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세 베테랑, 고교 야구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6화: 먼저 읽은 손끝
동해고 포수는 이닝 교대가 되자마자 2루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백승진은 그 짧은 동작을 보고 헬멧을 썼다.
1회 초에 서진호의 발을 잡힌 동해고는 이제 포수의 팔로 되갚을 생각이었다.
청원고 1번 타자가 우전 안타로 나갔다. 2번의 번트가 1루수 정면으로 굴렀고 주자는 2루까지 갔다.
2사 2루.
승진이 타석에 들어서자 동해고 내야가 움직였다.
유격수는 평소보다 한 걸음 2루 쪽에 붙었다. 3루수는 라인 안을 비워 놓고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좌중간 수비도 유난히 깊었다.
‘잡아당기는 타구는 막고 포수 송구로 2루 주자까지 묶겠다는 거군.’
승진은 홈플레이트 뒤의 포수까지 훑었다.
포수는 사인을 낸 뒤 미트를 허벅지 안쪽에 숨겼다. 투수가 던질 공을 최대한 늦게 보여 주려는 버릇이었다. 그런데 수비 위치가 이미 답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공을 유도해 땅볼을 만들 생각이다.
동해고 투수는 세트 자세에서 글러브를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몸쪽 빠른 공을 던질 때만 나오는 버릇이었다.
초구가 안쪽 높은 곳으로 날아왔다.
승진은 배트를 움직이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포수는 공을 돌려받으며 아주 낮은 곳에 미트를 댔다. 바깥쪽 낮은 슬라이더를 유인해 승진의 배트를 끌어내려는 자리였다.
승진은 투수의 발을 봤다.
오른발 뒤꿈치가 먼저 들렸다. 슬라이더를 던질 때만 체중이 급하게 앞으로 쏠리는 습관이었다.
‘수비를 이렇게 깔았으면 공 하나쯤은 믿고 들어오겠지.’
승진은 배트를 짧게 쥐고 기다렸다.
공이 손을 떠나는 순간 왼발을 디뎠다. 낮게 들어오던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서 조금 더 휘었다.
따악!
배트 중심에 걸린 타구가 좌중간으로 솟았다.
깊게 물러나 있던 중견수가 뒤돌아 달렸다. 그러나 공은 담장 위 광고판을 맞고 튀었다.
“넘어갔다!”
2루 주자가 홈을 밟고 승진이 뒤를 이었다.
청원고 더그아웃이 들썩였다.
승진은 홈을 밟으며 동해고 포수를 봤다. 포수는 입술을 깨문 채 투수에게 공을 던져줬다.
“내 송구 보고 뛰지 마라.”
입 모양이 그렇게 읽혔다.
승진은 헬멧을 벗어 더그아웃에 던졌다.
“저쪽도 급해졌네요.”
강두식은 대답 대신 점수판을 봤다.
2대 0.
하지만 동해고는 다음 이닝에 곧바로 되물었다.
2회 초 선두타자가 번트 안타로 나갔다. 다음 타자는 초구에 강공을 했다. 타구는 1, 2루 사이를 빠져나갔다.
무사 1, 3루.
현우가 공을 쥔 손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승진은 바로 마운드로 갔다.
“팔꿈치요?”
“아니.”
현우는 홈플레이트를 보며 낮게 말했다.
“네가 앞으로 나가서 잡을 것 같아서. 공이 높았어.”
승진은 잠깐 말이 없었다.
현우가 자기 팔이 아니라 포수를 먼저 걱정한 것이다. 그 마음이 고마웠지만 포수가 투수의 망설임 때문에 다치면 아무 의미도 없었다.
“내가 잡을 공은 내가 고릅니다.”
승진은 현우의 글러브를 한 번 두드렸다.
“선배는 낮게만 던져요. 내가 나가면 그건 내 선택이에요.”
동해고 7번 타자가 배트를 앞으로 길게 내밀었다. 3루 주자는 발끝을 홈 쪽으로 열었다.
스퀴즈다.
승진은 현우에게 바깥쪽 낮은 직구 사인을 냈다. 타자가 번트를 대면 포수 앞으로 굴러올 코스였다.
현우의 공이 낮게 깔렸다.
툭.
번트 타구가 홈플레이트 앞에 죽었다.
승진은 마스크를 벗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공을 잡자마자 1루를 보려던 몸을 멈췄다.
3루 주자가 이미 뛰고 있었다.
승진은 일부러 공을 쥔 오른팔을 뒤로 젖혔다. 1루 송구가 나올 거라 믿은 주자가 마지막 두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그 순간 승진의 손목이 꺾였다.
송구가 홈플레이트 앞을 가르며 달려온 주자의 무릎 앞에 꽂혔다. 승진은 공을 다시 받아 태그를 밀어 넣었다.
“아웃!”
관중석이 잠시 조용해졌다.
1루 주자는 2루까지 갔고 번트 타자는 살아나갔다. 그래도 동해고가 가장 원하던 점수는 막혔다.
현우가 마운드에서 주먹을 쥐었다.
승진은 곧바로 사인을 냈다. 몸쪽 낮은 직구.
8번 타자의 배트가 늦게 나왔다.
딱.
파울.
다음 공은 같은 팔 궤도에서 나온 느린 공이었다. 타자가 앞으로 쏠린 순간 공은 무릎 밑으로 떨어졌다.
딱.
유격수 정면 땅볼.
태섭이 2루를 밟고 1루로 던졌다.
“더블 플레이!”
동해고 더그아웃에서 헬멧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현우는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며 승진에게 물었다.
“방금 공 높았던 건 말 안 했으면 몰랐지?”
“알았을 겁니다. 그래도 말해 준 게 더 좋고요.”
“왜?”
“그러면 다음 공을 같이 고를 수 있으니까요.”
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글러브를 끼운 왼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경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동해고는 4회에 안타와 희생플라이로 한 점을 냈다. 5회에는 서진호가 내야안타로 출루한 뒤 2루를 훔쳤다.
승진은 서진호가 세 번째 리드폭부터 스타트를 끊는 걸 읽었다. 그러나 현우의 공이 낮게 들어온 탓에 무리한 송구를 하지 않았다.
다음 타자의 중전 안타로 동점 주자가 홈을 밟았다.
2대 2.
더그아웃이 조용해지자 승진은 현우의 마스크를 벗겨 주며 말했다.
“도루 하나 뺏긴 건 잊어요. 낮은 공으로 맞혀서 만든 점수예요.”
현우가 숨을 골랐다.
“다음엔 안 내줘.”
“그 말은 공 높이지 말고요.”
“알았어.”
6회 말 청원고가 다시 앞서갔다.
태섭이 좌측 선상으로 2루타를 치고 3루까지 간 뒤 상대의 폭투에 홈을 밟았다.
3대 2.
6회 초 마지막 수비에서 현우의 공은 처음보다 무뎠다. 낮은 직구가 미트에 들어와도 소리가 가벼웠다.
두 아웃 뒤 동해고 4번이 타석에 섰다.
투구 수는 여든여덟 개.
현우가 고무판 뒤를 밟으며 말했다.
“하나만 더 잡을게.”
승진은 검지를 접었다.
“이 타자까지만요.”
강두식이 더그아웃 난간에서 소리쳤다.
“잡으면 바로 내려와!”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공은 낮은 직구였다.
팡.
스트라이크.
두 번째 공은 바깥쪽으로 빠졌다. 현우가 공을 받으려던 승진을 봤다. 팔꿈치를 만지지는 않았다.
승진이 느린 공 사인을 냈다.
동해고 4번이 고개를 젖혔다. 직구가 올 상황이었다.
현우의 손에서 공이 나왔다. 직구처럼 보이던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서 힘없이 아래로 사라졌다.
타자의 배트가 공 위를 스쳤다.
헛스윙.
마지막 공도 같은 느린 공이었다.
타자는 이번에는 기다렸다가 배트를 냈다.
딱.
타구가 3루수 앞에 굴렀다.
“아웃!”
현우는 마운드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승진이 다가가 공을 건넸다.
“내려가요.”
“아직 던질 수 있어.”
“알아요. 그래서 지금 내리는 겁니다.”
강두식이 직접 마운드에 올라왔다. 감독은 현우의 얼굴과 왼팔을 번갈아 봤다.
“통증은?”
“없습니다.”
“그럼 됐어.”
강두식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네가 이긴 거다.”
감독은 태섭을 불렀다.
“7회부터 네가 막아.”
태섭은 마운드에 오르며 승진에게 속삭였다.
“느린 공 말고 다른 걸로 끝내면 안 되냐?”
“상대가 다른 걸 기다리면요?”
태섭은 투덜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9회 초.
태섭은 선두타자에게 볼넷을 내줬다. 다음 타자는 우익수 앞에 짧은 안타를 떨어뜨렸다.
무사 1, 2루.
동해고는 희생번트로 주자들을 한 베이스씩 보냈다.
1사 2, 3루가 되자 승진은 마운드로 나갔다. 태섭의 손가락 끝이 조금 굳어 있었다.
“직구만 던지고 싶죠?”
“응.”
“저쪽도 그걸 알아요.”
다음 타자는 좌익수 희생플라이를 날렸다.
3대 3.
동해고 더그아웃이 다시 살아났다.
승진은 태섭의 눈을 봤다. 아까보다 더 흔들렸지만 미트가 있는 곳은 똑바로 보고 있었다.
“한 점은 줬어요. 여기서 끝내면 됩니다.”
2사 2루.
서진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동해고 벤치가 움직였다. 서진호는 2루 베이스에서 발을 떼고 승진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승진은 더그아웃의 손짓을 봤다. 한 번은 번트. 다음은 강공.
둘을 섞는 작전이었다.
그는 태섭에게 시간을 끌지 말라는 신호를 냈다. 그리고 낮은 느린 공을 요구했다.
태섭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승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이 날아가자 서진호는 번트 자세를 풀며 강공으로 바꿨다. 그러나 공은 생각보다 일찍 떨어졌다.
딱.
타구가 유격수 앞에 굴렀다.
유격수가 몸을 낮춰 잡고 1루로 던졌다.
“아웃!”
동점이 된 탓에 그라운드에는 환호보다 숨죽인 정적이 먼저 내려앉았다.
9회 말 청원고의 공격은 길지 않았다.
선두 타자가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태섭이 번트로 주자를 2루에 보냈고 3번 타자는 고의사구를 얻었다.
1사 1, 2루.
승진이 타석에 들어서자 동해고 포수는 다시 낮은 곳에 미트를 댔다. 내야는 병살을 위해 가운데로 붙었다.
승진은 초구 바깥쪽 공을 버렸다.
두 번째 공에 투수의 글러브가 배꼽 아래에서 멈췄다. 느린 공을 던질 때 나오는 낮은 손 위치였다.
‘이번에는 넘길 필요 없다.’
승진은 공을 끝까지 끌어들였다.
딱.
타구가 전진한 3루수 옆을 지나 좌익수 앞에 떨어졌다.
2루 주자가 홈으로 파고들었다.
“세이프!”
청원고 선수들이 승진에게 달려들었다.
4대 3.
끝내기 안타였다.
현우는 불펜에서 달려와 승진의 어깨를 잡았다.
“결승이다.”
승진은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두식은 선수들이 조금 가라앉은 뒤 말했다.
“오늘은 투구 수대로 끝낸다. 결승 준비는 여기서부터다.”
그 말에 승진은 처음으로 감독을 똑바로 봤다.
성북고가 반대편 4강을 이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결승 선발은 우완 장도혁.
승진은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천천히 굴렸다.
전생의 결승전에서는 그 투수의 공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