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10화: 황실 수양황녀의 이름
등록식 날 아침 성황전 소공녀 궁은 평소보다 일찍 깨어났다.
마리안과 리세는 에일린을 커다란 탁자 위에 올려 둔 채 작은 예복의 매무새를 수십 번이나 고쳤다. 우윳빛 비단 옷자락에는 은실로 별과 왕관이 수놓아져 있었다. 발목을 감싼 부드러운 신발에는 붉은 보석까지 박혀 있었다.
"아기씨, 팔을 조금만 들어 보세요. 네, 그렇게요."
에일린은 두 팔을 번쩍 들었다가 금세 하품을 했다. 고개가 꾸벅거리자 리세가 다급히 등을 받쳤다.
'사내 행사 하나 하려고 드레스 피팅을 몇 시간을 하는 거야. 전생에도 임원 보고 전에는 이 정도까지 안 했는데.'
리세가 조심스레 진주 단추를 잠그자 마리안이 눈가를 붉혔다.
"정말 예쁘십니다. 아기씨 어머님께서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말끝은 흐려졌다. 에일린은 마리안의 손등을 꼬물거리는 손으로 톡 건드렸다. 울지 말라는 뜻이었다.
마리안은 얼른 미소를 지으며 작은 손에 입을 맞췄다.
"그래요. 오늘은 울지 않겠습니다. 우리 아기씨께서 황녀님이 되시는 날이니까요."
문이 열리고 카시안이 들어왔다. 오늘의 그는 검은 정복 위에 황태자 문장이 새겨진 짧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허리에는 진검이 매달려 있었고 소년의 푸른 눈에는 평소보다 날 선 빛이 서려 있었다.
"아버지께서 곧 오신다. 밖에는 기사들이 충분히 배치됐다. 낯선 얼굴을 보면 바로 내게 알려라."
"오빠아."
에일린이 반갑게 두 손을 흔들자 카시안의 표정이 잠깐 풀렸다.
"기억은 하는군. 오늘은 사람을 향해 손을 뻗지 마라. 함부로 안기는 것도 안 된다."
'호위 지침이 아주 철저하시군요, 황태자님.'
에일린이 볼을 부풀리자 카시안은 헛기침을 했다. 그는 시녀가 들고 있던 작은 담요를 받아 에일린의 무릎 위에 덮어 주었다.
"홀 안은 춥다. 울면 바로 나올 거다."
그때 낮은 발소리와 함께 레오하르트가 들어섰다. 방 안의 시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에일린을 한참 내려다보더니 품에서 작은 은제 방울을 꺼냈다. 익숙한 반쯤 열린 눈과 세 갈래 선이 희미하게 빛났다.
"이것을 지녀라."
그는 방울을 예복 안쪽 끈에 단단히 묶었다. 에일린은 가슴께에서 살랑이는 방울을 꼭 쥐었다.
카시안이 방울을 흘끗 보았다.
"그 문양은 아직도 알아낸 것이 없습니까?"
"없다."
레오하르트의 눈빛이 잠시 차가워졌다.
"그러니 내 눈앞에서 벗어나게 할 생각도 없다."
에일린은 방울을 놓고 황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빠아."
레오하르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거대한 손이 아기 등을 받치는 순간 에일린의 불안도 조금 가라앉았다.
성황전 대등록 홀로 이어진 복도에는 붉은 융단이 길게 깔려 있었다. 양옆에는 성황 기사단이 검을 세운 채 도열했다. 카시안은 황제의 오른편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대등록 홀의 문이 열리자 수백 명의 귀족과 외국 사절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홀 중앙의 단상 위에는 황실 족보 장부와 금빛 인장이 놓여 있었다. 장부 가장자리에는 고대 아스카니아의 수양 조항을 뜻하는 세 갈래 선이 반복되어 새겨져 있었다.
에일린은 레오하르트의 품에서 그 무늬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울의 문양과 꼭 닮아 있었다.
'우연인가? 아니면 이 방울이 황실과 관련이 있다는 뜻인가?'
사절석의 비단 옷자락이 바스락거렸다. 귀족들은 어린아이 하나의 등록을 보러 왔다기보다 황제의 다음 칼날이 어디를 향할지 확인하러 온 사람들처럼 조용했다.
펠릭스 백작이 단상 아래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절차를 읽었다.
"황제 폐하의 칙령에 따라 에일린 로엔을 황실 수양황녀로 등록하고자 합니다. 이의가 있는 자는 제국법에 따라 지금 밝히십시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끝에서 회색 머리의 중년 귀족이 앞으로 나왔다.
"오르딘 후작이 황제 폐하께 아룁니다."
카시안의 손이 검집 위에서 멈췄다. 마리안은 먼 발치에서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오르딘 후작은 황태후 파벌의 대표 중 하나였다. 그는 예를 갖춘 척 고개를 숙였지만 입가에는 얕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소신은 아이를 해하려는 뜻이 없습니다. 다만 패전국 로엔의 직계가 수양으로 황실에 들어오는 일은 선례가 없습니다. 국경의 방계들이 이를 황실의 약점이라 여긴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이의의 전부인가?"
레오하르트가 물었다.
"아직 있습니다. 아이는 너무 어립니다. 자신의 뜻도 말하지 못하는데 수양 등록을 서두르는 것은 황실의 품위를 해칠 수 있습니다. 로엔 백작의 신병도 조사 중이니 등록을 미뤄 두시는 편이..."
"그만."
카시안이 차갑게 끊었다.
"그 입으로 내 동생의 자격을 논하지 마라."
"황태자 전하, 소신은 제국을 위해..."
"아버님께서 직접 정하신 일이다. 네가 제국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나."
귀족들 사이에 낮은 웅성거림이 퍼졌다. 오르딘 후작은 당황했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폐하, 로엔 방계의 에드릭 경은 이미 국경에서 지지자를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를 황실의 이름으로 감싸시면 훗날 피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레오하르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르딘 후작의 눈동자와 그 뒤에 선 시종들의 낯빛을 차례로 살폈다. 이의를 허락한 까닭은 법도를 존중해서가 아니었다. 누가 에드릭의 이름을 제 입으로 꺼내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적안이 오르딘 후작에게 머물렀다.
"피를 부른다고 했나."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귀족들은 저마다 숨을 죽였다.
"에드릭이 내 딸의 이름을 방패로 삼아 병사를 모은다면 그자는 이미 반역자다. 네가 그자의 뜻을 내 앞에서 대신 전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오르딘 후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소신은 단지 위험을 알리고자..."
"위험은 내가 정한다."
레오하르트의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아주 옅게 피어올랐다. 카시안은 즉시 에일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에일린은 울지 않았다. 황제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품 너머로 전해졌다. 그녀는 작은 손으로 그의 제복을 꼭 잡았다.
"아빠아."
한마디에 검은 기운이 멎었다.
에일린은 황제의 품에서 몸을 돌려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오빠가 보였다.
"오빠."
발음은 짧고 흐릿했지만 홀 전체가 들을 만큼 또렷했다.
카시안의 푸른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검에서 손을 떼고 에일린의 작은 손을 잡았다.
"그래. 내가 여기 있다."
그제야 에일린은 다시 레오하르트를 올려다보며 방울을 내보였다. 황제는 방울과 장부 가장자리의 문양을 번갈아 보았다.
"펠릭스. 황실법 제칠 조를 읽어라."
"예, 폐하. 황제는 자신의 권한으로 보호가 필요한 자를 수양 자녀로 정할 수 있습니다. 등록된 수양 자녀는 황실 혈통과 동등한 보호를 받습니다. 계승권을 제외한 모든 황실 권리도 보장됩니다."
"충분하다."
레오하르트는 오르딘 후작과 귀족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잘 들어라. 로엔의 혈통은 반역과 내통을 밝히기 위해 조사한다. 그러나 에일린의 지위는 조사할 사안이 아니다. 이 아이는 오늘부터 내 이름을 쓰고 내 성황전의 보호를 받는다."
그의 목소리가 둥근 천장에 부딪혀 울렸다.
"내 딸을 두고 충성의 시험을 하려는 자는 황실을 상대로 반역을 선택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에드릭의 병사든 황태후의 편지든 내 딸 앞에 들이밀 생각이라면 그 전에 유언부터 남겨라."
오르딘 후작이 입술을 달싹였으나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펠릭스 백작은 서둘러 장부를 단상 앞으로 옮겼다.
"등록을 진행하겠습니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을 장부 앞에 앉혔다. 금빛 인장 손잡이는 아기 손에 너무 컸다. 카시안이 조심스럽게 아래를 받쳤고 레오하르트가 그 위로 손을 덮었다.
세 사람의 손이 함께 인장을 눌렀다.
쿵.
붉은 밀랍 위에 아스카니아 황실의 문장이 선명하게 찍혔다.
"에일린 드 아스카니아. 황실 수양황녀로 등록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펠릭스 백작의 선언이 끝나자 기사단의 검들이 일제히 바닥을 울렸다. 사절들과 귀족들은 망설이다가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수양황녀 전하께 경배를 올립니다."
에일린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두 손을 흔들었다.
"아빠아! 오빠아!"
레오하르트의 표정이 누그러졌고 카시안은 귀끝을 붉혔다. 단단하던 홀의 공기가 그제야 조금 풀렸다.
등록식이 끝난 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을 안은 채 단상에서 내려왔다. 마리안은 눈물을 훔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황녀님."
리세는 기쁜 얼굴로 작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제 정말 황녀님이십니다."
'그래요. 이제 정식으로 회사... 아니 황실 최고 책임자 직속 막내가 됐다고요.'
에일린은 방울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은제 방울이 흔들릴 때마다 맑은 소리가 났다.
레오하르트는 그 소리를 듣고 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네 이름을 가볍게 부를 자는 없을 것이다."
카시안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누가 함부로 부르면 내가 먼저 듣겠다."
에일린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든든한 지원 부서가 양쪽에 서 있었다.
홀 가장자리에서 오르딘 후작의 시종 하나가 그 소리를 듣고 굳어 버렸다. 그는 방울의 문양을 보는 순간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뒤 그는 한산한 회랑의 그림자 속에서 낮게 속삭였다.
"문양을 확인했습니다. 별이 길을 잃는 밤에도. 그 물건이 황궁에 있습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검은 커튼 너머에서 누군가의 숨소리만 희미하게 스쳤다.
그때 성황전 쪽에서 에일린의 맑은 웃음이 울려 퍼졌다.
오늘 황궁은 새 수양황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