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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11화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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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황제의 집무실 난입 사건

공식 등록식이 끝난 뒤 성황전 소공녀 궁의 일상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부드러운 양털 카펫 위에서 에일린은 비틀거리며 작은 발을 내디뎠다. 뒤뚱뒤뚱 균형을 잡으려 양팔을 활짝 벌린 모양새가 갓 부화한 오리 새끼 같았다.

"아기씨, 조금만 더요! 세 걸음만 더 오시면 됩니다!"

리세가 무릎을 꿇은 채 손뼉을 치며 응원했다. 마리안은 혹여 에일린이 넘어질세라 양손을 허공에 받치고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우우…… 으차!"

에일린은 온 힘을 다해 통통한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탁. 탁. 털썩.

다섯 걸음을 내딛는 데 성공한 에일린은 푹신한 카펫 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전혀 아프지 않은 포근한 착지였다.

'좋아, 하체 근력 훈련은 순조롭군.'

에일린은 만족스럽게 혀를 차며 입가를 닦았다. 전생에 잦은 야근과 운동 부족으로 허리 디스크를 달고 살았던 한유진의 영혼으로서는 이 건강하고 유연한 아기 육신이야말로 최고의 자산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벌써 다섯 걸음이나 혼자 걸으셨어요!"

마리안이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리세 역시 얼굴을 붉히며 손뼉을 쳤다.

"정말 대단하세요. 이러다 조만간 황궁 정원을 혼자 뛰어다니시겠어요."

시녀들의 찬사를 들으며 에일린은 턱을 으쓱했다. 그때 궁 밖 복도 쪽에서 수군거리는 시종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오늘도 집무실 분위기가 흉흉하다더군."

"벌써 사흘째 폐하께서 한숨도 주무시지 않고 서류를 검토 중이시라니. 아침에는 재무관 영감이 결재 서류를 들고 들어갔다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나왔다지 뭐야."

"등록식 날 오르딘 후작의 시종이 사라진 일과 국경의 에드릭 경 세력이 은밀히 움직인다는 첩보 때문에 황제 폐하의 기침(氣寢)이 완전히 멈추셨다네. 성황 기사단도 숨소리조차 못 내고 있어."

문밖의 대화를 들은 마리안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얼른 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꼭 닫아걸었다.

'사흘 밤샘 야근이라고……?'

에일린의 동그란 보라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전생 사회생활 8년 차의 직관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리 마력으로 단련된 철인이라 한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신경을 곤두세우면 어떻게 되는가.

'성격 파탄 난 상사가 결재판 던지는 것도 모자라 여긴 진짜 칼을 뽑아 드는 폭군 황제잖아.'

게다가 레오하르트는 고대의 마력 이상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언제 또 검은 기운이 폭주해 황성을 피바다로 만들지 알 수 없었다.

황제가 쓰러지거나 폭주하면 이 안락한 소공녀 궁의 최고급 분유와 양털 요람 그리고 에일린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진다.

'내 꿀 같은 직장 생활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최고 책임자의 멘탈 관리다.'

에일린은 결심을 굳히고 옆에 놓인 작은 찻상 쪽으로 기어갔다. 찻상 위에는 카시안이 가져다준 작은 스케치용 갱지와 숯 조각 크레용이 놓여 있었다.

에일린은 통통한 고사리손으로 갱지를 집어 들었다. 종이 위에는 조금 전 에일린이 서투른 손놀림으로 끄적여 둔 숯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커다란 곰 인형 같은 사람 하나, 그 옆에 칼을 든 작은 사람 하나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낀 아주 작은 찹쌀떡 같은 아이 하나. 바로 레오하르트와 카시안 그리고 자신을 그린 가족화였다.

에일린은 갱지를 야무지게 접어 가슴에 품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기씨? 어디 가시려고요?"

리세가 놀라 다가왔지만 에일린은 뒤뚱거리며 소공녀 궁 문 쪽을 향해 직진했다.

"아빠아!"

"예? 폐하를 뵈러 가신다고요?"

마리안이 소스라치게 놀라 에일린을 안아 들려 했다.

"안 됩니다 황녀님. 지금 집무실은 폐하의 노여움이 극에 달해 그 누구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들어가셨다가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시면……."

"아빠! 맘마!"

에일린은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단호한 눈빛이었다.


마리안과 리세가 안절부절못하며 뒤를 따르는 사이 에일린은 소공녀 궁의 문턱을 넘어 회랑으로 나섰다.

성황전의 중앙 회랑은 서늘하고 장엄했다. 높은 대리석 기둥 사이로 붉은 망토를 두른 성황 기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도열해 있었다.

뒤뚱뒤뚱.

앙증맞은 걸음마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맑게 울려 퍼졌다.

"……황녀 전하?"

기사들이 흠칫하며 시선을 내렸다. 근엄한 갑옷을 입은 거구의 사내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때 회랑 모퉁이에서 날렵한 발소리와 함께 카시안이 나타났다. 수련용 진검을 허리에 찬 소년 황태자는 복도 한가운데를 당당하게 행진하는 찹쌀떡 같은 동생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에일린?"

카시안은 황급히 달려와 무릎을 굽히며 에일린의 앞을 막아섰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바닥이 차갑다. 유모는 왜 아이를 안지 않고 걷게 둔 거지?"

"송구합니다 황태자 전하. 아기씨께서 하도 고집을 부리셔서……."

마리안이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에일린은 카시안의 제복 바짓가랑이를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특유의 필살기인 반짝이는 눈망울을 쏘아 올렸다.

"오빠아!"

"……윽."

카시안의 미간이 움찔하더니 귓바퀴가 금세 발갛게 물들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에일린을 안아 올렸다.

"오빠라고 부르면 다 되는 줄 아는군. 어디로 가려는 길이냐?"

에일린은 품에 쥐고 있던 갱지를 흔들며 집무실의 거대한 흑단나무 문을 가리켰다.

"아빠! 꼬꼬!"

"아버지의 집무실? 안 된다. 지금 아버지는 사흘 밤낮을 쉬지 못해 살기가 극에 달해 계신다. 펠릭스 백작과 원로원 대신들도 들어갔다가 기절할 뻔했어."

카시안은 고개를 저으며 소공녀 궁 쪽으로 발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에일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에일린은 카시안의 뺨에 말랑한 볼을 찰싹 비비며 처절하게 매달렸다.

"오빠, 아빠아…… 잉……."

금방이라도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 글썽이자 카시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젠장."

카시안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냉혹하고 엄격하기로 유명한 황태자의 철벽 방어가 불과 3초 만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다치면 내가 안고 바로 나올 거다. 절대 내 품에서 떨어지면 안 돼. 알겠어?"

에일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황태자 패스권 획득 완료.'

카시안은 에일린을 품에 안고 천천히 집무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을 지키던 근위 기사들이 질겁하며 말리려 했으나 카시안의 서늘한 눈빛에 결국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육중한 문이 열리자마자 집무실 내부의 숨 막히는 냉기가 회랑까지 뿜어져 나왔다.


황제의 집무실 내부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거대한 집무용 책상 위에는 국경 지대의 군사 보고서와 내통자 조사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중심에 레오하르트가 앉아 있었다.

검은 제복의 깃을 거칠게 풀어헤친 황제의 칠흑 같은 흑발은 헝클어져 있었고 적안에는 사흘간의 피로와 서늘한 살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관자놀이 부근에서는 희미한 검은 마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국경 수비대의 보고서인가?"

레오하르트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바닥을 긁었다.

"로엔 방계 놈들이 군사를 모으는 동안 수비대장은 술이나 퍼마시고 있었다는 소리군. 펠릭스."

"예, 예! 폐하!"

단상 아래에 엎드린 수석 의전관 펠릭스 백작과 재무관들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이따위 무능한 보고서를 올린 자들의 목을 성벽에 걸어라. 그리고 국경에 성황 기사단 제삼 부대를 즉시 파견해 반역의 싹을 모조리 베어 버려라."

"폐, 폐하! 자비를……! 국경 귀족들의 반발이……!"

"반발하는 자는 가문째 지워 버리면 그만이다."

레오하르트가 차갑게 검자루에 손을 얹는 순간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아버지."

카시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오하르트의 살벌한 시선이 문 쪽으로 꽂혔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대신들은 숨을 멈추었고 카시안조차 본능적으로 어깨를 굳혔다.

"허락 없이 집무실에 들어오지 말라 했을 텐데. 카시안, 네놈까지 내 인내심을……."

황제의 폭언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카시안의 품에서 꼬물거리던 핑크빛 털 뭉치 하나가 쏙 빠져나왔다.

탁. 탁.

에일린은 카펫 위에 안착하자마자 비틀거리는 아장걸음으로 황제의 책상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집무실 안에 있던 모든 대신과 기사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 저게 누구야?'

'수양황녀 전하께서 왜 이 지옥 같은 집무실에……!'

에일린은 대신들의 경악 어린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레오하르트만을 바라보며 걸었다.

뒤뚱거리며 걷던 에일린은 황제의 책상 모서리를 붙잡고 우뚝 섰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굳어 버린 레오하르트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번쩍 들었다.

"아빠아!"

순간 집무실 안을 짓누르던 묵직한 살기와 검은 기운이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레오하르트의 붉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피로와 분노로 물들어 있던 그의 시야에 천사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딸의 얼굴이 가득 찼다.

"……에일린?"

레오하르트의 목소리에서 조금 전의 서늘한 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에일린은 품에서 구깃구깃해진 갱지를 꺼내 황제가 결재하려던 피비린내 나는 군사 서류 더미 위에 탁 얹어 놓았다.

"아빠, 지부(집무) 그마안! 까까!"

앙증맞은 손가락이 서류 위에 놓인 낙서 종이를 툭툭 쳤다.


집무실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펠릭스 백작과 대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국의 황제가 사형 선고를 내리려던 서류 위에 아기가 낙서 종이를 얹어 놓다니 저건 즉결 처형감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일어난 일은 대신들의 상식을 완전히 박살 냈다.

레오하르트는 서류 위에 얹힌 낙서 종이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집어 들었다. 종이 위에는 서투른 숯가루로 그려진 세 사람의 그림이 있었다. 삐뚤빼뚤하지만 황제 자신과 카시안 그리고 에일린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황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것이 무엇이냐?"

"아빠, 오빠, 린린!"

에일린이 제 가슴을 통통 치며 배시시 웃었다.

레오하르트는 숨을 들이켜더니 책상 아래로 손을 뻗어 에일린을 번쩍 안아 올렸다. 거대한 품 안에 아기가 쏙 안기자 황제의 굳어 있던 어깨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에일린은 기다렸다는 듯 고사리손을 뻗어 레오하르트의 굳은 미간과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주었다.

"아빠, 코 자. 아야 하지 마."

따스한 체온과 함께 맑고 은은한 기운이 레오하르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극심한 두통을 씻어 내렸다. 사흘간 황제를 괴롭히던 지독한 이명과 살기가 눈 녹듯 사라졌다.

레오하르트는 멍하니 딸의 뺨을 쓸어내렸다. 수년 만에 느껴보는 깊고 완전한 평온함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황제는 에일린을 한 팔로 소중히 안은 채 책상 위의 서류들을 한쪽으로 싹 밀어 버렸다. 그리고는 바닥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대신들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집무는 여기까지다. 모두 물러가라."

대신들의 귀를 의심케 하는 명령이었다. 펠릭스 백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폐, 폐하? 국경 수비대 처벌과 에드릭 토벌 건은……."

"내일 다시 논의한다. 아이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니 당장 나가라."

"예! 예,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신들은 거의 눈물을 흘리며 일제히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의 눈에는 서류 더미 위에서 배시시 웃고 있는 에일린이 지옥에서 내려온 구원의 천사로 보였다.

대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집무실 문이 닫혔다. 카시안이 다가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아주 좋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이 그려 준 낙서 종이를 제복 안주머니에 소중히 접어 넣었다. 제국의 옥새보다도 더 귀한 보물을 다루는 손길이었다.

황제는 문밖의 시종을 향해 명했다.

"주방에 전해라. 황녀가 먹을 최고급 과자와 과일 푸딩을 지금 당장 집무실로 가져오도록."

"아빠, 최고오!"

에일린이 환호성을 지르며 레오하르트의 목을 끌어안자 피도 눈물도 없다던 정복자 황제의 입가에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

그날 성황전 집무실은 제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달콤한 놀이터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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