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기엔 늙었고 은퇴하기엔 너무 강함

시놉시스
건설 현장에서 평생을 바치고 은퇴한 70세 노장 마두식. 남은 인생은 조용히 노후나 즐기려 했지만 철없는 막내아들의 보증 빚과 하나뿐인 손녀 마수아의 희귀 던전병 치료비가 한꺼번에 그의 삶을 벼랑 끝으로 민다.
폐지라도 주워 약값을 보태려던 어느 날, 동네 공터에 F급 게이트가 터진다.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하려고 몸을 던진 순간, 반세기 동안 현장에서 쌓은 직감과 짬밥이 세상에 없던 권능으로 깨어나기 시작한다.
1화: 칠순의 독촉장
마두식의 칠순 생일 아침은 미역국 냄새보다 독촉장 냄새가 먼저 났다.
낡은 빌라 현관문 틈으로 흰 봉투 세 장이 밀려 들어와 있었다. 하나는 카드사, 하나는 대부업체, 나머지 하나는 병원 원무과에서 보낸 안내문이었다.
두식은 허리를 굽혀 봉투를 집었다.
"요즘 우편도 부지런하네. 생일 축하보다 빠르니 원."
안방 쪽에서 마수아가 기침을 삼켰다. 얇은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할아버지, 누구 왔어요?"
"아니다. 전기 검침인가 보다."
두식은 봉투를 작업복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손가락 마디가 잠깐 굳었다. 평생 철근을 묶고 거푸집을 세운 손인데 종이 몇 장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부엌에는 작은 냄비 하나가 끓고 있었다. 미역보다 물이 많고 고기보다 파가 많은 국이었다. 그래도 그는 가장 멀쩡한 그릇을 골라 수아 앞에 놓았다.
"자, 생일상은 네가 받아라. 나야 칠십 번이나 먹었으니 질렸다."
수아는 웃으려다 기침을 했다. 얼굴은 하얗고 손목은 젓가락보다 가늘었다. 마염병 특유의 푸른 반점이 목덜미에 희미하게 올라와 있었다.
"할아버지 생일인데 제가 왜 먹어요."
"내 생일에 내가 먹이고 싶은 사람 먹이는 거지. 법에 걸리냐?"
수아는 숟가락을 들었다. 입가에는 웃음이 있었지만 눈은 자꾸 두식의 작업복 안주머니로 갔다.
"또 병원에서 온 거죠?"
두식은 숟가락으로 냄비 바닥을 긁었다.
"병원은 원래 편지 좋아한다.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라 종이를 아껴 쓸 줄 몰라."
"이번 달 약값 밀렸잖아요."
"밀린 게 아니라 잠깐 쉬는 거다. 사람도 쉬는데 돈이라고 못 쉬겠냐."
수아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두식의 가슴을 찔렀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울 줄을 몰랐다. 아프면 참았고 배고프면 물을 마셨고 미안하면 먼저 웃었다.
그게 더 미안했다.
식탁 구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두식은 수아가 보지 않게 화면을 뒤집어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마두식 씨 맞으십니까. 보증 채무 관련해서 최종 안내드립니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기계처럼 매끄러웠다.
"압니다. 금액하고 기한만 말해요."
"원금과 지연이자 포함 사천팔백만 원입니다. 일주일 내 일부 변제가 없으면 압류 절차가 진행됩니다."
두식은 베란다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 골목 끝 고물상 간판이 보였다. 파란 페인트가 벗겨진 손수레도 보였다.
"막내놈한테는 연락했소?"
"주채무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 보증인께 고지하는 겁니다."
"그놈은 연락 안 닿는 데는 재주가 아주 국가대표야."
상담원은 웃지 않았다. 두식도 웃지 않았다.
"알았소. 일주일."
전화를 끊자 겨울바람이 베란다 틈으로 파고들었다. 두식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일흔 생일에 남은 것은 사천팔백만 원짜리 빚과 손녀의 약값, 그리고 아직 쓸 만한 두 다리뿐이었다.
그는 방 안으로 돌아와 낡은 안전화를 신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요?"
"운동."
"안전모는 왜요?"
두식은 현관 옆 못에 걸린 노란 안전모를 툭 쳤다. 오십 년 현장을 따라다닌 물건이라 흠집이 별처럼 박혀 있었다.
"칠십 먹은 노인네가 넘어지면 나라 손해다. 안전제일 몰라?"
수아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 하나면 거짓말값은 치른 셈이었다.
골목의 아침은 축축했다. 밤새 내린 비가 아스팔트 갈라진 틈에 고여 있었다. 두식은 손수레에 노끈과 장갑을 싣고 천천히 밀었다.
동네 슈퍼 앞에서 김 사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마 반장님, 생신이라면서 또 나가요?"
"생일이라고 길바닥 종이가 나를 피해 가겠나."
"애들이 알면 속상해합니다."
"속상할 애가 있으면 다행이지. 속 썩이는 놈은 하나 있고."
김 사장은 더 묻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은 대충 알고 있었다. 막내아들이 보증을 서게 만들고 사라졌다는 것, 손녀가 던전병을 앓는다는 것, 마두식이 은퇴한 지 반년도 안 돼 다시 돈 될 일을 찾는다는 것.
두식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폐지 줍는 것도 기술이야. 젖은 건 아래, 마른 건 위. 하중 맞춰야 수레가 안 뒤집히지."
상가 뒤편 박스는 비를 먹어 무거웠다. 젊은 사람이라면 한꺼번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두식은 그러지 않았다. 젖은 박스와 마른 박스를 나누고 노끈을 두 번 감은 뒤 무게 중심을 손수레 바퀴 바로 위에 맞췄다.
몸은 늙었지만 일을 대하는 순서는 늙지 않았다.
공터 쪽으로 갈수록 바닥이 이상했다. 재개발 안내판 아래 물웅덩이가 동그랗게 떨렸다. 전봇대 그림자가 아주 조금씩 휘었다. 골목 경보등은 노란빛을 깜빡였지만 주민들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게이트 경보는 요즘 세상에서 비 오는 소리만큼 흔했다. 대부분은 잔류 마력 오작동으로 끝났다. 진짜로 터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두식은 손수레를 멈췄다.
"이거 지반 내려앉는 소리가 아닌데."
건설판에서 땅이 우는 소리는 종류가 있었다. 물 먹은 흙이 꺼지는 소리, 철근이 버티다 포기하는 소리, 콘크리트 안쪽이 비는 소리. 지금 공터 밑에서 올라오는 진동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문제는 공터 울타리 안에서 아이 웃음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야! 거기 들어가면 안 된다!"
두식이 소리쳤다.
초등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가 찢어진 울타리 틈에서 고개를 돌렸다. 손에는 비에 젖은 축구공이 들려 있었다.
"공만 가져갈게요!"
"공은 다시 사면 돼도 머리는 다시 못 산다. 당장 나와!"
그 순간 공터 중앙의 공기가 접혔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푸른 원이 허공에 열렸다. 원 안쪽은 계단 없는 지하실처럼 어두웠다. 늦게 울린 경보음이 골목을 찢었다.
[인근 주민은 즉시 대피하십시오. F급 게이트 이상 반응 발생.]
사람들이 창문을 열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두식은 손수레를 버리고 뛰었다.
"구경하지 말고 골목 뒤로 빠져! 차 빼지 마! 사람부터!"
목소리가 골목을 때렸다. 현장 반장 시절 수십 명의 인부를 움직이던 호통이었다. 김 사장이 반사적으로 셔터를 내렸고 행인 둘이 아이 엄마를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게이트에서 먼저 나온 것은 길쭉한 앞발이었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검은 발톱이 박혔다. 그 뒤를 개만 한 몸뚱이가 비집고 나왔다. 등에는 돌조각 같은 껍질이 붙어 있었고 턱은 삽날처럼 넓었다.
"마수다!"
"헌터 불러!"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현장은 늘 사이렌보다 빨리 무너졌다.
아이의 발밑 울타리 기둥이 삐걱거렸다. 게이트의 진동 때문에 흙이 빠지고 있었다. 두식의 눈에는 무너질 방향이 보였다. 기둥은 아이 쪽으로 넘어지고 마수는 소리에 끌려 그쪽으로 뛸 것이다.
"엎드려!"
아이는 얼어붙었다.
두식은 손수레에서 폐지 묶음 하나를 들어 울타리 쪽으로 던졌다. 젖은 폐지가 기둥 아래를 막아 잠깐 버팀목이 됐다. 그는 이어 노끈을 낚아채 표지판 지지대에 감았다.
"에휴, 요즘 놈들은 위험하면 몸이 굳어. 나 때는 소장 욕이 먼저 날아왔는데."
그는 중얼거리며 뛰었다.
마수가 아이 쪽으로 돌진했다. 바닥을 긁는 발톱 소리가 삽질 소리처럼 날카로웠다. 두식은 표지판 지지대를 뽑아 들었다. 무겁고 녹슬었지만 균형은 나쁘지 않았다.
"이놈아! 애한테 가는 길은 막혔다!"
그는 지지대를 마수 앞발 옆 틈으로 찔러 넣었다. 정면으로 막을 힘은 없었다. 대신 방향을 틀면 됐다. 굴착기 버킷도 정면에서 받으면 죽지만 옆 힘을 주면 흐름이 바뀐다.
마수의 앞발이 지지대에 걸렸다. 몸이 반 박자 비틀렸다. 그 사이 두식은 아이의 옷깃을 낚아채 밖으로 밀었다.
"뛰어!"
아이가 울면서 굴러 나갔다. 두식의 허벅지에 뜨거운 통증이 번졌다. 마수의 발톱이 작업복을 찢고 지나간 것이다.
"반장님!"
누군가 외쳤다.
두식은 안전모를 눌러 썼다. 숨이 턱까지 찼다. 나이는 정직했다. 무릎은 삐걱거렸고 폐는 찬 공기에 긁혔다.
그래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등 뒤에는 아직 완전히 일어나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골목에는 도망칠 줄 모르는 주민들이 있었다. 현장이 무너지면 반장은 마지막에 나가는 법이었다.
"늙은이 하나 치우겠다고 덤비는 꼴이 영 못 배웠구나."
마수가 다시 몸을 낮췄다.
두식은 지지대를 양손으로 쥐었다. 손바닥 안쪽에서 오래된 굳은살이 뜨거워졌다. 철근, 삽자루, 망치, 곡괭이. 평생 잡았던 모든 손잡이의 감각이 한꺼번에 살아났다.
바닥의 균열이 보였다.
마수의 오른쪽 앞발이 조금 약했다. 등껍질과 목 사이에는 흙이 끼듯 벌어진 틈이 있었다. 저기를 치면 멈출 수 있다. 그런 생각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비켜 봐라."
두식은 한 발 앞으로 나갔다.
"흙밥 먹던 짬이 뭔지 보여줄 테니."
그 순간 세상이 조용해졌다.
눈앞에 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두식은 눈을 찌푸렸다.
[F급 헌터 '마두식' 님이 각성하셨습니다.]
마수가 뛰어올랐다.
푸른 글자가 한 줄 더 번졌다.
[특수 권능 '노장의 짬밥(S)'이 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