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4화: 광신의 싹
새벽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갈고리 골짜기는 여전히 축축했다.
폐창고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나온 카일은 가장 먼저 임시 제단으로 향했다. 제단으로 쓰는 세 개의 받침돌 위에는 어젯밤 켜 두었던 여섯 자루의 촛불 대신 새로운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말린 보리 한 주머니, 깨끗하게 빤 베 천 조각 두 장 그리고 손가락 마디만 한 둔한 은빛 납못 세 개였다.
카일은 멈춰 서서 그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공물이었다. 그가 요구한 적도 없고 신의 이름을 빌려 바치라고 선언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갱도 입구의 검은 물이 줄어들고 도안이 살아서 나온 광경을 보았다. 그 눈으로 확인한 결과가 사람들의 손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가슴 안쪽에서 파멸의 별이 낮게 일렁였다.
―받아라.
‘공물이 아니다.’ 카일이 속으로 차갑게 중얼거렸다. ‘이건 주민들이 쪼개 낸 목숨이야.’
―저들은 너에게 바치고 있다. 네가 기적을 보여 주었으니까.
‘내가 보여 준 건 납못과 송진이다. 기적이 아니야.’
카일은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공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사기꾼 시절에도 남의 동전을 훔칠지언정 명분 없이 던져진 돈에는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값을 치르지 않은 돈은 반드시 뒤탈을 부른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뒤에서 벅벅 긁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마렌이 낡은 장부를 품에 안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 곁에는 밤새 도안의 곁을 지키느라 충혈된 눈을 한 로웨가 서 있었다.
“누가 놓았는지 아십니까?” 카일이 제단을 가리키며 물었다.
마렌은 제단 위의 보리 주머니와 천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수레를 나르던 늙은 광부 아내와 창고 뒤편의 과부네다. 도안이 살아 돌아온 걸 보고 새벽같이 찾아와 놓고 가더군.”
“장부에 적으십시오.”
마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어라 적으란 말인가? 제단에 바친 공물이라고 적을까?”
“비상 식량과 마을 공동 재고로 적으세요.” 카일이 단정 지어 말했다. “누가 얼마를 냈는지 누구의 이름으로 들어왔는지 빠짐없이 기록하십시오. 제가 가져갈 물건이 아닙니다. 골짜기 주민들이 나누어 먹을 양식입니다.”
로웨의 턱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눈에는 단순한 경계가 아닌 낯선 경외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보통 신전의 사제들이라면 신의 축복을 핑계로 가장 먼저 챙겼을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 외지인은 자신을 낮추며 장부의 줄에 그 이름을 묶어 버렸다.
“사기꾼의 수법 치고는 너무 투명하군.” 마렌이 나직하게 중얼거렸지만 장부를 펼쳐 펜을 들었다.
“투명해야 살기 때문입니다.” 카일은 외투 깃을 세웠다. “도안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열이 내렸어.” 로웨가 목소리를 다듬으며 답했다. “의식이 조금 돌아왔다. 깨어나자마자 베른의 이름을 부르더군.”
베른. 갱도 안에 남겨진 둘째 실종 광부의 이름이었다.
카일은 갱도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안개가 검게 물든 입구는 조용했지만 어젯밤 제단 돌 아래에서 울렸던 두드림과 속삭임이 여전히 귓가에 남아 있었다.
“약속대로 오늘 안에 갱도 심부를 확인하고 베른의 행방을 찾겠습니다.” 카일이 밧줄을 챙기며 말했다. “그리고 안쪽 봉인 벽의 상태를 본 뒤 갱도를 다시 열지 완전히 봉쇄할지 결정하지요.”
“혼자 들어갈 셈인가?” 마렌이 물었다.
“로웨와 둘이 갑니다. 밖에서는 어제처럼 밧줄 신호를 유지하십시오. 줄이 두 번 흔들리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끌어내야 합니다.”
로웨가 카일의 어깨에 두꺼운 가죽 끈을 걸어 주었다. 그 손길은 어제와 달리 신중하고 단단했다.
“가시죠, 카일 님.”
님이라는 칭호가 카일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사기꾼이 성자 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덫이 놓이는 때였다. 하지만 카일은 그 칭호를 정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거절보다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 먼저였다.
갱도 심부로 들어가는 길은 외길이었다.
1차로 막아 둔 입구의 송진 냄새가 갱도 안쪽의 축축하고 야릇한 비린내와 섞여 코를 찔렀다. 발밑으로 흐르는 검은 물줄기는 확연히 얇아져 있었지만 바닥의 바위 틈새에서는 여전히 검은 김이 피어올랐다.
로웨는 횃불을 높이 들고 벽면을 살폈다.
“이 앞이 2차 보조 갱도입니다. 베른은 당번을 서다 그쪽에 갇혔을 겁니다.”
둘은 무너진 버팀목과 바위 더미를 천천히 넘었다. 갱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짓눌리듯 무거워졌다. 횃불의 붉은 불꽃이 흔들리며 벽면에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쓰러진 광차 뒤편에서 굳어 버린 형체가 드러났다.
로웨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베른…….”
사내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무너진 바위에 하반신이 눌린 채였고 얼굴과 손통은 검은 핏줄로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이미 심연의 음기에 생명력을 전부 빼앗긴 상태였다. 손끝에는 식구들의 얼굴이 새겨진 둔한 놋쇠 펜던트가 쥐어져 있었다.
로웨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눈물이 흙투성이 뺨을 적셨다.
카일은 묵묵히 다가가 베른의 손에서 놋쇠 펜던트를 거두었다. 그리고 사체의 가슴 위에 손을 모아 주었다. 비록 살아 나온 것은 도안 한 명뿐이었지만 적어도 이 차가운 어둠 속에 버려진 채 잊히지는 않게 되었다.
―저것도 마력이다. 죽은 자의 절망도 달다.
가슴 안에서 파멸의 별이 굶주린 입을 벌렸다.
‘탐내지 마라.’ 카일은 강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죽은 이의 유골까지 삼키면 너나 나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네가 언제부터 선인이 되었지?
‘나는 선인이 아니다. 산 자에게 팔릴 명분을 지키는 것뿐이다.’
카일은 별의 굶주림을 누르고 횃불 빛을 베른의 사체 너머 벽면으로 돌렸다.
그곳에 문제의 봉인 벽이 있었다.
금빛 룬이 새겨진 거대한 암벽 한가운데에 손가락 굵기의 균열이 가로질러 있었다. 그 균열 틈새로 검은 안개가 숨 쉬듯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젯밤 제단 돌과 도안의 무의식을 울렸던 ‘열어’라는 속삭임의 근원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벽에 새겨진 부서진 원과 검은 별 문양이 검은 안개 속에서 미세하게 진동했다.
“이 벽 뒤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로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단순한 광산 사고가 아닙니다. 신전이 무어라 했든 이 안에는 괴물이 잠들어 있어요.”
“괴물이든 악마든 상관없습니다.” 카일이 벽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중요한 건 이 틈을 더 넓히지 않고 막는 겁니다.”
카일은 양 손바닥을 균열 양옆에 대었다.
차갑고 찌르는 듯한 음기가 손가락을 타며 뼛속을 긁었다. 파멸의 별 권능이 솟구치며 벽 틈새에서 새어 나오던 검은 안개를 미친 듯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후욱!
검은 안개가 카일의 손바닥으로 흡수되고 뒤이어 벽면 전체가 성스러운 금빛으로 물들었다. 악신의 권능이 역설적으로 흑마법 오염을 정화하면서 침식되어 죽어 가던 봉인의 고대 마법을 다시 활성화시킨 것이었다.
로웨는 그 광경을 보고 숨을 멈추었다.
카일의 몸 주변으로 검은 안개가 흡수되고 뒤이어 벽면 전체가 성스러운 금빛으로 물드는 모습은 그 누구가 보아도 장엄한 구원의 의식이었다.
“아…….” 로웨의 입에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카일은 쏟아지는 마력의 역류에 이빨을 깨물었다. 머릿속으로 아득한 환영이 스쳤다. 무너진 신전, 수천 명의 민중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붉은 별. 환영은 이내 사라졌지만 뿜어져 나오던 검은 안개는 완벽하게 꺼졌다.
카일은 서둘러 주머니에서 가져온 송진과 납못을 꺼냈다.
그는 정화된 균열 틈새에 송진을 깊숙이 채워 넣고 납못을 망치로 박아 넣었다. 흑마법 오염이 사라진 자리에 물리적인 봉합이 더해지자 벽의 진동과 웅웅거리던 울림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카일은 비틀거리며 벽에서 손을 떼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봉합했습니다.” 카일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말했다. “이 아래 갱도는 당분간 진입을 금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위쪽 본 갱도의 물길은 완전히 정화되었습니다.”
로웨는 베른의 펜던트를 품에 안고 카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카일 님. 베른을 어둠 속에 버려두지 않게 해 주셔서 그리고 우리 마을을 지켜 주셔서…….”
카일은 그 무릎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고마워할 시간에 베른을 끌어낼 준비나 하세요. 장부에 적을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갱도 밖으로 나온 카일과 로웨의 모습에 마을 전체가 일렁였다.
로웨의 품에 안긴 베른의 사체와 놋쇠 펜던트를 본 주민들은 슬픔에 잠겼지만 이내 카일이 내민 장부와 봉합 결과에 고개를 숙였다.
카일은 마렌이 내민 장부 위에 펜을 들고 직접 적어 내려갔다.
‘둘째 실종자 베른 사망 확인 및 유품 회수. 심부 갱도 봉인 균열 1차 정화 및 물리 봉합 완료. 하부 갱도 폐쇄 조치, 상부 광산 안전 확보.’
카일은 펜을 놓고 모여든 주민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기적은 없습니다! 베른은 살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신도 아니고 성자도 아닙니다!”
그의 날카로운 일침에 주민들이 조용해졌다. 카일은 사람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보았다.
“다만 약속은 지켰습니다. 물길은 막았고 안에 있던 이들을 확인했으며 남은 위험을 장부에 기록했습니다. 이제 이 광산을 다시 개판할지 말지는 마렌 촌장과 여러분이 장부를 보고 판단하십시오.”
그 순간, 창고 쪽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깨에 베 붕대를 감은 도안이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피부는 파리하고 검은 멍이 옅게 남아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맑고 또렷했다.
도안은 카일 앞에 서자 부인의 손을 뿌리치고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성별의 대리자시여…….”
도안의 목소리가 찌렁찌렁하게 골짜기에 울렸다.
“제가 어둠 속에서 상처 입고 죽어 갈 때 저를 구원하신 것은 신전의 무심한 사제들이 아니었습니다. 거짓 없는 명분과 결과로 저를 흙구덩이에서 끌어내신 분은 바로 카일 님이셨습니다!”
그 선언은 촉매제였다.
도안의 말에 로웨가 먼저 무릎을 꿇었고 뒤이어 수레를 끌던 늙은 광부와 모래주머니를 나르던 여인들, 마침내 촌장인 마렌까지 천천히 카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별의 대리자 카일 님을 추앙합니다!”
“저희를 버리지 마소서!”
주민들의 외침이 골짜기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카일은 당혹감을 감추려 이를 악물었다. 사기꾼 인생 십수 년 동안 무수한 대귀족과 거상을 속여 왔지만 이토록 순수하고 절박한 헌신의 눈빛을 받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살기 위해 장부를 만들고 별의 굶주림을 달래려 정화를 연출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카일의 그 철저함과 투명함이야말로 부패한 정통 신전이 주지 못했던 유일하고 완벽한 '구원'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가슴 안쪽에서 파멸의 별이 이질적인 떨림을 일으켰다.
―이것이…… 믿음인가.
굶주림으로 찢어질 듯하던 악신의 내면이 주민들의 순수한 신뢰와 감사에서 흘러 나오는 빛으로 부드럽게 채워져 갔다. 공포를 먹었을 때의 역겨운 충동과 달리 이 온기는 카일의 이성을 흔들지 않고 오직 명징한 안정만을 선물해 주었다.
‘봤느냐.’ 카일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공포보다 믿음이 훨씬 안전한 법이다.’
―하지만 더디다.
‘더뎌도 단단하지. 이제 이 사람들은 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신도가 되었다.’
카일은 무릎 꿇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성자의 자애로운 표정을 연기하는 것은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성별(聖星)은 고통받는 자를 버리지 않으며 성별의 뜻은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 순간, 가짜 교단 '성별교'의 첫 번째 씨앗이 이 가난한 골짜기 흙바닥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
그날 밤, 갈고리 골짜기 제단 앞에는 열두 자루의 촛불이 환하게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주민들은 조용히 제단 둘레에 모여 기도를 올린 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제단은 더 이상 으스스한 미신의 공간이 아니라 골짜기 사람들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카일은 제단 옆 나무 의자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손에 쥔 동전 주머니는 여전히 가벼웠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 교단을 세력으로 키워 제국의 추적을 따돌릴 치밀한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골짜기를 둘러싼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산등성이 너머에서 차가운 밤바람을 타고 스산한 쇠 냄새가 날아들었다.
카일은 시선을 올려 어두운 절벽 끝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칠흑 같은 외투를 걸친 날카로운 형체 하나가 산등성이에 서서 골짜기의 촛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굳센 손에는 거대한 대검의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수도에서 퍼져 나간 수배령과 골짜기의 기이한 소문을 쫓아온 낯선 추적자의 시선이었다.
카일은 입꼬리를 가늘게 올렸다.
새로운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이미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첫 번째 신도들이 있었다.
세상을 향한 위대한 사기극의 톱니바퀴가 비로소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