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들은 방송 중입니다

4화 [시청자와의 밀당]
보조 통로의 방화문이 닫히자 광장의 함성이 두꺼운 철판 너머로 뭉개졌다.
이아린은 멈추지 않고 앞장섰다. 협회가 영접식 때만 열어 두는 좁은 통로였다. 벽에는 오래된 지하철 노선도가 붙어 있었고 천장등은 절반쯤 나가 있었다.
“여기로 나가면 지하 환승홀과 이어져요. 밖으로 빠지는 길은 아니지만 사람을 피하기는 쉬워요.”
“사람을 피하려는 건 아니야.”
유진은 뒤를 쫓아오는 검은 카메라 구체를 힐끗 봤다.
“누가 쫓는지 확인하려는 거지.”
아린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방화문 반대편에서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신유진 헌터! 협회 보호 지시에 따라 장비를 내려놓고 동행하십시오!”
강태성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보호’라는 단어를 꺼내는 방식은 똑같이 매끈했다.
유진은 문 너머의 기척을 세었다. 여섯. 앞에서 막고 뒤에서 좁혀 오는 숫자까지 합치면 열둘쯤이다. 시민을 피한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배치였다.
“협회는 보호할 때 구속구를 차고 다니나?”
“귀환 후유증 가능성이 확인됐습니다.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내 안전은 100층에서 끝났어. 그보다 너희 부회장 안전이 더 급해 보이더군.”
카메라 구체의 붉은 불빛이 한 번 크게 깜빡였다.
[빛나는 훈수왕: 또 말 안 듣네. 빨리 협회 놈들 정리하고 보스전 가자.]
[우주 개구리: 지구 쪽 NPC들 표정이 왜 저렇게 진심임?]
유진은 채팅창을 훑고서 낮게 말했다.
“보스전?”
그 순간 바닥 아래에서 둔탁한 충격이 울렸다.
쿵.
아린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가 마력 감지기를 꺼내자 푸른 바늘이 미친 듯이 떨었다.
“환승홀 쪽에 균열 반응이 있어요. 이 정도면... 게이트가 아니라 소환 균열이에요.”
통로 끝의 비상등이 붉게 변했다. 안내 방송이 몇 번 잡음을 토한 뒤 차분한 여자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긴급 콘텐츠가 배정되었습니다.]
[지구 채널 특별 귀환 방송: ‘영웅의 첫 귀환전’을 개시합니다.]
[출연자 신유진은 시민 보호를 위해 보스 개체를 처치하십시오.]
유진은 웃음도 없이 입꼬리만 움직였다.
죽을 뻔한 영웅을 광장으로 끌어내더니 이제는 귀환전까지 붙여 준다. 제작진은 방송 사고로 흔들린 감동 서사를 전투 하나로 덮으려는 모양이었다.
아린이 그를 봤다.
“저쪽 환승홀에 야간 근무자들이 남아 있어요. 대피가 끝나려면 최소 삼 분은 필요해요.”
유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막은?”
“길게는 못 버텨요. 하지만 출구 둘은 막을 수 있어요.”
“그럼 네가 셋을 만들어.”
아린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유진은 검자루에서 손을 뗐다.
“내가 마수 앞에 서는 동안 사람들을 빼. 그 사이에 내 쪽은 내가 해결한다.”
“혼자요?”
“오늘은 관객이 많잖아.”
유진은 방화문을 밀어 열었다.
지하 환승홀은 이미 반쯤 무너져 있었다. 중앙 개찰구 위로 검은 균열이 찢어진 입처럼 벌어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검은 갑옷을 뒤집어쓴 짐승이 웅크리고 있었다.
사슴만 한 몸집에 네 개의 다리를 가진 마수였다. 갑주의 틈마다 붉은 불꽃이 새어 나왔고 얼굴 대신 매끈한 투구가 달려 있었다.
[보스 개체 ‘굶주린 갑주수’가 출현했습니다.]
[권장 연출: S급 귀환자의 압도적인 일격.]
“아주 친절하군.”
유진이 비틀린 개찰구 위로 올라서자 협회 경비대장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는 유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신유진 헌터! 시민들이 보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처치하십시오!”
마수가 투구를 들었다. 투구 속에는 이빨 대신 빛나는 금속 이빨이 원형으로 겹쳐 있었다. 놈이 낮게 울자 대피하지 못한 역사 직원 셋이 벽 쪽으로 주저앉았다.
유진은 검을 뽑지 않았다.
“싫은데.”
경비대장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왜 공짜로 제작진 뒷수습을 해.”
[빛나는 훈수왕: 야 이건 좀 아닌데? 시민들 있잖아.]
[별빛 소믈리에: 설마 진짜로 안 싸우려고?]
유진은 카메라를 향해 손바닥을 폈다.
“너희가 원하는 건 영웅의 첫 귀환전이잖아. 그러면 표 값을 내.”
[현재 보유 후원 코인: 8,400]
그는 화면에 뜬 후원 목표 설정창을 열었다. 이미 1,000 코인 아래의 채팅은 막혀 있었다. 이번에는 숫자만 바꿨다.
[긴급 후원 목표를 설정합니다.]
[목표: 20,000 코인]
[달성 보상: 고급 스트리머 기능 해금권 1회]
[미달성 시 출연자는 보스전 참여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환승홀이 조용해졌다.
아린만 유진 쪽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유진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삼 분 안에 목표를 못 채우면 내가 장막을 같이 칠게. 그 뒤엔 협회가 영웅 노릇을 하겠지.”
“그 삼 분 동안 저 마수가 장막을 뚫으면요?”
“안 뚫게 만들어.”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막연히 부탁하지 않았다. 아린이 가진 보호막의 폭과 마력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린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양손을 펼쳤다.
“출구 셋을 가릅니다. 대신 당신은 약속을 지켜요.”
“돈이 들어오면.”
“사람들이 먼저예요.”
“알아. 그래서 네가 여기 있는 거고.”
아린의 마력이 환승홀 바닥에 파란 선을 그었다. 선은 세 갈래로 갈라져 출구 앞에 투명한 벽을 세웠다. 갑주수가 가장 가까운 장막을 들이받았다.
쾅!
아린의 어깨가 뒤로 밀렸다.
[구르는 은하: 하하, 이건 협박이 아니라 콘텐츠 기획이군! 누가 먼저 목표를 채우나 보자.]
[‘구르는 은하’가 후원 코인 5,000개를 보냈습니다!]
[현재 긴급 후원: 5,000 / 20,000]
결제음이 울리자 유진은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큰손이 먼저 보여 주는군.”
[빛나는 훈수왕: 네가 뭔데 후원 없으면 눕는다고 협박해!]
[‘빛나는 훈수왕’이 후원 코인 2,000개를 보냈습니다!]
[빛나는 훈수왕: 이걸로 당장 잡아!]
“아직 멀었어.”
유진의 대답에 채팅창이 다시 불붙었다.
갑주수가 두 번째 장막을 부쉈다. 역사 직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지막 출구로 달렸다. 아린의 입술 사이로 얇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협회 경비대장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더는 못 봅니다. 우리가 들어가겠습니다.”
그의 시선은 마수가 아니라 유진의 카메라에 먼저 닿았다. 화면 앞에서 유진을 무능하게 만들 수 있다면 협회도 손해가 아니었다.
유진은 그 앞을 막지 않았다.
“가 봐. 대신 시민 뒤로 밀어 넣지는 마.”
경비대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갑주수의 어금니가 장막을 씹어 뜯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발을 멈췄다.
그 순간 금빛 후원창이 환승홀 천장까지 넓게 펼쳐졌다.
[‘구르는 은하’가 후원 코인 13,000개를 보냈습니다!]
[구르는 은하: 내 방송에서 다른 놈들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장면은 재미없다. 빨리 네 방식대로 끝내 봐.]
[긴급 후원 목표 달성! 20,000 / 20,000]
[고급 스트리머 기능 해금권 1회가 지급됩니다.]
유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2만 코인을 단숨에 던진 말투에는 소유욕이 묻어 있었다. 다만 지금은 그 소유욕도 잘 쓰면 된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진이 처음으로 카메라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유료 장면 시작하지.”
그는 검을 뽑았다.
장막 하나가 산산조각 나는 것과 동시에 유진의 몸이 앞으로 튀었다. 갑주수의 앞발이 내려찍히기 직전 그는 발을 비틀어 놈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검날이 갑주를 긁었다. 불꽃만 튀고 칼끝은 밀려났다.
협회 경비대장이 비웃듯 숨을 삼켰다. 하지만 유진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린아. 오른쪽 출구 불을 꺼.”
“뭐요?”
“지금.”
아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손가락을 꺾자 오른쪽 출구의 조명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갑주수의 투구가 빛을 좇듯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그 짧은 순간 검 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마력이 금속 바닥을 타고 세 번 울렸다.
쨍. 쨍. 쨍.
갑주수의 목덜미 갑주가 음파에 반응해 벌어졌다. 틈 안에서 붉은 구슬 하나가 맥박쳤다.
유진은 이미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균열에서 나오자마자 갑주 틈의 열 흐름을 읽었다. 처음 검을 튕긴 것은 시민들이 빠질 시간을 벌고 약점을 확신하기 위한 확인이었다.
“시선을 잘 돌리네.”
아린이 낮게 중얼거렸다.
유진은 대답 대신 장막이 남긴 푸른 빛을 검날에 감았다. 그는 갑주수의 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 붉은 핵을 향해 검을 올려쳤다.
콰득!
붉은 구슬이 갈라졌다. 갑주수의 투구 속에서 짐승의 울음이 아닌 쇠 긁는 비명이 터졌다.
거대한 몸이 바닥을 두 번 구르더니 균열 아래에서 멈췄다. 갑주 조각들이 검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보스 개체 ‘굶주린 갑주수’ 처치 완료.]
[권장 연출과 다른 방식의 처치가 기록됩니다.]
[현재 시청자: 12,304,118명]
[구르는 은하: 좋다. 돈 받자마자 바로 저런 걸 보여 주는 거지.]
환승홀에 남은 사람들의 숨죽인 침묵이 터져 나온 박수로 바뀌었다. 아린은 무너지려는 장막을 거두며 직원들이 모두 빠져나간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유진 곁으로 다가왔다.
“처음부터 그 핵을 봤어요?”
“확신은 없었어.”
“그런데 후원을 기다렸고요.”
“후원은 검을 강하게 만드는 돈이 아니야. 저쪽이 내 전투의 순서까지 사게 만드는 증거지.”
아린은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카메라를 흘겨보는 유진의 시선과 채팅창에 쏟아지는 숫자를 함께 본 뒤에는 더 묻지 않았다.
그때 유진의 눈앞에 새 창이 열렸다.
[고급 스트리머 기능 해금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해금 대상: 퀘스트 편집 대기열]
[주의: 시스템이 배정한 다음 콘텐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정 권한은 별도 조건을 요구합니다.]
유진은 손가락을 창 위에 멈췄다.
협회 경비대장이 뒤늦게 다가와 목소리를 높였다.
“무단으로 방송 시스템을 조작하고 시민 안전을 위험에 빠뜨린 책임을...!”
“방송 시스템?”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경비대장의 입이 멎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마 협회가 쓰는 마도 장치를 그렇게 부른 것뿐일 것이다.
유진은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들의 실수가 아니라 새로 열린 문이었다.
그는 해금권을 눌렀다.
[퀘스트 편집 대기열이 열립니다.]
[다음 콘텐츠가 강제 배정되었습니다.]
[‘신성한 귀환자의 증명’]
[참가 거부 시 지구 채널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유진은 입가를 천천히 올렸다.
협회도 제작진도 그가 영웅 흉내를 계속하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대본을 손에 쥔 쪽은 더 이상 저들만이 아니었다.
“아린아.”
“네.”
“오늘 밤 시간 비워 둬.”
유진의 눈앞에서 잠긴 수정 버튼이 희미하게 빛났다.
“다음 퀘스트는 내가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