가늘게 흔들었으나 객잔 내부는 이상하리만큼 안온했다.
화로 위 작은 솥에서는 쑥과 말린 솔잎이 은근한 불길을 타고 익어 갔다. 풀향기와 흙 냄새가 섞인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나며 객잔 안의 눅눅한 습기를 가라앉혔다.
연우진은 조용히 무쇠 집게를 들어 찻잎을 덖었다.
햇볕에 그을린 마른 체격에 헐렁한 삼베 도포를 걸친 그는 무림인이라기보다 산골 약초꾼에 가까운 차림이었다. 손끝마다 깊게 밴 은은한 풀 냄새는 객잔 부엌에서 피어나는 약재 향과 구별되지 않았다.
"주인장, 오늘 비는 진짜 미친 것 같아요. 이 정도로 쏟아지면 산길 고개도 다 무너졌을 텐데요."
청운객잔의 점소이 소매화가 구멍 난 문창살 틈을 짚 뭉치로 막으며 혀를 찼다. 붉은 머리끈을 단단히 묶은 소년 같은 인상의 소녀는 연신 손통을 털어내며 툴툴거렸다.
"비가 거셀수록 뿌리가 깊은 약초는 단단해진단다. 산길이 막히면 손님도 쉬어 가기 마련이지."
우진이 단정한 존댓말로 나지막하게 응대했다. 그의 목소리는 거센 빗소리 사이에서도 맑고 은은하게 퍼져 들렸다.
"휴, 손님이 쉬어 가긴 커녕 개미 한 마리 안 보이는걸요."
매화가 투덜대며 객잔 구석 쪽을 힐끔 눈짓했다.
객잔 가장 어두운 구석 자리. 주막 등잔불의 빛도 미치지 않는 그곳에는 아까부터 회색 도포를 눌러쓴 손님이 홀로 앉아 있었다.
낮게 묶은 검은 머리와 날카로운 턱선이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탁자 위에 검 한 자루를 얹어 둔 채 식어 가는 찻잔만 조용히 만지작거렸다. 객잔에 들어온 지 두 시간이 지나도록 술도 고기도 청하지 않고 오직 맹물 차만 세 잔째 비우는 이상한 객이었다.
우진은 여인을 향해 굳이 시선을 길게 두지 않았다. 청운객잔을 찾아오는 이들 중 절반은 말할 수 없는 사연을 품고 산길을 넘어온 자들이었다. 무언가를 강요하여 묻지 않는 것 또한 이 객잔의 오래된 묵계였다.
바로 그때였다.
쿠근!
솔개골 골짜기를 울리는 벼락 소리와 함께 객잔의 낡은 출입문이 쾅 소리를 내며 밖으로 젖혀졌다.
"으윽!"
거친 비바람과 함께 묵직한 물체가 문턱을 넘어 짚멍석 위로 엎어졌다.
"엄마야!"
매화가 깜짝 놀라 짚 뭉치를 떨어뜨리며 뒷걸음질 쳤다.
문턱에 쓰러진 것은 거친 삼베 가죽 옷을 입은 삼십 대 중반의 사내였다. 사내의 등 뒤에는 길쭉한 궤짝이 끈으로 묶여 있었고 온몸은 피와 진흙범벅이었다.
"도, 도와…… 쿨럭!"
사내가 핏덩이를 쏟아내며 우진의 도포 자락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의 왼쪽 어깨에서 팔꿈치까지는 날카로운 도검에 길게 찢겨 붉은 피가 샘솟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회색 도포의 여인이 잔을 멈추고 칠흑 같은 눈동자로 문가를 향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손가락이 탁자 위 검자루를 살그머니 눌렀다.
우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문턱으로 다가갔다. 그는 쓰러진 사내의 목덜미와 허벅지를 빠르게 받쳐 들고 평상 위로 옮겼다.
"매화야, 더운물과 깨끗한 천을 가져오렴. 다락에서 말린 백초분과 삼베 띠도 챙기고."
"예, 예! 지금 가져올게요!"
매화가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갔다.
우진은 평상에 누운 사내의 상처를 유심히 살폈다. 도검에 베인 자국은 깊었지만 다행히 뼈나 큰 혈관을 비켜갔다. 정작 문제는 상처 자체가 아니었다.
사내의 호흡은 지나치게 가빴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단단하게 얼어붙은 듯 떨리고 있었다.
우진이 사내의 손목을 짚었다. 손가락 끝으로 전달되는 맥동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단순한 출혈이나 무력 행사로 인한 파동이 아니었다. 극심한 공포와 함께 체내의 기혈이 어지럽게 꼬여 있었다.
"내공을 억지로 끌어올려 달렸군요. 숨을 깊이 쉬세요. 지금 기운을 통제하려 들면 상처에서 피가 더 터집니다."
우진이 나지막하게 말하며 사내의 가슴팍 중앙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으…… 윽!"
사내가 거친 숨을 내쉬며 눈을 부릅떴다. 우진의 손끝에서 은근한 온기가 전해지자 꼬였던 숨통이 거짓말처럼 틔었다.
곧이어 매화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련 대야와 백색 가루가 담긴 사기그릇을 들고 달려왔다. 우진은 젖은 천으로 사내의 상처 주변 피딱지를 정갈하게 닦아냈다.
그리고 스승에게 배운 약초 가루인 백초분을 베인 자리에 두껍게 바르고 삼베 띠로 굳게 동여매었다. 백초분이 피와 닿자 츠르르 소리와 함께 진하게 떫은 풀 향이 퍼지며 출혈이 멎기 시작했다.
사내의 거친 호흡이 점차 안정되자 우진은 비로소 사내의 전신을 초초히 관찰했다.
우진의 눈길은 사내의 어깨 상처가 아닌 그의 오른손 손가락 끝과 손톱 틈새에 머물렀다. 사내의 손끝은 먹물이라도 든 것처럼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으며 희미하게 쓴 향이 감돌았다.
'산초와 붉은 이끼의 냄새.'
우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약초꾼이었던 스승 구노인 밑에서 십 년 넘게 약재를 만져 온 우진에게는 소위 '초목문진'이라 부르는 특별한 감각이 있었다. 약초의 향과 빛깔 그리고 사람의 체취와 맥동을 연결해 상대가 무엇을 만졌고 어떤 상태에 처했는지 추론하는 능력이었다.
사내의 옷에 밴 냄새는 단순히 산길을 구르며 묻은 풀 향이 아니었다. 솔개골 깊은 갱도나 사파의 비밀 약재 창고에서 독초를 말릴 때 피우는 특유의 훈증 냄새였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우진이 따뜻한 물로 손을 씻으며 물었다.
사내는 평상에 누운 채 멍한 눈으로 객잔 천장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신의 등 뒤를 더듬었다. 묶여 있던 길쭉한 궤짝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 고맙소, 주인장. 살았구려."
사내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는 표국 무인들이 쓰는 단단한 가죽 토시를 차고 있었다.
"표사분이신가 봅니다."
우진의 물음에 사내는 주춤하며 입을 다물었다.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강호에서 낯선 이에게 자신의 신분과 호송품에 대해 입을 여는 것은 금기였다.
우진은 사내의 경계심을 해소하려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부엌으로 걸어가 작은 찻잔에 주전자 물을 따랐다. 찻잔에서는 맑고 옅은 찻물이 김을 올렸다.
"저희 청운객잔에는 오래된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우진이 차를 내밀며 사내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 차는 '무언차'라고 부릅니다. 마시는 동안에는 누구도 손님에게 이름이나 사연을 묻지 않습니다. 질문에 답할 필요도 없고 그저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편히 쉬시면 됩니다."
사내는 우진이 건넨 찻잔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따뜻한 찻잔의 온기가 빗물로 차갑게 식어 있던 손바닥을 감싸 안았다.
찻물을 한 모금 머금자 혀 끝에 남는 알싸하면서도 은은한 단맛이 가슴속 맺힌 응어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표사는 나전처럼 얼어붙어 있던 어깨를 스르륵 내렸다.
"주인장…… 미안하오. 내 신분을 속이려 한 것은 아니었소. 나는 정원표국 소속의 표사 진태수라고 합니다."
차를 비운 사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진 표사님."
"관도를 따라 북쪽으로 향하던 중이었소. 분명 무해한 약재 상단의 물품이라 들었는데 산길을 접어들자마자 정체불명의 자객들이 습격해 왔소. 함께 가던 표두님과 동료들은 모두 흩어지고 나 혼자 궤짝 하나를 들고 도망친 것이오."
진태수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우진은 진태수의 손가락 끝을 조용히 가리켰다.
"표사님, 습격자들을 탓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쭙지요. 그 궤짝을 운반하기 시작한 날부터 손끝에 가려움증이나 통증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진태수가 흠칫하며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그걸 어떻게 아시오? 며칠 전부터 손가락 마디가 쑤시고 쓴 냄새가 차올랐소만 그저 약재 상자에서 새어 나온 냄새라 생각했소."
"그것을 만지거나 근처에서 오래 호흡하면 처음에는 내공이 활성화되는 듯 느껴지지만 결국 기혈이 꼬이고 판단력이 둔해집니다. 표사님의 동료들이 습격에 쉽게 무너진 것도 무공 부족 때문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진태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렇다면 내가 옮기던 짐이 단순한 상단의 물품이 아니었단 말이오?"
"그 짐이 무엇이며 배후에 누가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사파에서나 쓰일 법한 약재 훈증재가 표국 마차에 실렸다는 것은 표사님이 알지 못하는 위험에 이미 깊이 얽혔음을 뜻합니다."
우진의 말에 객잔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회색 도포의 여인 백서린의 눈동자가 깊게 빛났다. 그녀는 우진이 '붉은 이끼 훈증재'를 언급했을 때 손가락을 찌르르 떨었다. 그녀가 쫓던 행방불명된 오라비의 마지막 편지에도 그 약재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태수는 떨리는 손으로 궤짝을 그러안았다.
"이 안에 대체 무엇이 들어 있기에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인지……."
"질문의 답은 손님이 스스로 찾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청운객잔의 지붕 아래에 계시는 동안은 안전할 것입니다."
우진이 찻잔을 거두며 단단하게 덧붙였다.
"이곳은 강호의 문파도 상단의 영지도 아닌 그저 쉬어 가는 객잔이니까요."
그 순간이었다.
바깥의 거센 빗소리를 찢고 둔탁한 말발굽 소리가 객잔을 향해 빠르게 접근해 왔다.
히히힝!
사나운 말 울음소리와 함께 빗물 젖은 가죽 장화 발자국 소리가 객잔 툇마루를 쾅쾅 울렸다.
"주인장! 문 열어!"
거친 고함과 함께 문짝이 무너질 듯 크게 흔들렸다. 문창살 너머로 칠흑 같은 도포를 입은 무인 대여섯 명의 검은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진태수가 비명을 지르듯 흠칫하며 품속의 단도를 빼 들었다. 백서린 또한 탁자 밑에서 검자루를 잡고 몸을 조용히 일으켰다.
우진은 표사에게 조용히 손짓해 안심시킨 뒤 헐렁한 도포 자락을 정리하며 단정한 걸음으로 굳게 닫힌 문가를 향해 걸어갔다.
솔개골의 폭우는 더욱 거세게 객잔 지붕을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