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가 약사는 탑 보상으로 병원비를 갚는다

시놉시스
현실의 약제비 심사원 서이린은 어머니의 병원비와 회사의 해고 통보에 몰린 밤, 세린바이오 서버에서 어머니 치료제와 탑 보상 특허가 연결된 흔적을 본다. 정체불명의 정산 창은 병원비 상계권과 백은 약국 임차권을 미청구 보상으로 제시하고, 이린은 확인을 위해 승인 버튼을 누른다.
1화: 정산되지 않은 청구서
서이린은 삭감 사유를 세 번 읽었다.
투약 간격 기준 미충족. 장기 투여 안정성 자료 보완 필요. 본인 부담 전환 예정.
문장 자체는 낯설지 않았다. 세린바이오 심사팀에서 이린이 매일 분류하는 말이었다. 문제는 그 문장이 도원종합병원 청구서 상단, 한미라라는 이름 옆에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린은 모니터 왼쪽에 회사 심사표를, 오른쪽에 어머니 병원비 고지서를 띄워 두었다. 환자명은 다르게 가렸지만 약제 코드는 같았다. SB-RX-417. 회사에서는 신규 면역 조절제 임상 보조 코드였고, 병원에서는 미라의 다음 달 투약 예정 코드였다.
야근 사무실에는 형광등 한 줄만 켜져 있었다. 팀원들은 구조조정 면담 뒤 대부분 먼저 퇴근했다. 남은 건 이린과 프린터가 토해 낸 청구서 더미, 그리고 인수전 관련 자료 접근 권한이 사라졌다는 팝업뿐이었다.
접근 권한이 변경되었습니다. 관리자에게 문의하십시오.
"관리자가 나를 자르겠다고 부른 사람인데."
혼잣말은 작게 흩어졌다.
이린은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환자 조건, 약제 코드, 투약 주기, 삭감 사유, 예외 인정 여부. 그녀는 익숙한 순서대로 오류 가능성을 지웠다. 어머니 건이라고 해서 기준을 느슨하게 볼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냉정해야 했다.
냉정하지 않으면 고지서 숫자가 사람을 먹어 치웠다.
이번 달 미납액은 18,640,000원.
다음 달 예상 본인 부담금은 그보다 컸다.
이린은 숨을 고르고 회사 내부 검색창에 SB-RX-417을 입력했다. 결과가 잠깐 떴다가 사라졌다. 아주 짧은 순간, 제목 하나가 눈에 박혔다.
MIRA-07 / Tower Reward Offset / 비상장 지분 상계 검토
검색 결과는 곧 빈 화면으로 바뀌었다.
이린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MIRA. 어머니 이름과 같은 철자였다. 우연이라고 넘기기에는 07이라는 숫자가 걸렸다. 미라는 7년 전 병원에서 탑 관련 임상 설명회를 들은 뒤 몸 상태가 나빠졌다.
어머니는 "설명만 듣고 말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뒤로 병원 서류에는 가끔 이상한 공란이 남았다. 동의서 번호가 비어 있고, 지원금 항목은 처리 완료라고 적혀 있는데 실제 납부 내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도원종합병원 원무과였다.
"보호자 서이린 님 맞으시죠? 한미라 환자분 미납금 관련해서요."
이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늘 밤 안에 일부라도 납부해야 하나요?"
"다음 투약 일정 확정 전에 정리가 필요합니다. 전액은 아니어도 보증 납부가 있어야 약제 발주가 가능합니다."
보증 납부.
환자에게는 치료 일정이고, 병원에는 발주 기준이고, 보호자에게는 어디서도 빌릴 수 없는 숫자였다.
"얼마면 발주가 보류되지 않습니까?"
상대가 말한 금액은 이린의 퇴직 위로금보다 컸다.
이린은 파일을 닫지 않은 채 병원으로 갔다.
한미라는 병실 창가 쪽 침대에 앉아 있었다. 손목의 장기 치료 밴드가 얇은 팔목을 더 가늘게 보이게 했다. TV에서는 예능 재방송이 소리만 밝았다.
"또 야근하다 왔지?"
"근처에 볼일 있었어."
"네 회사가 병원 옆으로 이사했니?"
한미라는 웃으며 물었다. 이린은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담요부터 정리했다.
"엄마, 오늘 컨디션은?"
"좋아. 밥도 반 넘게 먹었고. 간호사 선생님이 나보고 모범 환자래."
"열은?"
"없어. 네 얼굴에만 있어."
이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미라는 딸의 표정을 보고도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게 더 힘들었다.
침대 옆 탁자에는 병원비 안내장이 반으로 접혀 있었다. 일부러 숨긴 모양이었다. 이린은 못 본 척했다.
"다음 투약 일정, 내가 원무과랑 맞춰 볼게."
"천천히 해. 엄마는 한 번 쉬어도 돼."
"쉬는 게 아니라 밀리는 거야."
말이 조금 날카롭게 나갔다. 이린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한미라는 손을 뻗어 이린의 손등을 눌렀다. 체온은 낮았고 손끝은 마른 종이처럼 가벼웠다.
"이린아. 엄마 때문에 네가 자꾸 계산만 하게 되는 게 싫어."
"계산이라도 해야 안 밀려."
"너는 약값 계산하려고 약 공부한 거 아니잖아."
이린은 대답 대신 고지서를 접었다. 사실 그녀는 약 공부를 하고도 처방을 내릴 수 없었다. 약제비 심사원은 처방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처방이 돈의 문턱에서 어디에 걸리는지 표시하는 사람이었다.
그 표시가 사람을 살리기도 했고, 멈추게 하기도 했다.
병실을 나와 복도 끝 의자에 앉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윤도겸: 원무과에서 연락 받았어. 네가 싫어할 거 알아서 먼저 안 움직였는데, 이번 건은 채권 정리 방식 확인해 볼 수 있어. 통화 가능해?
이린은 엄지로 답장을 쓰다 지웠다.
도겸은 능력이 있었다. 현실 법으로 병원비 채권을 나누고, 회사가 부당하게 압박한 기록을 잡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쉽게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도움을 받으면 설명해야 했다. 회사에서 본 이상한 코드, 해고 직전의 서버 차단, 어머니 이름을 닮은 파일명까지.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는 걱정이 되고, 걱정은 빚이 됐다.
괜찮아요. 아직 정리할 수 있어요.
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그때 회사 메신저가 울렸다.
내일 오전 면담 예정이었으나 일정 변경. 금일 23:30 인사팀 회의실로 와 주십시오.
이린은 휴대폰 시간을 봤다. 23시 02분.
병원에서 회사까지 택시로 20분이었다.
인사팀장은 위로하는 표정을 잘 만들었다. 회의실 탁자 위에는 이미 권고사직 합의서가 놓여 있었다.
"서이린 씨 업무 역량과는 무관합니다. 회사 방향이 바뀌었고, 심사팀 일부 기능이 외주화됩니다."
"제 권한이 오늘 저녁에 먼저 차단됐습니다."
"보안 절차입니다."
"제가 담당하던 약제 코드 자료까지 막혔습니다. 환자 안전성 검토 폴더도요."
"퇴직 예정자 권한 회수는 일반적입니다."
이린은 합의서를 보지 않았다.
"SB-RX-417 자료에 Tower Reward Offset이라는 표식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게 환자 부담금 산정과 관련 있습니까?"
인사팀장의 눈꺼풀이 아주 작게 떨렸다.
"그 용어는 어디서 봤습니까?"
"제가 질문했습니다."
"서이린 씨."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퇴직 조건은 오늘 서명하면 더 좋습니다. 보안 위반이 없었다는 확인도 함께 들어갑니다."
"서명하지 않으면요?"
"회사 자산 무단 접근 여부를 확인해야겠죠."
말은 정중했다. 내용은 협박이었다.
이린은 합의서를 집어 들었다. 퇴직 위로금, 비밀 유지, 이의 제기 포기. 숫자는 병원비 보증 납부액보다 작았다.
"검토하고 서명하겠습니다."
"오늘 안에 결정하셔야 합니다."
"그럼 오늘 안에 검토하겠습니다."
이린은 회의실을 나와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흰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벌써 개인 물품을 담으라고 가져다 둔 모양이었다.
그녀는 펜꽂이와 낡은 머그컵, 어머니가 입원 초기에 준 손수건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모니터를 켰다. 공식 권한은 막혔지만, 심사 프로그램은 방금 전까지 열려 있던 임시 캐시를 남기는 습관이 있었다.
평소라면 개인정보 보호 규정 때문에 퇴근 전 삭제했을 파일들이었다. 오늘은 누군가 그녀의 계정을 서둘러 닫으며 정리 순서를 놓쳤다.
이린은 네트워크가 아니라 로컬 임시 목록을 열었다. 파일명, 생성 시각, 마지막 접근 계정. 실무자는 감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흔적을 확인했다.
SB-RX-417_claim_adjust.tmp
MIRA-07_consent_scan.tmp
ledger_gate_1F_apothecary.tmp
이린은 세 번째 파일에서 손을 멈췄다.
약국.
아니, 파일명에는 영어로 apothecary라고 적혀 있었다. 병원 심사 서버에 있을 단어가 아니었다.
클릭하자 검은 화면이 떴다. 곧 회색 글자가 떠올랐다.
정산 대상자 확인 중.
"뭐야."
이린은 마우스를 움직였지만 창은 닫히지 않았다.
서이린. 약제비 심사 경력 6년 4개월. 보호자 채무 연계: 한미라. 미청구 보상 3건.
심장이 늦게 뛰기 시작했다.
미청구 보상
1. 백은 약국 임차권
2. 황실 의료채권 1건
3. 현실 병원비 상계권 3개월
이린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팝업창은 모니터에서만 떠 있는 게 아니었다. 책상 위의 청구서에도, 손등 위에도, 공기 중에도 옅게 겹쳐 보였다.
보상 청구 조건: 정당한 처방, 합의된 계약, 증빙된 공략 기록.
초기 공략 구역: 백은 약방.
주의: 상계권은 현금 지급이 아니며, 원장 오류 확인 전까지 임시 보류됩니다.
이린의 호흡이 가빠졌다. 사기 프로그램일 수 있었다. 환각일 수도 있었다. 회사가 퇴직자를 겁주려고 만든 보안 장치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병원비 상계권이라는 단어가 너무 정확했다. 현금이 아니라 권리. 보증 납부가 아니라 상계. 이린이 매일 다루던 문장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녀는 손등 위에 떠 있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청구하시겠습니까?
아래에는 작은 버튼이 두 개 있었다.
보류
확인
이린은 어머니의 다음 투약 일정을 떠올렸다. 원무과 직원의 목소리, 한미라가 반으로 접어 둔 안내장, 인사팀장의 웃는 얼굴, 그리고 사라지기 전 검색 결과에 박혀 있던 MIRA-07.
"확인만."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확인만 하고, 위험하면 취소한다."
손가락이 확인에 닿았다.
사무실 바닥이 사라졌다.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 느낌과는 달랐다. 몸은 그대로인데, 주변의 권리관계가 먼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사원증 줄이 목을 스쳤고, 흰 상자 안의 손수건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청구서 숫자들이 새떼처럼 흩어졌다가 한 줄의 처방전으로 다시 모였다.
초기 이동 승인.
현실 신체 유지. 기억 유지. 체류 제한 12시간.
백은 약방 임시 점주 후보 입장.
이린은 차가운 나무판 위로 떨어졌다.
"윽."
팔꿈치가 병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났다. 코끝에는 알코올 소독약과는 다른 냄새가 밀려왔다. 말린 약초, 오래된 종이, 달게 식은 홍차, 그리고 눈 온 뒤 금속처럼 차가운 향.
그녀가 엎어진 곳은 사무실 책상이 아니었다. 약병이 빼곡한 조제대였다. 벽에는 낯선 문자로 적힌 가격표와 처방 대장이 걸려 있었다. 창밖으로는 서울 빌딩 대신 눈발이 날리는 돌길과 푸른 가스등이 보였다.
조제대 위에서 종 두 개가 동시에 울렸다.
첫 번째 종 아래에는 붉은 도장이 찍힌 문서가 놓여 있었다.
백은 약방 폐업 통지. 금일 자정까지 영업권 반납.
두 번째 종 아래에는 검은 봉투가 있었다. 봉랍에는 얼음꽃 같은 문장이 찍혀 있었다.
이린이 봉투를 잡는 순간, 손등 위 정산 창이 다시 켜졌다.
긴급 처방 의뢰 접수.
의뢰인: 북부 루브렌 대공가.
증상: 빙결성 혈류 정지, 계약 반응성 발작.
처방 지연 예상 손실: 대공령 의료채권 전액 압류. 현실 병원비 상계권 보류.
문장 아래 마지막 줄이 붉게 깜박였다.
전담 약사 서명 필요.
이린은 봉투를 쥔 채 굳었다.
그리고 약방 문밖에서 누군가 절박하게 외쳤다.
"약사님! 대공 전하의 맥이 얼어붙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