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5화: 검은 영혼의 호위
열두 번째 촛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카일은 제단 앞에 놓인 장부를 덮으며 골짜기 위쪽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시선이 따라붙었다. 짐승이라면 발소리를 숨기지 못했을 터였다. 사람이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 숨을 죽일 이유가 있었다.
―먹을까.
‘배고프다고 다 먹는 버릇부터 고쳐.’
카일이 의자에서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차가운 칼날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움직이지 마.”
낮고 메마른 여자 목소리였다. 달빛을 가린 그림자 아래로 붉은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키가 컸고 오래 쥔 대검의 손잡이에는 손바닥 모양의 굳은살이 깊었다. 왼쪽 뺨의 흉터가 말없이 사람을 밀어냈다.
카일은 목을 젖히지 않았다. 칼날이 조금만 더 파고들면 끝이었다.
“주민들은 깨우지 마십시오.”
“목숨부터 구걸하지 않는군.”
“저 사람들이 당신을 보면 소리를 지를 테니 말한 겁니다. 그러면 피곤해져요.”
여자는 짧게 코웃음 쳤다. 그녀의 다른 손에는 누렇게 바랜 수배 전단이 들려 있었다. 그림 속 얼굴은 지금보다 수염이 짧고 눈가가 덜 피곤했지만 카일이 아니라고 우길 수는 없었다.
“카일. 수도의 사형수.”
“그 명칭은 관청이 붙인 겁니다.”
“대귀족 세 명을 속이고 도망친 사기꾼.”
“그건 사실에 가깝군요.”
칼끝이 목 피부를 얕게 긁었다. 따뜻한 피가 옷깃으로 흘렀다.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지?”
“광산을 막고 장부를 쓰고 있습니다.”
“신 행세를 하며 사람들을 모으는군.”
“그것도 주민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저는 공물을 받지 않았고 못 한 일은 못 했다고 적었습니다.”
여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카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은 저를 죽이러 온 겁니까 아니면 제가 사람을 팔아먹는지 확인하러 온 겁니까?”
“둘 다다.”
“그럼 칼을 거두고 확인하십시오. 목을 베면 대답은 못 듣습니다.”
여자는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칼은 내리지 않았다.
“레오나다. 나는 약속을 확인한다.”
그녀는 제단 뒤에 세워 둔 납못 상자를 발끝으로 찼다. 상자가 기울며 송진 항아리가 땅에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에 마렌의 창고 창문에 불빛이 켜졌다.
“이 마을 사람 하나를 골라 죽일 수 있다. 네가 막을 수 있나?”
카일은 레오나의 검보다 멀리 떨어진 창고를 보았다. 안에서 로웨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그 시험은 값을 못 합니다.”
“겁나나?”
“당신이 저를 시험하려 주민 목숨을 걸겠다면 당신은 답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레오나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네가 정한다는 건가.”
“아닙니다. 주민들 앞에서 기록으로 정하죠.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와 내가 한 일을 모두 적고 판단하게 하면 됩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오나가 대검을 휘둘렀다.
쾅!
검격은 카일의 목이 아니라 갱도 입구에 박힌 납못을 잘랐다. 납못 세 개가 돌바닥 위로 튀었다. 송진으로 막아 둔 틈이 벌어지며 검은 안개가 뱀처럼 기어 나왔다.
“그럼 기록해 봐.” 레오나가 말했다. “사기꾼이 위기에서 무엇을 버리는지.”
검은 안개는 촛불 세 자루를 순식간에 꺼뜨렸다.
마렌과 로웨가 창고에서 뛰어나왔고 뒤이어 주민들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로웨는 납못이 끊긴 갱도 입구와 대검을 든 낯선 여자를 번갈아 보다가 곧바로 카일 앞으로 나섰다.
“카일 님, 다치셨습니까?”
“괜찮습니다.” 카일은 피 묻은 목을 손등으로 눌렀다. “모두 창고 뒤편으로 물러나세요. 로웨는 사람 수를 세고 마렌 씨는 장부를 가져오십시오.”
“저 여자는?”
“손님입니다. 아주 비싼 검증을 하러 온 손님이죠.”
레오나는 비웃지 않았다. 검은 안개가 발목을 훑자 그녀의 손가락이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이 안개가 평범한 연막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듯했다.
카일은 입구 앞으로 걸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멈추면 주민들의 시선이 먼저 무너진다.
―저 여자의 공포가 맛있다.
‘손대지 마.’
―네 목을 베려 했다.
‘그래도 산 사람이다.’
카일은 벌어진 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을 대자 검은 안개가 손목을 휘감았다. 차갑고 쓰린 기운이 혈관을 거슬러 올랐다. 파멸의 별이 기뻐하며 그것을 빨아들였다.
그 순간 그의 시야가 갈라졌다.
비에 젖은 산길이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용병들이 쓰러져 있었다. 대검을 든 젊은 레오나가 그들 사이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피 묻은 주머니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누군가가 멀리서 외쳤다.
‘살아남은 놈은 하나면 된다. 나머지는 입을 막아라.’
카일은 그 기억을 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별이 삼킨 음기와 레오나의 살기가 얽히며 환영은 그녀의 눈앞에도 새어 나갔다.
레오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만.”
카일은 손을 떼지 않았다. 틈에서 나온 안개는 아직 남아 있었다.
“동료들이군요.”
“입 닥쳐.”
“당신은 그들을 버린 게 아닙니다.” 카일은 고통으로 갈라진 숨을 골랐다. “누군가가 당신들 전부를 버렸고 당신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레오나의 검끝이 카일의 등을 향했다.
“네가 뭘 안다고.”
“모릅니다. 다만 알고 싶지도 않은 기억을 붙들고 사는 사람의 눈은 압니다.”
그 말에 레오나의 손이 멎었다. 주민들을 향한 검은 안개가 줄어들자 카일은 마지막 남은 기운까지 별에게 밀어 넣었다. 벽의 금빛 룬이 희미하게 빛났고 틈은 겨우 숨을 죽였다.
카일은 바닥에 한 손을 짚었다. 속이 비워진 것처럼 현기증이 났다.
레오나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 나를 죽이지 않았지?”
“칼이 없어서요.”
“그 힘으로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힘은 오염을 치우는 데 썼습니다. 사람을 치우는 데 쓰면 다음에는 나도 누군가에게 치워질 테니까.”
마렌이 장부를 들고 입구 가까이 다가왔다.
레오나는 수배 전단을 그의 발치에 던졌다. 종이가 바람에 펄럭이며 주민들 발앞까지 미끄러졌다. 로웨가 그것을 주워 카일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입니까?”
카일은 대답하기 전에 레오나를 보았다. 그녀가 지금 한마디만 하면 골짜기는 그를 떠나보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전단을 빼앗지 않았다.
“수도에서 사람들을 속인 적이 있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그 일로 죽을 뻔했고 지금도 쫓기고 있죠.”
주민들의 숨소리가 낮아졌다. 마렌은 전단을 접지 않은 채 장부의 빈 줄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여기서 한 일은 장부에 있습니다. 도안을 살려 냈고 베른을 데려왔으며 갱도를 막았습니다. 그 기록이 부족하다면 저를 쫓아내도 됩니다.”
“카일 님.” 로웨가 말했다.
“다만 레오나가 만든 틈은 먼저 막겠습니다. 그 다음에 판단하세요.”
마렌이 낡은 장부를 펼쳤다. 첫 장에는 보리 한 주머니와 베 천 두 장이 공동 재고로 들어온 날짜가 적혀 있었다. 다음 장에는 도안의 이름과 베른의 펜던트, 하부 갱도 폐쇄라는 글씨가 삐뚤빼뚤 이어졌다.
“이 종이는 거짓말을 막아 주지 않아.” 마렌이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누가 무엇을 가져가고 누구를 버렸는지는 남긴다.”
그는 카일을 향해 눈을 들었다.
“자네가 수도에서 무슨 짓을 했든 그 죗값을 우리가 없애 줄 수는 없네. 다만 이 골짜기에서 한 일까지 없는 일로 만들지는 않겠어.”
카일은 잠시 말을 잃었다. 사기꾼으로 살며 그가 기대한 것은 늘 두 가지였다. 돈을 내놓거나 문을 닫는 것.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따로 저울에 올려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로웨는 전단을 접어 장부 옆에 내려놓았다. 그 손은 여전히 경계하고 있었지만 카일 앞을 막아 섰던 자리에서는 물러나지 않았다.
마렌은 전단과 장부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레오나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우리를 속였나?”
레오나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안개에 젖은 대검이 달빛을 흘렸다.
“아니.”
한 글자가 골짜기 공기를 바꿨다.
레오나는 대검을 땅에 세우고 카일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는 사람을 값으로 바꾸는 자들을 많이 봤다. 내 동료들도 그런 자들에게 팔려 죽었다. 당신은 목에 칼이 닿은 때에도 주민부터 물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레오나 베일. 오늘부터 당신의 검이 되겠다.”
카일은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호위기사는 필요했다. 하지만 자신을 한 번 죽이려던 전직 S급 용병이 무릎 꿇는 광경은 계산표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레오나의 대검을 보다가 장부를 가리켰다.
“검이 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레오나가 고개를 들었다.
“내 명령이라도 주민을 겁주거나 죽이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누구든 위험하면 먼저 살리고 결과는 장부에 남깁니다.”
“명심하겠다.”
“그리고 지금 만든 틈은 당신이 막는 걸 도우세요. 납못을 다시 박을 사람도 필요하니까.”
레오나는 즉시 일어섰다. 그녀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웃음이라기보다 처음으로 받은 벌을 기꺼이 치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납못을 주워 들고 갱도 입구로 향했다. 그러다 절벽 쪽 땅을 살피며 멈췄다.
“카일.”
“왜죠?”
“내 발자국 말고도 두 줄이 더 있다. 수도식 군화다.”
카일의 손이 장부 위에서 굳었다.
레오나가 검자루를 쥐었다.
“나를 보낸 건 수배령뿐이 아니다. 당신을 찾는 자들이 이 골짜기를 이미 훑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