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29화: 흔들리는 이름표
수요일 오전 9시, 서울 역삼동 주식회사 루미너스 502호 대회의실.
길게 붙인 테이블 위에는 <투명한 그림자> 대본 스무 권이 빈틈없이 놓여 있었다. 대본마다 흰색 이름표와 색색의 포스트잇이 꽂혀 있었다.
유리 가벽 밖으로는 운영팀 직원들이 출입 명단을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윤서연은 리딩에 들어오기 전부터 모든 휴대전화 카메라 봉인을 점검하고 있었다.
“대본은 이 회의실 밖으로 가져가지 않습니다. 수정본은 개인 메일이 아니라 프로젝트 서버에서만 확인해 주세요. 변경 사항은 감독님과 제작팀이 동시에 승인합니다.”
단호한 목소리였지만 배우들을 옥죄는 규칙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한 장면과 한 줄의 대사가 가벼운 소문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울타리였다.
새로 합류한 방중현을 비롯한 조연 배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디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걸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지금 그들 앞에는 배역과 계약 조건이 분명히 적힌 대본이 놓여 있었다.
한이준 감독은 맨 끝자리에 앉아 대본 표지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이 대본을 쓴 지 삼 년이 됐습니다. 투자 미팅을 다닐 때마다 범인이 누구냐는 질문보다 주연을 누가 하느냐는 질문을 먼저 들었죠.”
그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겠네요. 혹시 제 작품이 여러분에게 부담이 되면 어쩌나 싶어서요.”
강시우는 감독의 맞은편에 앉아 대본을 펼쳤다.
“감독님은 장면을 책임지세요. 배우와 현장이 불안해지지 않게 만드는 건 회사가 할 일입니다.”
그때 윤서연이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 평소보다 굳은 표정이었다.
“대표님. 픽스온 쪽으로 표시된 추가 심사 요청서가 방금 도착했습니다. 해외 유통용 배우 자료를 먼저 달라는 내용입니다.”
시우는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픽스온 로고가 찍힌 안내 메일 아래에 낯선 파일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파일 제목은 ‘글로벌 세일즈 적합성 보완 요청’이었다.
서류를 훑던 시우의 눈길이 한 줄에서 멈췄다. 주연 배우의 해외 인지도와 대체 가능 배우군을 사전 검토한다는 문구였다.
아직 누구의 이름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누구를 겨눈 문서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시우는 태블릿을 덮었다.
“지금은 리딩부터 하죠. 대본보다 앞서는 심사는 없습니다.”
한이준 감독이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첫 장면입니다.”
오전 10시, 같은 장소.
최지환이 천천히 대본을 들어 올렸다. 그가 맡은 윤설은 안면인식장애를 가진 프로파일러였다. 타인의 얼굴은 흐릿하게 사라졌지만 누군가가 남긴 습관과 목소리와 침묵은 누구보다 정확히 붙잡는 인물이었다.
첫 장면의 윤설은 실종자의 어머니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자기 앞에 선 여자가 며칠 전 만난 상담사와 같은 사람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최지환은 첫 대사를 읽기 전 잠깐 눈을 감았다.
“죄송합니다. 방금 전에도 뵀다고 하셨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미안함보다 자기 자신을 향한 피로가 먼저 묻어났다.
“하지만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유나린이 실종자의 동생 역할로 대사를 받았다. 그녀는 언니의 손을 잡는 동작을 하려다 중간에 멈췄다. 상대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손을 놓지 못하는 사람의 망설임이었다.
“그럼 얼굴은 기억하지 마세요. 언니가 어제부터 물도 못 마셨다는 건 기억해 주세요.”
회의실 공기가 한순간 조여 들었다.
한이준 감독이 펜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는 섣불리 컷을 부르지 않았다.
최지환은 대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문장을 한 번 짚었다. 윤설이 상대의 얼굴 대신 손등의 상처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왼손 엄지 아래에 화상 자국이 있네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또렷해졌다.
“당신은 어제 주방에서 냄비를 잡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밥을 먹이려 했고요. 그런 사람은 동생을 버리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유나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울음을 짜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믿을 수 있게 찾아 주세요.”
“컷.”
한이준 감독이 마침내 말을 꺼냈다. 목소리가 잠긴 탓에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지환 배우님. 윤설이 상처를 발견할 때 상대를 위로하려고 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저 사람은 위로를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대신 놓치지 않는 사람이죠.”
최지환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정을 보여 주기보다 단서를 붙드는 쪽으로 가겠습니다.”
“나린 배우님은 지금처럼 해 주세요. 윤설이 사람을 읽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사람으로 대하는 장면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리딩이 시작되자 장면은 더 단단해졌다. 최지환은 억눌린 감정을 설명하지 않았다. 유나린의 떨리는 호흡과 손등의 상처를 붙드는 말 한마디가 윤설의 결핍을 드러냈다.
방중현이 형사반장 역으로 끼어들었다.
“윤설 씨. 피해자 가족 앞에서는 당신 방식대로만 굴지 마.”
최지환이 고개를 들었다.
“제 방식이라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단호한 한마디가 떨어지자 조연 배우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에게 모였다. 방중현은 대본을 덮은 채 짧게 웃었다.
“좋군요. 그 대사면 내가 왜 저 친구를 현장에 데리고 다니는지 알겠습니다.”
시우의 눈앞에 푸른빛 창이 떠올랐다.
[스타메이커 Lv.2: 리딩 앙상블 분석]
- 최지환 ↔ 윤설 싱크로율: 98%
- 유나린 ↔ 상대 배역 감정 호흡: 96%
- 조연 앙상블 안정도: A+
- 핵심 장면 예상 반응: "인물의 상처가 사건의 단서가 된다"
시우는 창을 조용히 지웠다. 숫자가 알려 준 것은 가능성이었다. 그 가능성을 장면으로 만든 것은 대본을 붙든 배우들과 감독의 선택이었다.
점심 무렵 마지막 장면이 끝났다. 아무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한이준 감독은 한참 뒤에야 대본을 덮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길 잘했네요.”
그가 유나린과 최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이 이 인물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최지환은 고개를 저었다.
“감독님이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저희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유나린도 작게 웃었다.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더 많이 찾아볼게요. 서두르지 않고요.”
회의실 곳곳에서 조심스러운 박수가 이어졌다. 처음엔 자신의 자리가 있는지 확인하던 배우들의 표정에도 조금씩 빛이 돌기 시작했다.
오후 1시 30분, 루미너스 501호 대표실.
윤서연은 리딩 때 보았던 추가 심사 요청서를 프린트해 책상 위에 펼쳤다. 옆에는 픽스온과 도담 필름이 체결한 공동 제작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원 계약 제12조입니다. 주연 배우의 변경은 감독과 공동 제작사 양쪽의 서면 동의가 있어야 하고요. 플랫폼은 변경을 요구할 수는 있어도 일방적으로 심사 절차를 만들 수 없습니다.”
시우가 심사 요청서의 뒷장을 넘겼다. 한 줄의 표현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윤설 역은 해외 세일즈 안정성 확보를 위해 대체 가능한 인지도 배우군을 병행 검토한다.’
“대체 가능한 배우군이라.”
시우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리딩도 보기 전에 배우를 상품 코드로 바꾸겠다는 말이군요.”
문이 열리고 오기태가 들어왔다. 손에는 간단한 조사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파일을 보낸 쪽을 확인했습니다. 픽스온 정식 계약 담당 부서가 아닙니다. 아르카 세일즈라는 외부 유통 컨설팅사가 첨부한 문서입니다.”
윤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
“그 회사가 왜 픽스온 명의를 쓰죠?”
“해외 판권 자문사로 등록돼 있어서 초안 검토를 맡을 수는 있습니다. 다만 이 템플릿의 결재 라인이 이상합니다. 아르카 세일즈 고문인 최도식이 최종 확인자로 들어가 있어요.”
오기태가 다음 페이지를 내밀었다.
“최도식은 2년 전까지 신성 엔터 전략기획본부의 해외사업 담당 임원이었습니다. 구관모 전무와 같은 본부에서 일했고요.”
대표실 안이 조용해졌다.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밖에 있던 최지환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회의실에 두고 온 대본을 찾으러 왔다가 마지막 말을 들은 듯했다.
“제 이름이 들어간 문서입니까?”
윤서연이 잠시 망설였다. 시우는 그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숨길 일은 아닙니다.”
시우는 문서를 최지환 쪽으로 밀었다. 최지환은 대체 배우라는 문장을 읽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때 그는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얼굴이라는 말에 무너진 적이 있었다. 오늘 리딩에서 얻은 확신이 종이 한 장 앞에서 다시 시험대에 오른 셈이었다.
“제가 이 작품에 해가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시우가 즉시 대답했다.
“이 문서는 당신의 부족함을 평가한 게 아닙니다. 루미너스가 가진 선택권을 빼앗으려는 절차예요.”
최지환이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지환 씨는 오늘처럼 연기하세요. 대신 계약과 판은 우리가 같이 지킵니다.”
잠시 후 최지환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저도 같이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제 자리를 정하는 걸 기다리지는 않겠습니다. 감독님과 나린 씨와 만든 장면으로 평가받겠습니다.”
시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다만 혼자 증명하려 들지는 마세요. 그게 저들이 원하는 방식이니까.”
수요일 저녁 7시, 청담동 신성 엔터테인먼트 전무실.
어두운 창밖으로 도심의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구관모는 아르카 세일즈에서 전달받은 리딩 현장 보고서를 읽으며 찻잔을 천천히 돌렸다.
‘주연 앙상블 우수. 감독 및 제작진 만족도 높음.’
그는 짧은 평가를 보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연기가 좋다는 건 중요하지 않아.”
맞은편 실무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리딩 반응이 좋으면 교체 요구가 무리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체를 요구하는 게 아니지.”
구관모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해외 유통 심사라는 이름을 붙이면 된다. 그들이 배우를 지키겠다고 고집할수록 공동 제작사가 리스크를 관리하지 못한다는 말이 따라붙어.”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배우 하나를 바꾸는 건 시작일 뿐이다. 루미너스라는 이름표를 공동 제작사 자리에서 떼어 내야지.”
같은 시각, 역삼동 루미너스 501호 대표실.
윤서연은 픽스온 본사 계약 담당자에게 보낼 확인 공문 초안을 화면에 띄웠다. 문서에는 외부 컨설팅사의 권한 범위와 추가 심사 요청의 발신 근거를 서면으로 답해 달라는 내용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시우는 마지막 문장을 확인했다.
“주연 변경과 관련한 모든 요청은 공동 제작 계약 제12조에 따라 처리한다. 이 문장도 넣으세요.”
“네. 오늘 안에 공식 채널로 발송하겠습니다.”
시우는 오기태를 바라보았다.
“기태 씨는 아르카 세일즈와 최도식 고문이 구관모 전무에게 보고한 기록을 찾으세요. 추측만으로 움직이지는 않겠습니다.”
오기태가 묵직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합법적으로 확인 가능한 계약 자문 이력과 접촉 기록부터 모으겠습니다.”
잠시 뒤 대표실 모니터에 새 메일 알림이 떴다.
발신자는 아르카 세일즈였다.
‘내일 오전 9시. 해외 유통 적합성 심사 화상회의를 진행합니다. 공동 제작사 대표와 윤설 역 배우의 참석을 요청합니다.’
유나린과 최지환이 문가에서 그 문장을 함께 읽었다.
최지환이 먼저 시우를 바라보았다.
“가시겠습니까?”
시우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야죠.”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이번에는 누가 누구의 이름표를 흔드는지 확인할 차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