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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베테랑, 고교 야구부터 다시 시작합니다1화

40세 베테랑, 고교 야구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40세 베테랑, 고교 야구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시놉시스

KBO 2군을 전전하다 40세에 방출 통보를 받은 백승진.

포수로도 대타로도 끝났다는 말을 들은 밤 그는 낡은 고교 야구공을 쥔 채 잠든다.

다시 눈을 뜬 곳은 2002년 황금사자기 8강전 더그아웃.

17세의 몸과 24년 치 포수 경험을 동시에 가진 백승진은 같은 패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타석으로 향한다.

1화: 방출 통보

"백승진 선수. 여기까지 합시다."

운영팀장의 목소리는 겨울 훈련장보다 차가웠다.

백승진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봤다. 방출 통보서. 깔끔한 글자였다.

글자만 깔끔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스무 해 넘는 시간은 생각보다 쉽게 접혔다.

"포수 셋째 옵션도 이제는 어렵습니다. 대타로도 어린 선수들한테 기회를 줘야 하고요."

"알겠습니다."

대답은 빨랐다.

화를 내봤자 달라질 게 없었다. 2군 사무실 벽에는 올해 신인 포수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모두 팔팔했다. 어깨가 가볍고 무릎이 멀쩡하고 눈빛에 겁이 없었다.

승진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전이었다.

"혹시 코치 자리라도..."

운영팀장이 말을 흐렸다.

승진은 웃었다.

"됐습니다. 선수 못 하게 됐다고 바로 선생질하면 애들한테 미안하죠."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압니다."

그는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무릎이 먼저 삐걱거렸다. 허리가 그다음이었다. 마흔 살 포수의 몸은 은퇴를 선언하기 전부터 이미 은퇴를 알고 있었다.

복도 끝 라커룸은 비어 있었다.

승진은 낡은 장비 가방을 열었다. 포수 미트는 손바닥 모양으로 푹 꺼져 있었다. 테이핑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보호대 아래로 누렇게 바랜 공 하나가 굴러나왔다.

청원고 시절 쓰던 연습구였다.

실밥 한쪽이 헤져 있었다. 검은 매직으로 적힌 날짜는 거의 지워졌지만 마지막 숫자는 남아 있었다.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목 안쪽이 쓰게 말랐다.

황금사자기 8강전.

8회 말 2사 1루. 한 점 뒤진 상황. 상대 에이스의 슬라이더에 헛스윙을 하고 돌아섰던 타석.

그날 이후로 백승진은 늘 조금씩 늦었다.

프로 지명도 늦었고 1군 기회도 늦었다. 주전 포수 자리는 남의 것이었고 대타 한 타석은 언제나 마지막 시험 같았다.

버텼다.

누구보다 오래 버텼지만 버틴 것만으로 전설이 되지는 못했다.

라커 문을 닫는데 손이 잠깐 멈췄다. 안쪽 거울에 비친 얼굴은 지쳐 있었다. 수염 자국은 짙고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 얼굴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이게 끝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그는 혼자 술을 마셨다.

원룸 바닥에는 방출 통보서와 고교 야구공이 나란히 놓였다. TV에서는 봄 캠프 소식이 흘렀다. 해설자는 어린 포수의 프레이밍이 좋다며 웃었다.

승진은 웃지 못했다.

"나도 저 나이 땐 공이 보였는데."

그는 야구공을 손에 쥐었다. 손가락 끝이 실밥을 따라 움직였다.

포심. 투심. 슬라이더. 체인지업.

수천 번을 받은 공의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상대 타자의 숨소리. 투수의 손목 각도. 벤치에서 나오는 사인. 그 모든 걸 읽고도 자기 인생만은 읽지 못했다.

"한 번만 다시 서면 안 되나."

농담처럼 말했지만 목소리가 갈라졌다.

다시 서고 싶은 타석은 하나였다.

황금사자기 8강전.

그 지독한 슬라이더.

눈앞에서 도망가던 공.

술기운이 올라왔다. 바닥이 기울었다. 승진은 야구공을 쥔 채 그대로 누웠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운영팀장의 얼굴이 아니었다.

스무 살도 되기 전의 자신이 헛스윙 뒤 고개를 숙이던 장면이었다.


"야. 백승진. 일어나!"

귀를 찢는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천장이 없었다.

대신 버스 천장에 붙은 작은 선풍기가 덜덜거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봄 햇살이 쏟아졌다. 땀 냄새와 흙먼지 냄새가 코를 때렸다.

승진은 벌떡 일어났다.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

허리도 뻐근하지 않았다. 손목에 감겨 있어야 할 보호 테이프도 없었다. 대신 팔뚝이 낯설 정도로 탱탱했다. 손등에는 오래된 굳은살이 없고 손톱 밑에는 검은 흙이 끼어 있었다.

"뭐야."

목소리가 얇았다.

승진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열일곱 살의 손이었다.

아직 망가지지 않은 손. 포수 미트 안에서 수천 번 부딪혀 굵어진 손이 아니라 이제 막 단단해지는 손.

가슴팍 유니폼에는 청원고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버스 앞좌석에서 누군가 신문을 흔들었다.

황금사자기 8강전. 청원고 대 세명고.

날짜는 2002년 5월이었다.

승진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꿈이네."

그는 자기 뺨을 때렸다.

짝.

아팠다.

너무 생생하게 아팠다. 옆자리에 앉은 후배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형 왜 그래요?"

승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버스는 이미 경기장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멀리서 응원 북소리가 울렸다. 심장이 그 박자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그는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주름이 없었다. 눈 밑 그늘도 없었다. 대신 기이하게도 눈빛만은 마흔 살 백승진의 것이었다.

"미쳤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두려움보다 먼저 올라온 감정은 욕심이었다.

몸은 가벼웠다.

발목을 돌리자 모래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한 번 돌리니 날개뼈가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잠깐 잊고 살았던 감각이었다.

야구를 처음 배웠을 때의 몸.

아직 망가지기 전의 몸.

그 몸 안에 24년 치 실패와 수 싸움이 통째로 들어와 있었다.

"이러면 얘기가 다르지."

승진은 헬멧 가방을 끌어안고 버스에서 내렸다.

햇살이 눈을 찔렀다. 관중석의 함성이 멀리서 파도처럼 밀려왔다. 흙냄새는 젊었고 잔디는 눈이 시릴 만큼 푸르렀다.

그는 주먹 안을 확인했다.

낡은 고교 야구공은 없었다.

하지만 손끝에는 실밥 감촉이 남아 있었다.


경기는 승진의 기억과 거의 같았다.

청원고는 0대 1로 끌려가고 있었다. 8회 말 2사 1루. 더그아웃은 죽은 듯 조용했다.

세명고 에이스는 아직도 공에 힘이 있었다. 직구는 140km 초반이었지만 당시 고교 무대에서는 충분히 빠른 공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슬라이더.

승진은 더그아웃 맨 끝에서 상대 투수의 손목을 봤다.

어깨가 조금 일찍 열렸다. 글러브 안에서 검지가 깊게 들어갔다. 세트 포지션에 들어가기 전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슬라이더 사인일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전생의 그는 몰랐다.

그냥 빠른 공에 밀리지 않으려고 덤볐다가 허무하게 방망이가 돌았다.

지금은 보였다.

너무 선명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백승진."

강두식 감독의 목소리가 더그아웃을 갈랐다.

험상궂은 얼굴의 감독이 방망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대타 준비해라."

그 말에 더그아웃 공기가 흔들렸다. 주전 선배가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는 왜 하필 백승진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승진은 말없이 방망이를 집었다.

가볍다.

알루미늄 배트가 이렇게 가벼웠나 싶었다. 손목도 가볍고 어깨도 가볍다. 몸 전체가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을 활짝 연 것 같았다.

"감독님."

"왜."

"상대 저놈. 슬라이더 던질 때 어깨 먼저 엽니다."

강두식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

"입술도 씹고요. 주자 있을 때는 더 티 납니다."

더그아웃이 조용해졌다.

고교 2학년 후보 포수가 할 말은 아니었다. 더구나 방금 전까지 벤치에서 물이나 나르던 놈이 상대 에이스의 투구 습관을 말하고 있었다.

강두식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초구 직구 보여주고 다음 공 슬라이더 옵니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척하다가 가운데에 걸릴 겁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승진은 씩 웃었다.

전생의 그는 이 질문 앞에서 늘 움츠러들었다. 감독의 표정부터 살피고 선배의 눈치를 봤다. 그 버릇 때문에 놓친 공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느낌이 좋습니다."

"느낌 같은 소리 하지 마라."

"그럼 결과로 보시죠."

감독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타석은 비어 있었고 벤치에 남은 타자 중 장타를 기대할 선수도 많지 않았다. 강두식은 이를 악물었다.

"삼진 먹고 들어오면 운동장 스무 바퀴다."

"홈런 치면 열 바퀴만 깎아주십니까?"

"이 새끼가."

선수 몇 명이 숨을 삼켰다.

원래의 백승진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말이었다.

하지만 마흔 살의 백승진은 감독의 호통보다 방출 통보서가 더 무서운 사람을 이미 겪었다.

그때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승진아."

최현우였다.

아직 마르고 어깨가 좁은 좌완 에이스. 얼굴은 창백했고 왼팔 팔꿈치 안쪽을 손끝으로 누르고 있었다.

승진의 눈빛이 변했다.

전생의 최현우는 이 대회가 끝나고 팔꿈치를 망쳤다. 1년 뒤에는 이름도 기사에서 사라졌다. 좋은 공을 가진 투수가 제대로 배워보기도 전에 사라진 것이다.

"팔 아프냐."

현우가 흠칫했다.

"아니. 그냥 조금 뻐근해서."

"경기 끝나면 얼음부터 대. 뜨거운 물에 담그지 말고."

"뭐?"

"그리고 오늘 더 던지지 마. 네 팔 지금 위험해."

현우는 당황한 얼굴로 승진을 바라봤다. 강두식이 뒤에서 버럭 소리쳤다.

"백승진! 타석 안 나가?"

승진은 헬멧을 눌러썼다.

"다녀올게."

그 한마디가 묘하게 무거웠다.


타석에 들어서자 소리가 달라졌다.

응원석의 북소리. 포수 미트에 박히는 공 소리. 상대 투수의 스파이크가 흙을 긁는 소리.

전부 따로 들렸다.

마흔 살의 귀와 열일곱 살의 몸이 한꺼번에 깨어났다.

상대 포수가 사인을 냈다.

초구는 직구.

승진은 배트를 어깨에 걸친 채 가만히 섰다. 공은 바깥쪽 높은 곳을 찔렀다.

"스트라이크!"

관중석이 술렁였다. 더그아웃에서 누군가 욕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승진은 웃었다.

좋다.

공이 늦다.

전생에서 1군 마무리들의 150km대 공을 수없이 봤다. 부상당한 몸으로도 파울을 만들던 눈이다.

지금 이 몸으로 보는 140km 초반 직구는 너무 친절했다.

상대 투수가 로진백을 만졌다.

입술을 씹었다.

글러브 안의 손가락이 깊어졌다.

승진의 왼발이 조용히 땅을 눌렀다.

온다.

그가 놓쳤던 공.

스물세 해 동안 꿈에서 몇 번이고 되감았던 공.

상대 투수의 어깨가 아주 조금 먼저 열렸다. 손끝에서 흰 공이 빠져나왔다. 처음에는 직구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간부터 바깥으로 달아날 준비를 했다.

슬라이더.

승진의 시야가 좁아졌다.

공 하나만 남았다.

왼쪽 무릎이 버티고 골반이 먼저 열렸다. 손목은 끝까지 남았다. 늙은 몸으로는 머리로만 알았던 타이밍이 열일곱 살의 근육 안에서 살아났다.

방망이가 뒤늦게 따라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승진은 알고 있었다.

이건 늦은 게 아니다.

기다린 것이다.

흰 공이 가운데로 걸리는 순간 승진은 이미 배트를 끌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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