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가 약사는 탑 보상으로 병원비를 갚는다

2화: 얼어붙은 맥박
"약사님! 대공 전하의 맥이 얼어붙고 있어요!"
외침은 문짝보다 먼저 약방 안의 종을 흔들었다. 이린은 조제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다 팔꿈치로 약병을 건드렸다. 유리병이 굴러가며 은색 실처럼 가는 뿌리를 드러냈다.
여긴 사무실이 아니었다.
벽 한쪽에는 약병이 줄지어 있었고 반대편에는 색색의 원단 꾸러미와 재단 가위가 걸려 있었다. 창가 낮은 선반에는 찻잔과 찻잎 통이 놓여 있었다. 약국, 의상실, 찻집이 한 방 안에서 억지로 숨을 맞추는 것 같았다.
문이 벌컥 열렸다.
갈색 곱슬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소녀가 눈발을 몰고 들어왔다. 앞치마 주머니마다 실타래와 마른 약초가 꽂혀 있었다. 소녀는 이린을 보자마자 굳었다.
"당신 누구예요? 점주님은요?"
"나도 그 질문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린은 조제대 위의 문서 두 장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도장이 찍힌 폐업 통지와 얼음꽃 봉랍이 붙은 검은 봉투. 손등 위 정산 창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백은 약방 폐업 통지. 금일 자정까지 영업권 반납.
긴급 처방 의뢰 접수. 의뢰인: 북부 루브렌 대공가.
정신을 놓을 시간은 없었다. 외침 속의 단어 하나가 이린의 판단을 잡아끌었다.
맥.
"대공 전하는 어디에 있죠? 증상은 언제 시작됐고 뭘 복용했어요?"
소녀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 약사예요?"
"확인 중입니다. 하지만 환자가 있다고 했죠. 이름부터 말해 주세요."
"리비아 모르요. 저는 여기 견습 조제사고 전하께서는 마차 안에 계세요. 손끝부터 굳어서 팔까지 올라왔어요. 숨은 짧아졌고 황실 약사가 준 빙혈 시럽을 두 숟가락 드신 뒤 더 나빠졌어요."
이린은 검은 봉투를 열었다. 처방 의뢰서와 두꺼운 계약서가 함께 들어 있었다. 낯선 글자였는데 하단 번호만은 기묘하게 읽혔다.
Ledger-Gate-1F-Apothecary / 담보 의료채권 연동
세린바이오 임시 캐시에서 보았던 파일명이 눈앞에서 현실이 됐다.
"그 시럽 병 가져와요. 따뜻한 물, 향이 강하지 않은 차잎, 깨끗한 천도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요?"
"모르면 더더욱 기록부터 봐야 합니다. 이미 악화된 약을 또 쓰는 건 안 돼요."
리비아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문밖에서 다시 시종의 목소리가 터지자 약재장으로 뛰었다.
"리비아 양! 더 늦으면 전하께서 못 버티십니다!"
마차는 약방 뒷문 가까이에 멈춰 있었다. 시종 둘이 두꺼운 망토를 걸친 남자를 부축해 들였다. 은회색 머리카락 끝에는 서리가 맺혔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남자는 거의 쓰러질 듯했지만 눈빛만은 무너지지 않았다.
"새 약사인가."
"서이린입니다. 신원 확인보다 증상 확인이 먼저예요."
"황실에서 보냈나?"
"황실이 어딘지도 모릅니다."
남자의 눈매가 더 차가워졌다. 그 순간 이린이 들고 있던 봉투의 얼음꽃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다. 남자의 숨이 끊기듯 멎고 장갑 위로 흰 금이 번졌다.
이린은 봉투를 조제대 아래로 밀어 넣었다.
"문장 치워요."
"뭐라고요?"
"봉랍요. 보일 때마다 악화됩니다."
리비아가 급히 검은 봉투를 천으로 덮었다. 남자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손끝의 서리도 번지던 속도를 늦췄다.
이린은 그의 손목을 잡으려다 장갑 안쪽 솔기를 보았다. 얼음꽃과 비슷한 문양이 은실로 수놓여 있었다. 그녀는 장갑을 억지로 벗기지 않고 소매 위쪽에서 맥을 찾았다.
맥은 느리고 불규칙했다. 차갑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피가 흐르다 잘게 부서지는 얼음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통증은 가슴 쪽입니까? 팔 쪽입니까?"
"질문이 많군."
"답이 없으면 처방도 없습니다."
남자는 짧게 웃었다. 웃음마저 얼어 금방 깨졌다.
"팔에서 시작해 심장 쪽으로 온다. 계약서를 볼 때마다 심해진다."
리비아가 시럽 병을 내밀었다. 병목에는 금박 도장이 찍혀 있었다.
"황실 의료조합의 전용 처방이에요. 원래는 발작 때마다 이걸 썼어요."
이린은 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강한 박하 향 아래 금속성 단내가 깔려 있었다. 향이 혀끝을 마비시키는 것처럼 코안을 긁었다.
"성분표는요?"
리비아가 입술을 다물었다.
"전하 전용 처방이라며 밀봉된 병만 왔어요."
"그러면 지금은 보류합니다. 체온을 올리는 약인지 감각을 속이는 약인지 확인할 수 없어요."
"하지만 황실 약사들이 늘 쓴 처방인데요."
"늘 썼는데 오늘 악화됐죠."
리비아가 반박하지 못했다.
이린은 약재장을 훑었다. 낯선 이름들이 빼곡했지만 병 라벨은 일정했다. 온열, 진정, 혈류, 기억, 계약 반응. 그녀가 읽는 순간 손등 위 정산 창이 라벨 위에 작은 주석을 덧씌웠다.
서리쑥: 냉기 확산 완화
흰계피: 말초 온열 보조
은실 뿌리: 계약 반응성 경련 관찰용. 과량 금지
무향 홍차: 감정 마력 흐름 희석
약국이 아니라 심사표와 다실과 재단실을 한꺼번에 섞은 공략 공간이었다. 이린은 모르는 약재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읽히는 정보와 리비아의 손이 필요했다.
"리비아 씨. 서리쑥 한 잎, 흰계피 아주 조금, 은실 뿌리는 한 가닥만. 무향 홍차에 끓이지 말고 우려요."
"왜 끓이면 안 되는데요?"
"혈류가 멈추는 사람에게 강한 자극을 바로 넣으면 더 수축할 수 있어요. 지금은 약효보다 반응 확인이 먼저입니다."
리비아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손은 빨랐다. 그녀는 찻잔을 뜨거운 물로 데우고 은실 뿌리를 바늘처럼 가늘게 잘랐다.
카이엘은 의자에 앉아 버티고 있었다. 시종이 망토를 벗기려 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건드리지 마라."
이린은 시종을 물렸다.
"억지로 움직이지 마세요. 장갑도 아직 벗기지 않습니다. 문양이 안쪽에 있어서 벗기는 순간 반응이 커질 수 있어요."
카이엘의 시선이 그녀에게 박혔다.
"그걸 어떻게 알지?"
"방금 보였으니까요. 확정은 아닙니다."
"황실 약사들은 확정이라고 말하고 틀렸다."
"저는 확정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찻물이 옅은 은색으로 풀렸다. 이린은 컵을 카이엘의 손 가까이에 두었다. 뜨거운 김이 장갑 위 서리를 건드리자 얼음꽃 문양이 다시 빛났다. 이번에는 빛이 약했다.
임시 처방 기록 생성 중.
효과: 빙결성 혈류 정지 진행 속도 완화.
주의: 담보 계약 원문 미확인. 확정 처방 불가.
이린은 컵을 들어 카이엘에게 건넸다.
"마시지 말고 먼저 향만 들이마셔요. 어지러우면 바로 멈춥니다."
"내게 명령하는 건가."
"환자에게 지시하는 겁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카이엘은 이린을 한참 보더니 컵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숨이 한 번 흔들렸다. 손가락 끝의 흰 금이 멈췄다. 리비아가 작게 숨을 삼켰다.
"이번엔 한 모금만요."
카이엘은 느리게 차를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동안 창밖의 눈발도 멎은 듯했다. 곧 입술에 아주 희미한 색이 돌아왔다.
이린은 안도하지 않았다.
임시 안정은 치료가 아니었다. 원인을 모르면 다음 발작은 더 세게 올 수 있었다.
"오늘 이 문서를 보기 전에도 발작했습니까?"
"폐업 통지가 도착한 뒤 악화됐어요."
리비아가 대신 대답했다.
"점주님이 사라진 뒤 약방 영업권이 반납 처리된다고 했고 전하의 의료채권도 그때부터 압류 목록에 올랐어요. 둘이 같은 건지는 몰랐어요."
이린은 폐업 통지와 의뢰서를 나란히 놓았다. 두 문서의 하단 번호가 같았다.
Ledger-Gate-1F-Apothecary
자정까지 영업권 반납.
긴급 처방 지연 시 대공령 의료채권 전액 압류.
조건이 별개라면 우연일 수 있었다. 같은 번호라면 하나의 장부였다.
"약방을 닫으면 대공가 의료채권도 넘어가게 되어 있네요."
카이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읽을 수 있나?"
"숫자와 조건은 읽힙니다. 나머지는 아직 모르고요."
"그럼 너는 더 수상하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일 수상한 건 저보다 이 서류예요."
리비아가 폐업 통지를 움켜쥐었다.
"그럼 약방을 살릴 수 있어요?"
"살린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정에 닫히는 건 보류 신청을 걸 수 있어요."
이린은 폐업 통지 하단의 반납 확인란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 위 글자가 얇게 떨렸다. 손등 위 창이 새 문구를 띄웠다.
반납 확인 대신 보류 신청 가능.
조건: 긴급 처방 로그 1건, 약방 임시 관리자 서명, 환자 또는 대리인의 처방 동의.
"임시 처방 기록과 동의가 필요합니다."
리비아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면 약방을 당신 이름으로 묶겠다는 뜻이잖아요."
"아니요. 지금은 문 닫히는 걸 막자는 뜻입니다. 이대로 반납되면 전하의 의료채권도 넘어간다면서요."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믿어요?"
"믿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기록을 남겨요. 제가 한 처방, 쓴 약재, 환자 반응, 보류 신청 사유. 나중에 틀렸으면 그 기록으로 저를 막으면 됩니다."
리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약방 안쪽 바닥문 쪽으로 아주 짧게 흔들렸다. 이린은 그 움직임을 기억해 두었다.
카이엘이 컵을 내려놓았다. 손끝의 서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대가는."
"뭐라고요?"
"탑은 공짜로 움직이지 않는다. 네가 원하는 대가가 무엇이냐."
이린은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 병원비가 목까지 올라왔다. 원무과의 목소리, 반으로 접힌 안내장, 인사팀장의 낮은 협박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아직 그녀의 사정을 모른다. 환자에게 보호자의 빚을 들이밀 수는 없었다. 그것이 현실 병원비든 제국 의료채권이든 마찬가지였다.
그때 검은 계약서가 스스로 펼쳐졌다.
전담 약사 임시 계약
기간: 90일
목표: 루브렌 대공의 빙결성 혈류 정지 발작 안정화
보상 보류 해제: 현실 병원비 상계권 3개월
이린의 손끝이 굳었다.
현실 병원비.
이 세계의 종이 위에 떠오른 단어는 너무 정확했다. 한미라의 다음 투약 일정이 이 낯선 대공의 맥박과 같은 줄에 묶여 있었다.
카이엘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대가가 있군."
"있어요."
이린은 계약서를 덮지 않았다. 숨기려 해도 이미 늦었다.
"하지만 아직 처방도 확정되지 않았고 계약 원문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검토 없이 서명하지 않습니다."
"내 맥이 다시 얼기 전에 검토가 끝나야 할 텐데."
"그래서 더 서두르면 안 됩니다. 환자가 동의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받은 서명은 처방 근거가 아닙니다."
카이엘의 눈빛이 처음으로 달라졌다.
의심은 그대로였다. 다만 차가운 틈 사이로 아주 작은 관심이 끼어들었다.
정산 창의 마지막 줄이 붉게 깜박였다.
선택 가능: 임시 전담 약사 서명 시 현실 병원비 1개월분 선상계.
이린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한 달.
어머니의 다음 투약이 밀리지 않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잘못된 계약으로 얻은 보상은 다시 채무가 되어 돌아온다고 창은 이미 경고했다.
이린은 카이엘에게 계약서를 돌려 보였다.
"전하. 당신은 이 내용을 읽고 동의할 수 있는 상태입니까?"
카이엘은 얼어붙은 손으로 계약서 가장자리를 눌렀다. 종이 위 얼음꽃 문양이 다시 희미하게 빛났다.
그의 맥이 한 번 더 흔들렸다.
그리고 계약서 아래에 새 문장이 떠올랐다.
동의 지연 시 발작 재개 예상 시간: 1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