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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30화

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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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이름표는 계약서에 있다

목요일 오전 8시 20분, 서울 역삼동 주식회사 루미너스 501호 대표실.

윤서연은 회의실 중앙 모니터에 공동 제작 계약서와 아르카 세일즈의 요청서를 나란히 띄웠다. 제12조 두 번째 문단에는 주연 배우 변경에 감독과 공동 제작사 양쪽의 서면 동의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반면 요청서에는 ‘해외 판매 안정성을 위한 대체 배우군 검토’라는 문장이 선명했다.

최지환은 그 문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래전 들었던 말들이 다시 떠올랐다.

시장이 원하는 얼굴이 아니다.

연기는 괜찮지만 주연으로 팔기 어렵다.

“제가 회의에서 연기를 설명하겠습니다.”

“저들이 원하는 건 설명이 아닐 겁니다.”

강시우가 서류를 덮었다.

“우리 배우를 부족한 사람처럼 세워 놓고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겁니다. 먼저 물어야 할 건 지환 씨의 가치가 아니라 저들의 권한입니다.”

문가에 서 있던 유나린이 대본을 들어 보였다.

“그래도 장면은 준비해야죠. 윤설이 얼굴 대신 손등의 상처를 기억하는 장면을 보여 주면 돼요. 지환 오빠 혼자 증명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든 장면으로요.”

최지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연이 회의 자료를 정리했다.

“픽스온 본사 계약 담당자에게 보낸 권한 확인 공문은 접수됐습니다. 답변은 아직 없어요. 회의 녹화와 참석자별 발언 기록은 남기겠습니다.”

“좋아요. 상대가 요구하는 항목은 하나씩 다시 말하게 하세요.”

시우는 최지환에게 녹화 동의 안내문을 내밀었다.

“오늘은 연기를 변론하지 않습니다. 계약서에 없는 권한을 행사하려는 사람부터 드러냅시다.”

최지환이 안내문에 서명했다. 서명 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전 9시, 같은 장소.

화상회의 화면에 아르카 세일즈 고문 최도식과 해외 세일즈 담당자가 나타났다. 최도식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 자리는 누구를 교체하기 위한 회의가 아닙니다. 해외 판매를 안정시키기 위한 실무 검토입니다.”

시우는 녹화 표시를 확인했다.

“그럼 아르카 세일즈가 픽스온을 대신해 캐스팅 요청을 전달할 권한이 있습니까?”

“저희는 픽스온의 해외 유통 자문사입니다. 현지 바이어의 요구를 가장 먼저 접하죠.”

“권한이 있다는 답은 아니군요.”

윤서연이 화면을 공유했다. 요청서에는 픽스온 로고가 있었지만 발신 주소는 아르카 세일즈의 도메인이었다.

“픽스온 계약팀의 결재 번호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연 배우 대체 검토와 공동 제작사 적합성 재평가가 한 문서에 들어 있습니다.”

해외 세일즈 담당자가 말했다.

“투자 집행 능력과 제작 경험은 해외 판매의 기본 항목입니다.”

“그 항목이 왜 캐스팅 교체 요청과 묶였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시우는 화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루미너스의 투자금은 에스크로 계좌로 집행되고 있습니다. 한성 캐피탈 지급 보증 자료도 제출했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게 아니라 확인할 의지가 없는 것 아닙니까?”

최도식이 끼어들었다.

“최지환 배우의 국내 반응은 좋지만 해외 인지도는 제한적입니다. 대체 배우군을 검토해 두면 판매에 도움이 됩니다.”

최지환의 턱이 굳었다. 시우는 그를 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대체 배우군을 요구한 주체와 계약상 근거를 서면으로 보내 주세요. 구두로는 어떤 배우도 상품 목록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일은 아닙니다.”

“배우의 이름을 바꾸는 일입니다. 예민해야 합니다.”

그때 새로운 참가자가 화면에 들어왔다. 픽스온 콘텐츠계약팀 박지은이었다.

“루미너스에서 보낸 권한 확인 공문을 전달받았습니다. 이 회의에 참석해야 할 것 같아 접속했습니다.”

박지은은 문서를 확인한 뒤 최도식을 향해 말했다.

“아르카 세일즈는 해외 판매 자문을 맡고 있지만 캐스팅 변경이나 공동 제작사 지위 재평가를 결정할 권한은 없습니다. 이 요청은 픽스온의 공식 지시로 발송된 문서도 아닙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럼 요청은 무효라는 뜻입니까?”

해외 세일즈 담당자가 물었다.

“캐스팅 변경과 관련한 부분은 공식 검토 대상에서 제외하겠습니다. 다만 아르카가 별도로 보낸 공동 제작사 적합성 자료는 출처를 확인해야 합니다.”

시우가 최도식을 바라보았다.

“루미너스는 그 자료를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어느 수신처에 보냈는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해외 바이어에게 전달되는 자료는 자문사의 업무 범위입니다.”

“그럼 루미너스의 투자 구조를 평가한 근거부터 공개하십시오.”

최도식은 대답하지 못했다. 윤서연은 그 침묵까지 회의록에 기록했다.

박지은이 정리했다.

“아르카 세일즈는 금일 중 캐스팅 관련 추가 요청을 중단해 주세요. 제작사 평가 자료는 픽스온 공식 계약팀과 콘텐츠팀을 거쳐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해외 판매가 늦어지면 그 책임은 공동 제작사도 나눠야 합니다.”

최도식이 마지막으로 압박했다.

“책임을 말하려면 먼저 권한부터 공개하십시오.”

시우가 차갑게 답했다.

“오늘 확인된 건 하나입니다. 최지환 배우의 캐스팅을 바꿀 계약상 근거는 없습니다.”

회의가 끝났지만 최도식의 얼굴은 한동안 화면에 남아 있었다. 윤서연이 녹화 파일을 저장한 뒤에야 창이 닫혔다.


오전 11시 30분, 루미너스 502호 소회의실.

박지은은 공식 계약팀 계정으로 메일을 보냈다.

‘윤설 역 최지환, 실종자 동생 역 유나린의 캐스팅은 기존 계약대로 유지됩니다. 해외 세일즈 자료에 사용할 캐릭터 소개 영상과 영문 자막본을 금일 오후까지 부탁드립니다.’

최지환은 메일을 몇 번이나 읽었다.

“유지된다고 했습니다.”

“배우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말입니다.”

시우가 말했다.

“그래도 공식 문서로 받아낸 건 지환 씨가 자리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최지환은 고개를 저었다.

“대체 배우라는 글자가 떠 있는 동안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저는 거의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자리를 뜨지 않았잖아요.”

유나린이 대본을 펼쳤다.

“이번에는 장면으로 답하면 돼요.”

한이준 감독이 수정 대본을 들고 들어왔다.

“90초면 충분합니다. 윤설이 얼굴을 못 알아본다는 설명은 빼죠. 상대의 손을 보고 무엇을 알아내는지 보여 주겠습니다.”

카메라 앞에 선 최지환의 눈앞에 푸른빛 창이 떠올랐다.

[스타메이커 Lv.2: 해외 소개 영상 적합 장면 분석]

- 윤설의 결핍과 사건 단서 동시 전달: 4.7/5
- 최지환 ↔ 윤설 장면 싱크로율: 97%
- 유나린의 감정 반응 유도 안정도: 95%
- 권장 포인트: 설명보다 관찰, 눈물보다 기다림

시우는 창을 닫았다.

“지환 씨는 상대 얼굴을 보려고 하지 마세요. 손가락과 호흡만 따라가면 됩니다.”

“나린 씨는요?”

“윤설이 알아보지 못한다는 걸 알고도 손을 거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믿어 달라고 설득하지 말고 믿을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하세요.”

첫 촬영에서 최지환은 대사를 너무 빨리 끝냈다. 한이준 감독이 손을 들었다.

“윤설은 상대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아도 바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 침묵이 이 사람의 결핍입니다. 나린 배우님은 그 침묵을 견뎌 주세요.”

두 번째 테이크에서 최지환은 유나린의 손등에 남은 붉은 자국을 발견하고도 곧장 말하지 않았다.

유나린이 한 걸음 다가갔다.

“얼굴은 기억하지 마세요. 언니가 어제부터 물도 못 마셨다는 건 기억해 주세요.”

최지환은 손등의 상처를 가리켰다.

“왼손 엄지 아래에 화상 자국이 있네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밥을 먹이려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동생을 버리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유나린은 울지 않았다. 대신 상대가 알아보지 못하는 얼굴 앞에서 손을 더 단단히 내밀었다.

“그 말을 믿을 수 있게 찾아 주세요.”

아무도 컷을 외치지 않았다.

장면이 끝난 뒤 한이준 감독이 숨을 내쉬었다.

“이건 배우 소개 영상이 아니라 작품의 첫 문장입니다.”

최지환은 모니터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인물이 오히려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는 장면이었다.

“저도 이 장면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믿으세요.”

시우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시장이 아니라 장면이 먼저 대답하게 합시다.”


오후 5시 40분, 루미너스 501호 대표실.

소개 영상과 영문 자막본을 보낸 지 두 시간 만에 픽스온 공식 세일즈팀에서 회신이 왔다. 박지은의 메일에는 영상 평가와 함께 아르카 세일즈가 제출한 자료 일부가 첨부되어 있었다.

오기태가 파일 첫 장을 확대했다.

‘루미너스 기획은 제작 투자 경험이 제한적이며 공동 제작사 지위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함.’

그 아래에는 루미너스의 투자 집행이 지연될 수 있다는 문장이 있었다. 한성 캐피탈 지급 보증서 일부와 <블랙 아웃> 협찬금 집행 예정표가 출처처럼 붙어 있었다.

윤서연이 원본 폴더를 열었다.

“예정금과 집행금을 같은 항목처럼 섞었습니다. 원본을 본 사람이 일부러 오해하게 만든 겁니다.”

“누가 원본에 접근했는지는요?”

“루미너스 서버에는 외부 반출 기록이 없습니다. 픽스온에 보낸 자료와 아르카 자료가 다른 경로로 합쳐진 것 같습니다.”

오기태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확인했습니다. 아르카가 오늘 오전 세 곳의 해외 바이어에게 같은 파일을 보냈습니다. 참조 수신인에는 최도식 고문과 신성홀딩스 계열 투자 자문사 직원이 들어가 있습니다.”

구관모의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했다.

“배우를 바꾸지 못하면 회사를 불안정하게 보이게 만든다.”

최지환이 조용히 말했다.

박지은에게서 새 메일이 도착했다.

‘픽스온 공식 검토 결과 최지환·유나린의 캐스팅은 유지됩니다. 아르카 세일즈의 캐스팅 관련 요청은 중단합니다. 비공식 판매 자료의 전달 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접근 로그와 자료 출처에 대한 공동 점검을 요청합니다.’

배역은 지켰다. 하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윤 팀장님은 계약서와 투자 집행 원본을 정리해 주세요. 아르카가 퍼뜨린 왜곡본과 한 줄씩 대조합시다.”

“네.”

“기태 씨는 수신 목록의 회사 관계와 접촉 기록을 확인하세요. 합법적으로 확인 가능한 자료부터요.”

오기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린은 최지환 옆에 섰다.

“지환 오빠. 캐스팅 유지됐어요.”

최지환이 짧게 웃었다.

“이번에는 이름표를 누가 붙였는지 알 것 같아.”

시우는 모니터에 뜬 공식 요청을 확대했다.

‘해외 판매 자료 접근 로그 확인 요청.’

아르카 세일즈의 첫 칼날은 최지환을 향했다. 실패한 칼날 뒤에는 픽스온 자료망을 이용해 루미너스의 제작 지위를 흔든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자료가 어디서 새어 나갔는지 확인합니다.”

루미너스의 회의실 불은 밤이 깊도록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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