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들은 방송 중입니다

5화 [오류 난 대본]
굶주린 갑주수의 몸이 검은 재로 흩어지자 환승홀에 남아 있던 비상등이 한꺼번에 꺼졌다.
어둠 속에서 시스템 창만 푸르게 떠 있었다.
[보스 개체 처치 완료]
[후속 콘텐츠를 진행합니다.]
[‘신성한 귀환자의 증명’]
[출연자는 서울 중앙 각성자 광장으로 귀환하십시오.]
이아린이 무너진 장막을 거두었다. 세 갈래로 나뉘었던 푸른 벽이 빛가루가 되어 사라지자 역사 직원들이 서로의 팔을 붙잡고 출구로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다 빠졌어요.”
“경비는?”
“반대편 통로에 몰려 있어요.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같아요.”
유진은 바닥에 박힌 검을 뽑았다. 손잡이를 쥔 손에는 힘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환승홀을 울리는 명령은 조금 전의 보스보다 더 성가셨다.
“광장으로 돌아가라는군.”
“당신을 데려가려는 협회 말이에요?”
“협회와 다른 누군가가 동시에.”
유진은 눈앞의 퀘스트 창을 벌렸다.
[콘텐츠명: 신성한 귀환자의 증명]
[상태: 강제 배정]
[진행 권한 보유자: 지구 채널 관리자]
[강제 집행자: 중앙 각성자 협회]
[출연자: 신유진]
[권장 행동: 성좌를 향해 무릎 꿇고 귀환의 은혜를 증명하십시오.]
그 아래에 잠긴 수정 버튼이 있었다. 버튼 옆의 작은 글씨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수정 권한 확인 중...]
[오류: 현재 콘텐츠에 진행 권한 행사 주체가 중복되어 있습니다.]
[최종 집행자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유진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잠긴 게 아니었어.”
“네?”
“서로 자기들이 진행자라고 우기는 중이야.”
“뭘 보고 있는 거예요?”
“대본의 목차.”
유진은 카메라 구체의 붉은 렌즈를 올려다봤다.
“저들이 우리를 광장으로 데려가려는 이유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야. 이미 찍힌 장면의 다음 장면을 이어 붙이려는 거지.”
방화문 너머에서 금속 부츠가 바닥을 긁었다.
“신유진 헌터! 협회 보호 조치에 따라 즉시 장비를 반납하십시오!”
수정 버튼은 여전히 회색이었지만 오류 문구는 살아 있었다.
진행 권한 행사 주체가 중복되어 있다.
힘으로 밀어낼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기록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아린아.”
“말해요.”
“관제실로 가자.”
“협회 관제실이요?”
“방송을 관리하는 곳.”
“문을 여십시오! 저항할 경우 강제 제압에 들어갑니다!”
“관제실은 북쪽 유지보수 구역에 있어요. 다만 지금은 폐쇄됐을 겁니다.”
“그럼 열리게 만들면 돼.”
유진이 방화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이 폭발하듯 열렸다.
협회 경비 여섯 명이 방패를 세운 채 통로를 막고 있었다. 그 뒤에는 아까 환승홀에서 본 경비대장이 서 있었다. 그는 쓰러진 갑주수의 잔해보다 유진의 카메라를 먼저 확인했다.
“신유진 헌터. 귀환식 중 발생한 무단 전투와 방송 장치 조작에 대해 조사하겠습니다.”
“조사는 광장에서 하나?”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성좌의 보호를 확인해야 합니다.”
“방금 말한 문장. 다시 해 봐.”
경비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뜻입니까?”
유진은 카메라 구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민들 앞에서 성좌의 보호를 확인한다. 그게 네 명령이냐고.”
“협회의 정식 지시입니다.”
카메라 구체의 붉은 불빛이 빠르게 세 번 깜빡였다.
[현장 발언이 콘텐츠 기록에 추가됩니다.]
[새로운 퀘스트 조건 후보가 감지되었습니다.]
유진은 웃었다.
협회는 카메라가 표정만 담는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말 한마디와 명령 한 줄도 기록했다.
“길을 비켜.”
“불응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경비들이 동시에 방패를 밀어붙였다.
아린이 양손을 펼쳤다. 푸른 장막이 바닥에서 솟아올라 유진과 경비 사이를 세로로 갈랐다. 방패들이 장막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오래는 못 막아요!”
“삼 초면 충분해.”
유진은 장막의 옆면으로 몸을 낮췄다. 경비들이 시야를 잃고 방패를 겹치는 순간 그는 한 명의 손목을 검집으로 쳤다. 구속구가 바닥에 떨어졌다.
“죽이지는 않을게.”
유진은 경비대장 앞에서 멈췄다.
“대신 네 말은 전부 남겨 둔다.”
“카메라를 꺼!”
대장이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그 순간 천장 스피커에서 낮고 매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출연자에게 귀환식 복귀를 권고합니다.]
[권고 불이행 시 지구 채널 송출 권한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아린이 유진을 돌아봤다.
“송출 권한을 제한한다는 게 무슨 말이죠?”
“내가 계속 말하게 두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유진은 카메라를 향해 손을 들었다.
“잘 들었지?”
채팅창이 그의 시야에 겹쳐졌다.
[빛나는 훈수왕: 협회 놈들이 방송을 끄려고 하네.]
[우주 개구리: 진행자 두 명이면 누가 진짜 주인임?]
[구르는 은하: 유진. 네 채널이면 네가 결정해야지.]
“그래. 채널이면 채널답게 움직여야지.”
유진은 퀘스트 대기열의 비상 경로 항목을 열었다. 지금은 폐쇄된 북쪽 유지보수 리프트가 출연자 이동 경로에 남아 있었다.
[비상 유지보수 경로를 현재 콘텐츠와 연결하시겠습니까?]
[연결 비용: 200 코인]
“이 정도면 통행료로 싸군.”
유진이 승인하자 환승홀 천장에 새 알림이 떴다.
[출연자 이동 경로가 갱신됩니다.]
[콘텐츠 연속성을 위해 비상 유지보수 리프트를 개방합니다.]
철문이 낮게 울리며 열렸다.
경비대장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협회 장치다.”
“그런데 방송이 먼저 열었네.”
유진은 아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뛰어.”
두 사람이 리프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아린이 장막을 접었다. 경비들이 달려들었지만 철문이 먼저 닫혔다. 닫히는 틈 사이로 대장의 목소리가 악을 썼다.
“강태성 부회장님께 즉시 보고해! 저자가 관제실로 간다!”
유지보수 리프트는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아린은 벽에 기대 숨을 골랐고 유진은 퀘스트 창을 다시 펼쳤다.
“당신은 아까부터 저들이 하는 말을 일부러 끌어내고 있어요.”
“기록이 필요하니까.”
“그 기록으로 뭘 하려고요?”
“대본을 고치려고.”
“정말로 가능한 일이에요?”
유진은 잠긴 버튼을 보며 대답했다.
“가능하지 않으면 가능하게 만들 거야.”
리프트가 멈추자 오래된 관제실이 나타났다. 벽면 모니터는 대부분 꺼져 있었고 중앙에는 수정구가 박힌 제어대가 놓여 있었다.
수정구 안에서 광장 화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강태성이 귀환식 무대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지금 당장 신유진 헌터를 데려오십시오.”
강태성의 목소리가 관제실에 울렸다.
“성좌의 이름으로 내려진 보호 명령입니다. 불응할 경우 시민 안전을 위협한 자로 분류하겠습니다.”
유진은 제어대에 손을 올렸다.
[관리자 명령이 확인됩니다.]
[명령 출처: 중앙 각성자 협회]
[명령 성격: 귀환식 강제 집행]
[콘텐츠 진행 권한과의 충돌이 감지됩니다.]
[수정 권한: 잠김]
그 아래에 작은 삼각형 표시가 있었다. 유진이 그것을 눌러 펼치자 오래된 문장이 나타났다.
[장애 대응 규칙]
[진행 권한 보유자 부재 또는 권한 충돌이 지속될 경우 임시 진행자를 지정할 수 있습니다.]
[조건: 시청자 승인 및 현장 출연자 동의]
[임시 진행자에게 목표·출연자·송출 장소의 수정 권한을 위임합니다.]
유진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무도 고장 나지 않기를 바라며 방치한 시스템은 반드시 빈틈을 남긴다.
“찾았어요?”
아린이 제어대 쪽으로 다가왔다.
“문은 찾았어.”
“열쇠는요?”
“열쇠가 필요한 문이 아니야.”
유진은 관제실의 모니터 하나를 켰다. 검은 화면 위에 현재 콘텐츠의 권한 상태가 나란히 떠올랐다.
[진행 권한 보유자 A: 지구 채널 관리자]
[진행 권한 행사 요청 B: 중앙 각성자 협회]
[임시 진행자 후보: 신유진]
마지막 줄이 붉게 깜빡였다.
[시청자 승인 대기]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죠?”
“이번에는 네 이름이 방송에 걸려.”
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아린이 제어대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도 시민 대피와 현장 기록이 먼저라면 동의할게요.”
제어대가 희미하게 빛났다.
[현장 출연자 이아린의 동의 문장을 입력하십시오.]
유진은 문장을 짧게 만들었다.
[시민 대피와 현장 기록을 우선하는 임시 방송 진행에 동의합니다.]
아린이 그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현장 출연자 동의가 확인되었습니다.]
[시청자 승인만 남았습니다.]
유진은 카메라 구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잘 들어.”
그의 목소리가 관제실과 광장과 모니터 너머로 동시에 흘러갔다.
“저들은 내가 성좌 앞에 무릎 꿇는 장면을 원한다. 나는 누가 그 명령을 내렸는지 확인하는 장면을 원해.”
유진은 화면에 후원 목표 창을 열었다.
[임시 진행자 승인 후원 목표]
[목표: 3,000 코인]
[용도: 협회 강제 명령 공개 검증 콘텐츠 개시]
광장 화면의 카메라가 흔들렸다. 협회 직원들이 송출 장치를 끄려 했지만 관제실의 모니터는 오히려 더 밝아졌다.
[구르는 은하: 드디어 네가 직접 진행자가 되는 건가?]
“진행자는 아니고.”
유진이 짧게 웃었다.
“대본을 고치는 사람이지.”
결제 알림음이 관제실을 울렸다.
[‘구르는 은하’가 후원 코인 3,000개를 보냈습니다!]
[시청자 승인 조건 충족]
[임시 진행자 신유진에게 제한적 스트리머 권한을 위임합니다.]
잠겨 있던 수정 버튼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동시에 강태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송출을 중지하십시오! 그 명령은 협회 내부 자료입니다!”
유진은 제어대의 수정 버튼을 눌렀다.
[콘텐츠명: 신성한 귀환자의 증명]
[현재 목표: 성좌를 향해 무릎 꿇고 귀환의 은혜를 증명하십시오.]
그는 목표 문장을 지웠다.
“은혜를 증명하라.”
유진은 빈칸에 새 문장을 입력했다.
[강제 귀환 명령의 발동 주체와 목적을 공개 검증하십시오.]
[송출 장소: 서울 중앙 각성자 광장]
장소 항목도 바꿨다.
[송출 장소: 중앙 각성자 협회 본관 공개홀]
[참가자: 신유진]
유진은 이아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말없이 제어대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출연자: 신유진 및 이아린]
마지막으로 참가 거부 조건을 확인했다. 페널티 항목은 회색으로 잠겨 있었다. 보상과 처벌은 아직 그의 것이 아니었다.
유진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도 웃었다.
“전부 바꿀 수는 없네.”
“그래도 충분해요?”
“오늘은.”
그가 최종 적용 버튼을 눌렀다.
[수정 권한을 행사합니다.]
[변경 사항을 현재 방송에 적용합니다.]
[퀘스트 목적이 변경되었습니다.]
[송출 장소가 변경되었습니다.]
[출연자 목록이 변경되었습니다.]
[제한적 스트리머 권한이 활성화됩니다.]
관제실의 모든 모니터가 동시에 켜졌다. 서울 중앙 각성자 광장의 전광판이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다음 콘텐츠: 강제 귀환 명령 공개 검증]
[장소: 중앙 각성자 협회 본관 공개홀]
[예정 출연자: 신유진, 이아린, 중앙 각성자 협회 부회장 강태성]
광장에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전광판으로 돌아갔다. 강태성은 자신을 가리킨 문장을 읽고 얼굴에서 핏기를 잃었다.
관제실 안에서 이아린이 조용히 물었다.
“이제 당신이 방송을 진행하는 거예요?”
유진은 붉은 카메라 렌즈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아니.”
그의 미소가 차갑게 굳었다.
“이제부터는 저들이 내 방송에 출연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