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6화: 교리 창조
새벽안개가 절벽 틈새로 낮게 깔렸다.
갈고리 골짜기의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갱도 입구를 맴돌던 썩은 유황 냄새는 확연히 가라앉아 있었다. 간밤에 카일이 틈새로 스며 나오던 음기를 빨아들이고 레오나와 마렌이 다시 굵은 납못을 단단히 박아 넣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 발자국은 수도 근위대나 신전 직속 척후가 쓰는 징 박힌 군화다.”
레오나가 절벽 초입의 젖은 흙바닥을 가리켰다. 그녀의 긴 손가락이 바위에 얕게 새겨진 십자 모양의 칼자국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이 표식은 인근 바르텐 영주령의 징집관들이 영역을 확인할 때 남기는 흠집이지. 수도의 수배령을 받은 자와 영주의 세금 징수원이 손을 잡았거나 둘 중 하나가 먼저 냄새를 맡고 길잡이를 보낸 거다.”
그 말에 장부를 들고 서 있던 마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옆에서 붕대를 감은 도안을 부축하던 로웨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영주령 징집관들이 온다고요? 그자들은 세금을 낼 돈이 없으면 사람을 노예로 팔아넘기거나 팔다리를 꺾어 끌고 갑니다. 게다가 카일 님이 수배 중이라는 걸 알면 골짜기 전체를 반역 소굴로 몰아 불태울 겁니다!”
“우린 이제 끝났어…… 광산이 무너져도 죽고 관군이 몰려와도 죽는구나.”
공터에 모인 스무 명 남짓의 주민들 사이에 순식간에 동요가 번졌다. 짐을 싸서 더 깊은 산속으로 도망치자는 이들과 당장 흩어져 숨자는 이들이 뒤섞여 웅성거렸다.
카일은 혀를 차며 제단 앞 바위에 걸터앉았다.
‘도망치면 숲속에서 굶어 죽거나 마수 밥이 될 뿐이지. 흩어진 도망자만큼 사냥하기 쉬운 먹잇감도 없거든.’
머릿속에서 검은 불꽃이 일렁이며 악신의 비웃음이 울렸다.
―도망치게 둬라. 흩어져 공포에 질린 놈들의 절망을 내가 모조리 삼켜 주마. 저 계집의 목을 베고 네 피를 바치면 저 산 아래 놈들도 다 찢어 죽일 수 있다.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피 흘려서 이기는 장사는 밑천만 날리는 짓이야.’
카일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옷깃을 정돈하고 고개를 들자 웅성거리던 주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의 표정은 호수처럼 잔잔했고 눈빛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철저하게 계산된 사기꾼의 가면이었다.
“마렌 씨.”
카일의 나직하고도 또렷한 목소리가 공터를 가라앉혔다.
“예, 예? 카일 님.”
“우리가 지금 흩어지면 영주령 기병들의 눈에는 무엇으로 보이겠습니까?”
마렌이 말문이 막힌 채 눈을 깜빡였다. 카일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탈영병이거나 광산세를 떼먹고 도망친 범죄자 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런 자들은 재판도 없이 숲에서 목이 잘려도 제국 법률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칼을 쥔 자들은 명분이 없는 약자를 가장 잔인하게 다루는 법이니까요.”
레오나가 대검 손잡이를 쥔 채 카일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럼 네놈의 대책은 뭐지? 수배자와 도망친 광부들이 뭉쳐 있으면 오히려 토벌의 명분만 줄 텐데.”
“뭉치되 도망자 떼가 아니라 건드릴 수 없는 집단이 되는 겁니다.”
카일은 제단 위에 놓인 낡은 양피지와 잉크병을 집어 들었다.
“관군이든 영주든 섣불리 손대지 못하는 유일한 무리는 셋뿐입니다. 막대한 금화를 쥔 상단이거나 황실의 칙령을 받은 귀족이거나 아니면 수많은 민중의 목숨이 얽힌 정식 종교 집단이죠.”
“종교 집단이라니…… 신전의 공인을 받지 못한 모임은 모조리 이단으로 규정되어 화형에 처해집니다!”
마렌이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카일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신전이 이단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진짜 악마를 숭배해서가 아닙니다. 자신들이 걷는 십일조와 신앙을 위협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역으로 묻겠습니다. 신전 사제들이 버린 이 골짜기에서 주민들의 목숨을 건지고 병을 치료하며 장부로 구휼을 증명하는 교단을 그들이 무슨 명분으로 불태우겠습니까?”
카일의 시선이 주민들을 훑었다.
“우리가 사이비 도적 떼가 아니라 질서와 규율을 가진 교단임을 선포할 겁니다. 도망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며 서로를 지키는 성별(聖星)의 신도들로 말입니다.”
창고 안쪽의 삐걱거리는 나무 탁자 위로 먼지 쌓인 책들이 펼쳐졌다.
카일이 수도에서 귀족들을 속일 때 밑천으로 삼았던 고대 신학 단편집과 제국 법령집의 파편들이었다. 카일은 깃펜에 잉크를 듬뿍 묻혀 거친 양피지 첫 머리에 굵은 글씨를 써 내려갔다.
‘종교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그럴싸한 말장난이 아니다. 사람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고 그것을 특별한 가치로 둔갑시키는 거지.’
그는 태양신전의 오만한 교리들을 떠올렸다. 태양신전은 언제나 빛과 순결을 강조하며 가난과 질병을 죄악의 결과이자 정화해야 할 오점으로 치부했다. 그렇기에 갈고리 골짜기의 빈민들은 평생을 패배자와 죄인이라는 굴레 속에서 살아왔다.
카일의 깃펜이 거침없이 미끄러졌다.
[성별교(聖星敎)의 첫 번째 진리: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빛난다.]
옆에서 촛불을 받쳐 들고 있던 레오나가 그 글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빛난다…….”
“태양은 만물을 비춘다고 자만하지만 밤이 오면 세상을 버리고 숨어버립니다.”
카일이 펜을 놀리며 태연하게 해설을 덧붙였다.
“하지만 별은 가장 캄캄하고 절망적인 암흑 속에서만 제 빛을 드러내죠. 그러니 이 골짜기의 가난과 고통은 저주가 아닙니다. 별의 은총을 가장 찬란하게 맞이하기 위해 세상의 어둠을 짊어진 거룩한 시련인 셈입니다.”
레오나의 호흡이 미세하게 멎었다. 그녀의 뇌리에 피투성이가 된 채 비탈길에 버려졌던 과거의 동료들이 스쳐 지나갔다. 배신당하고 버려진 삶이 저주가 아니라 어둠을 견디는 과정이라는 궤변은 기이할 정도로 가슴 깊숙한 곳을 찔렀다.
‘이 사기꾼은 사람의 마음이 어디서 무너지고 어디서 일어서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레오나는 침을 삼키며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카일은 멈추지 않고 그 아래에 교단의 3대 운영 규칙을 적어 내려갔다. 사기를 지속 가능한 방패로 만들기 위한 철저한 실무 조항들이었다.
[성별교의 세 기둥]
하나. 구휼(救恤): 굶주린 자에게 빵을 나누고 병든 자를 돌보며 피난처를 제공한다. 교단의 문턱은 신분이 아닌 결핍으로 낮춘다.
둘. 증명(證明): 모든 기적과 치유 물자의 출납은 기록관의 장부에 남기며 거짓과 과장을 금한다. 기적의 대가는 사리사욕이 아닌 공동의 생존으로 환원한다.
셋. 자립(自立): 신도는 맹목적인 구걸을 멈추고 제 손으로 방벽을 쌓고 갱도를 정화하며 자신의 터전을 지킨다. 구원은 바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남는 것이다.
양피지를 들여다보던 마렌의 눈가가 붉게 젖어 들었다.
“구원은 바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남는 것이다…….”
마렌은 평생 신전에 곡물을 바치며 용서를 빌었지만 돌아온 것은 세금 독촉장과 멸시뿐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청년은 공물을 요구하기는커녕 서로를 돌보고 장부를 남기며 스스로 일어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카일 님…… 이것이 정말 우리 같은 천한 광부들을 위한 교리입니까?”
“천한 사람은 없습니다. 버려진 어둠 속에서 별을 품은 자들이 있을 뿐이죠.”
카일은 속으로 ‘물론 내가 안전하게 숨어 살기 위한 방패막이지만’이라는 말을 삼키며 가장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소롭군. 종이 쪼가리에 적힌 글귀 몇 줄로 굶주린 이리 떼를 막겠다고?
악신이 비아냥거렸다.
‘글귀는 종이에 적히지만 신념은 사람의 골수에 박히거든. 골수에 박힌 신념은 칼날 앞에서도 등을 돌리지 않게 만드는 법이야.’
카일은 양피지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공표합시다. 이제부터 우리는 도망자가 아니라 성별의 뜻을 받드는 교단입니다.”
정오의 햇살이 갈고리 골짜기의 메마른 바위산을 내리쬐었다.
공터 중앙에 세워진 임시 제단 주변으로 스무 명의 주민들이 빽빽하게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곡괭이와 삽 그리고 낡은 냄비 뚜껑 따위가 쥐어져 있었다. 언제 관군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다리를 떠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카일은 짙은 감색 천으로 수선한 낡은 망토를 두르고 제단 위에 올랐다.
그의 등 뒤로는 묵직한 대검을 비껴 찬 레오나가 위압적인 기세로 버텨 섰고 좌우에는 마렌과 로웨가 섰다. 카일이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리자 시끄럽던 공터가 거짓말처럼 쥐은 듯 고요해졌다.
“골짜기의 형제자매들이여.”
카일의 중저음 목소리가 협곡의 암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우리는 세상의 끝자락으로 밀려났습니다. 태양신전의 사제들은 우리의 질병을 불결하다며 외면했고 영주의 관리들은 우리의 피땀을 수탈해 갔습니다. 갱도가 무너지고 독기가 차오를 때 그 누구도 우리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의 눈동자에 서러움과 분노가 어렸다. 카일은 그들의 감정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양피지를 펼쳤다.
“그들은 우리가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별은 대낮의 화려함 속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빛이 꺼져버린 가장 깊고 시커먼 어둠 속에서만 그 찬란한 빛을 드러냅니다!”
카일이 양피지를 높이 치켜들었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찬란하게 빛납니다! 여러분이 겪은 가난과 고통은 죄악의 대가가 아니라 이 땅의 어둠을 견뎌내고 성스러운 별빛을 증명하기 위한 숭고한 시련이었습니다!”
순간 광부들의 입에서 거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평생을 멸시받으며 스스로를 벌레처럼 여기던 이들이었다. 카일의 선언은 그들의 비참했던 과거를 일순간에 거룩한 희생과 사명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눈물을 훔치는 노인과 주먹을 꽉 쥐는 청년들의 얼굴에서 패배자의 비굴함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카일은 열기가 식기 전에 쐐기를 박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성별교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맹목적으로 무릎 꿇지도 않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구휼과 투명하게 진실을 남기는 증명 그리고 우리의 터전을 제 힘으로 지켜내는 자립으로 맞설 것입니다!”
카일은 마렌을 앞으로 불러냈다.
“마렌 씨를 교단의 수석 기록관으로 임명합니다. 모든 곡물과 약재의 출납 환자의 회복과 기적의 순간을 한 획의 거짓도 없이 장부에 남기십시오.”
“목숨을 걸고…… 기록하겠습니다!”
마렌이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가슴에 품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어 카일이 레오나를 가리켰다.
“레오나 베일을 교단의 수호기사로 임명합니다. 골짜기의 방벽을 점검하고 갱도의 안전을 지키며 불의한 폭력으로부터 신도들을 방어할 책무를 맡깁니다.”
레오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대검을 땅에 꽂았다.
쿵!
“성별의 뜻과 교단의 규율을 어기는 자는 내 검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녀의 서늘한 살기와 묵직한 선언에 주민들은 압도당하면서도 비로소 자신들을 지켜줄 진정한 방패가 생겼음을 실감했다.
“로웨는 젊은 광부들과 함께 척후조를 구성해 절벽과 통로의 경계를 맡으십시오. 도안을 비롯한 치료받은 이들은 창고를 정비하고 식수를 확보합니다.”
카일의 체계적인 지시가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지자 오합지졸 난민에 불과했던 무리는 불과 반나절 만에 규율과 역할을 갖춘 단단한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그 순간 카일의 가슴팍으로 형언할 수 없이 따뜻하고 투명한 기운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주민들의 눈빛에 깃든 확신과 헌신 스스로를 구원하겠다는 순수한 믿음이 거대한 신앙의 파도가 되어 카일의 영혼을 채웠다.
내면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파멸의 별이 흠칫 놀라며 속삭였다.
―이건…… 뭐지? 피비린내 나는 공포가 아닌데 왜 이토록 달콤하고 맑은 것이냐? 영혼의 갈증이 가라앉는다…….
카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공포는 쥐어짜면 바닥나지만 신념에서 우러나온 믿음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거든.’
악신의 굶주림이 순식간에 진정되며 카일의 온몸에 깃들어 있던 피로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눈동자에는 한층 더 맑고 신비로운 광채가 감돌았다.
바로 그때 절벽 위 망루로 올라갔던 로웨가 다급한 목소리로 협곡 아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말발굽 소리가 들립니다! 협곡 입구 쪽에서 흙먼지가 일고 있습니다!”
공터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레오나가 즉시 바위 위로 뛰어올라 시선을 던졌다.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지형을 살피던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철제 흉갑을 입은 기병 열두 명과 징집 마차 두 대다. 선두의 깃발에 독수리와 저울 문양이 새겨져 있군.”
마렌이 숨을 들이켰다.
“바르텐 영주령의 수석 징수관…… ‘피의 집게’라 불리는 볼코프입니다! 닥치는 대로 곡식을 빼앗고 사람을 끌고 가는 악마 같은 자입니다!”
주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일에게로 쏠렸다. 방금 전까지라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을 이들이었지만 이제는 누구도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공포 대신 교주를 향한 굳건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카일은 천천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제단에서 내려왔다.
‘징수관이라. 탐욕에 눈이 먼 관리만큼 요리하기 쉬운 상대도 없지.’
카일이 레오나와 마렌을 돌아보며 나직하게 명했다.
“장부를 챙기고 제단을 정돈하십시오. 손님맞이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