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 마트 사장은 갑질이 하고 싶다]

5화 [줄은 누구의 것인가]
문 앞의 빈 물통
자동문 바깥에는 빈 물통이 먼저 모였다.
사람들은 물통을 발밑에 세워 두고 유리문 너머의 생수 진열대만 바라봤다. 누군가는 젖은 담요를 어깨에 둘렀고 누군가는 아이를 등에 업었다. 비가 그친 골목은 차가웠지만 마트 안에서 새어 나온 온기와 라면 냄새는 너무 선명했다.
“문 좀 열어 줘요.”
“물만 한 병이면 됩니다.”
“애가 있어요. 잠깐만 들여보내 주세요.”
목소리들이 겹치자 유리문이 얇아 보였다. 도진은 카운터 위에 올린 손을 천천히 폈다. 한꺼번에 들이면 통로부터 막힐 것이다. 굶주린 사람 열 명이 매대 앞에서 밀기 시작하면 가격표는 종이쪼가리가 된다.
[기본 구역 권장 동시 체류 인원: 12명.]
[권고: 입장 순서와 구매 한도를 공개하십시오.]
도진은 진열대를 훑었다. 생수와 컵라면은 충분히 보였지만 그것이 오늘 모인 사람 전부의 몫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기본 진열대는 정상 결제가 끝난 상품을 채워 줄 뿐이었다. 누군가가 계산도 하지 않고 끌어안으면 그만큼 매장은 약해진다.
그는 강두철을 불렀다.
“문 앞에서 줄 세워. 아이를 업었거나 다친 사람은 맨앞에서 상태부터 확인한다.”
두철이 군중을 바라봤다. 자동문 옆에 서 있는 큰 몸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사람들 몇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밀어붙이는 놈은?”
“말로 경고해. 손대지 마.”
두철의 눈썹이 움직였다.
“주먹 안 쓰고 줄을 세우라고?”
“그게 네 첫 근무다.”
도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손님도 직원도 줄을 지킨다.”
두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자동문 밖으로 나가 입구 바닥에 떨어진 간판 조각을 옆으로 밀어 냈다. 그가 손가락으로 빗물 고인 바닥을 가리켰다.
“한 줄로 서. 물통은 앞에 둬. 아이 있는 사람은 왼쪽이다.”
낮고 큰 목소리에 웅성거림이 멎었다. 두철은 누군가의 어깨를 잡아끌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 사이에 걸어 들어가 빈 공간을 가리키며 반복해서 말했을 뿐이다.
“먼저 온 순서대로 산다. 앞으로 밀면 맨뒤다.”
몇몇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움직였다. 그래도 줄은 생겼다. 도진은 그 모습을 보며 입구 화면에 문장을 추가했다.
[입장 순서: 대기열 순서. 긴급 식사 필요자는 상태 확인 후 우선 입장.]
[구매 제한: 1인 생수 2병, 즉석식 1개.]
문장 아래로 작은 확인창이 떠올랐다.
[공개 운영 항목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도진은 망설이지 않고 확인을 눌렀다. 오늘 물을 못 사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 제한도 없으면 첫 몇 사람이 전부 쓸어 갈 것이다.
그는 자동문을 세 사람만 들어올 만큼 열었다.
“가격표 보고 살 사람만 들어와.”
아이의 값
줄 맨앞에서 박순자가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
그녀의 등에 업힌 민우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아이의 볼은 붉었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순자가 등을 받친 손은 밤새 한 번도 쉬지 못한 사람처럼 떨렸다.
“어젯밤보다 더 뜨거워요. 물은 조금 먹였는데 아무것도 못 넘깁니다.”
도진은 아이의 축 늘어진 손을 보았다. 약은 없다. 병원도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마트 안에 있는 식품을 정확한 값으로 내놓는 것뿐이었다.
그는 즉석식 코너의 목록을 열었다. 화면 한쪽에 전에는 보지 못한 컵이 표시됐다. 쌀알을 부드럽게 불린 즉석죽이었다.
부드러운 쌀죽 1개 — 3포인트.
온수 사용 — 1포인트.
도진은 가격을 읽고 손을 멈췄다. 죽과 물이 필요한 아이 앞에서 4포인트라는 숫자는 잔인했다. 하지만 그 숫자를 지웠다가 순자에게만 다르게 받는 순간 뒤의 사람들은 줄 대신 부탁을 들고 올 것이다.
“죽 하나와 온수. 합쳐서 4포인트입니다.”
순자는 움켜쥐고 있던 손을 폈다. 손바닥에는 작은 하급 코어 하나와 1포인트가 남은 카드가 있었다.
“이거면 모자라죠.”
“코어를 환산하면 된다.”
도진이 카운터를 가리켰다.
“다만 가격은 모두에게 같다.”
순자는 잠시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애원하려던 입술이 다물렸다. 그녀는 코어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환산해 주세요. 죽이랑 온수요.”
[하급 코어 환산: 3포인트.]
[방문자 박순자 계정에 3포인트를 적립합니다.]
카드의 숫자가 넷으로 바뀌었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도진은 컵죽과 온수 컵을 건넸다. 매장 안쪽의 작은 테이블도 가리켰다.
“바로 먹이지 말고 한 숟갈씩 먹여. 토하면 잠깐 쉬었다가 다시 줘.”
의사는 아니었다. 그저 굶은 아이를 보며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말이었다.
순자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쥐었다.
“고맙습니다.”
“결제한 거야.”
도진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공짜로 받은 동정이 아니라 아이에게 먹일 것을 자기 돈으로 샀다는 사실이 순자의 등을 아주 조금 펴게 했다.
그때 뒤에서 남자가 앞으로 밀고 나왔다.
“애가 아프면 다 먼저 들어가냐? 나도 사흘째 못 먹었어.”
수습 경비의 손
남자는 말과 함께 박순자의 손바닥을 노렸다. 코어는 이미 환산됐지만 그의 손은 순자가 들고 있는 물컵 쪽까지 뻗었다.
강두철이 그 앞에 팔을 세웠다.
닿지는 않았다. 다만 남자가 한 발만 더 움직이면 두철의 넓은 가슴에 부딪칠 거리였다.
“줄 뒤로.”
“네가 뭔데?”
“여기 직원이다.”
두철은 목에 걸린 출입증을 들어 보였다. 검은 카드 아래에는 수습 보안팀장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남자는 비웃으려 했지만 두철의 얼굴을 알아보고 입꼬리만 일그러뜨렸다.
“전에는 사람 패서 뜯어 가더니 이제는 문지기냐.”
두철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손등의 핏줄이 솟았다. 줄에 선 사람들도 숨을 죽였다. 저 남자가 바닥에 쓰러지는 건 한순간일 거라고 모두가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두철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안 뜯는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네가 줄을 지키면 네 물통도 막지 않는다.”
도진은 자동문 옆 화면을 켰다.
[대기열 교란 및 방문자 물품 탈취 시도 감지.]
[경고 후 재대기 조치가 가능합니다.]
붉은 글자가 유리문 위에 떠올랐다. 남자는 그 글자와 두철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뒤로 가면 경고로 끝낸다.”
도진이 말했다.
“순자 씨에게 손대면 출입 제한 기록을 남긴다. 다음에는 문 앞에도 못 선다.”
“다 똑같이 굶는데 무슨 질서야.”
남자의 목소리는 화보다 두려움에 가까웠다. 맨뒤로 가면 물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도진은 생수 진열대를 가리켰다.
“그래서 제한을 건 거다. 앞사람이 두 병만 사면 뒤의 너도 한 병은 살 수 있어.”
줄 중간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맞는 말이야. 지난번 배급소는 앞줄이 다 들고 갔어.”
다른 사람이 물통을 발밑으로 끌어당겼다. 누구도 남자의 편을 들지 않았다. 아이를 업은 여자의 컵을 빼앗으려는 모습을 다들 보고 있었다.
남자는 한참 서 있다가 손을 거뒀다. 두철이 한 발 옆으로 비켜서자 그는 이를 악물고 대기열 맨뒤로 돌아갔다.
도진은 두철에게 낮게 말했다.
“다음에도 말로 해.”
“알아.”
대답은 짧았다. 그래도 두철의 손은 끝까지 주머니 밖에 있었다. 스스로 주먹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뜻처럼 보였다.
줄이 만든 식사
문은 세 사람씩 열렸다.
도진은 물통의 수와 손님들의 카드를 확인했다. 하급 코어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가진 것이 없어 물만 바라보다 돌아서는 사람도 있었다. 살 수 없는 물건에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 고철과 단추를 카운터에 올리는 노인에게도 같은 대답을 했다.
“코어 아니면 등록된 자원만 받습니다.”
노인은 허탈하게 손을 거뒀다. 도진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값을 받지 않고 물을 내보내면 다음 손님에게 줄 물도 사라진다. 그는 빈 물통을 든 노인에게 줄 끝을 가리켰다.
“코어가 생기면 다시 와요. 줄은 오늘 안에만 유지할 겁니다.”
누군가 생수를 네 병 집자 도진은 구매 제한 표지를 가리켰다.
“오늘은 두 병입니다.”
“내일 문을 닫으면?”
“그럼 내일 다시 오면 된다. 오늘 네 병을 가져가면 뒤의 사람이 못 산다.”
남자는 한동안 생수병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두 병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카드를 내밀었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소녀가 그 빈자리에 남은 병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줄의 소음이 조금 줄었다.
가격표와 제한은 유리문 위에 그대로 떠 있었다. 바뀌지 않는 문장은 욕설보다 오래 버텼다.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해도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는지는 알게 됐다.
박순자는 매장 구석 의자에 앉아 민우에게 묽어진 죽을 먹였다. 아이가 첫 숟갈을 삼키자 그녀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두 번째 숟갈 뒤에도 민우가 고개를 돌리지 않자 순자는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내일도 오겠습니다.”
“코어가 생기면 와.”
도진은 카운터에서 답했다. 잠시 뒤 그는 입구에 새로 쓴 문장을 바라봤다.
“아이 상태가 나빠지면 줄 앞에서 말하고.”
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 대우를 약속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가 아프다는 말을 할 자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표정이 달라졌다.
두철은 자동문 앞에서 마지막 손님의 물통을 확인했다. 어떤 남자가 두철의 어깨 너머로 매장을 엿보자 그는 손가락으로 가격표를 먼저 가리켰다.
“읽고 들어와.”
거친 목소리였지만 그 말 뒤에는 손이 따라오지 않았다.
[연속 정상 거래가 기록됩니다.]
[공개 운영 항목: 긴급 식사 우선, 1인 구매 제한.]
[방문자 신뢰 기록이 갱신됩니다.]
도진은 화면을 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마트는 식량을 쌓아 둔 방이 아니었다. 누가 먼저 손을 뻗고 누가 기다릴지를 정하는 곳이 되고 있었다.
그는 문밖의 줄을 한 번 더 세었다. 아직 물통을 든 사람이 열세 명 남아 있었다. 오늘 안에 모두를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골목 건너편 옥상 난간 위에 그림자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은 줄도 서지 않았다. 검은 방수포 아래에서 자동문과 가격표를 오래 내려다봤다. 한 명은 어깨에 긴 쇠막대를 메고 있었다.
두철이 그쪽을 보며 낮게 말했다.
“사장. 저놈들은 물 사러 온 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