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무기들이 나한테만 말을 걸어

30화: 출고되지 못한 목소리
벽면 단말기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출고까지: 00:23:16]
시우는 휠체어 팔걸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이 희게 질렸지만 일어서지는 못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순간 윤채아가 그의 어깨를 눌렀다.
"안 됩니다. 지금 이동하면 감응 후유증이 다시 올라와요. 3구역까지는 차로도 시간이 걸립니다."
"그럼 저 상자는 그냥 나가요."
"아니요. 나가게 두지 않겠습니다."
윤채아는 단말기를 마도윤에게 넘겼다.
"물류망 관제와 연결하세요. 관리국 긴급 보존 정지 요청으로요."
마도윤이 곧바로 통신을 열었다. 백은서는 개인 무기 운용 대장의 읽기 전용 로그와 이관 대기열을 나란히 띄웠다.
"관리국 기록에는 대상 번호가 비어 있습니다. 하지만 협회 서식이 넘긴 승인값에는 물류 관제 접속 키가 남아 있어요. 두 기록이 같은 상자를 가리킨다는 걸 증명하면 영상 열람까지는 가능합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화면 한쪽에 노란 경고가 떴다.
[출고 승인 완료]
[협회 심사 이관 대기열 연동]
서진혁의 얼굴이 굳었다.
"중앙 배포 서식의 승인값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제 보류 기록보다 먼저 들어갔군요."
"그러니까 지금 취소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의 신청입니다. 현장 출고를 강제로 멈출 권한은 관리국에 있습니다."
백은서가 고개를 저었다.
"번호 없는 화물이라 정지 명령이 한 번 거절됐어요. 관제를 먼저 열어 실제 위치와 봉인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프의 현이 시우 무릎 위에서 가늘게 떨렸다.
저기. 차가운 바닥. 쇠 냄새. 닫힌 소리.
시우는 하프를 감싼 천 끝을 손가락으로 고쳐 주었다. 현을 누르지 않고 흩어진 천만 다시 덮어 주는 손길이었다.
"하프가 들었어요. 물류창고 바닥에 있고 금속 상자 안에 있어요."
"그 정보만으로는 법정식 정지가 어렵습니다." 백은서가 말했다. "대신 관제 화면은 열 수 있어요. 시우 군이 오래 버틸 수 있습니까?"
윤채아가 먼저 대답했다.
"오 분. 맥박이 흔들리면 바로 중단합니다."
시우는 귀 안쪽에 남은 울림을 삼켰다. 조금 전부터 관자놀이가 둔하게 쑤셨다.
"삼 분이면 돼요. 제가 가는 건 아니에요. 여기서 묻기만 할 거예요."
아스칼론이 낮게 울렸다.
꼬맹이. 네 몸으로 시간을 깎지 마라.
"시간을 깎는 게 아니라 막는 거예요."
에제키엘의 반사면이 천천히 밝아졌다.
원격 화면도 반사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품격 없는 화질은 제 책임이 아닙니다.
백은서가 마지막 인증 창을 열었다. 윤채아의 긴급 안전 권한과 이관 대기열의 승인 키가 맞물리자 관제 화면이 켜졌다.
회색 바닥 위에 크고 작은 화물 상자가 줄지어 있었다. 자동 적재선은 천천히 움직였고 작업자들은 노란 안전선 밖을 오갔다.
가장 안쪽에는 납줄로 봉인된 검은 금속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앞의 표찰에는 글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미등록 유물]
[분류: 무응답]
[출고: 폐기성 보존 이관]
시우의 속이 서늘해졌다.
"폐기성 보존이 뭐예요?"
"위험도는 남았는데 관리 주체가 없는 물건을 장기 격리 구역으로 넘기는 분류입니다." 백은서가 답했다. "실질적으로는 누구도 확인하지 않는 창고죠."
하프가 현을 움츠렸다.
먼지 아래.
시우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상자 가까이 가는 사람 있나요?"
마도윤이 물류 관제 직원에게 전달했다. 잠시 뒤 통신 너머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해당 화물은 봉인 이상 없습니다. 출고 정지 요청은 서면으로 넣으십시오. 적재선은 이미 예약됐습니다."
"상자 바닥을 비춰 주세요." 시우가 말했다.
"왜죠?"
"무응답은 답이 없는 게 아니에요. 답을 못 하게 만든 걸 수도 있어요."
상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속 작업자가 상자를 지나쳤다. 그때 에제키엘의 표면에 회색 바닥과 다른 그림자가 번졌다.
멈추십시오.
거울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상자 바닥이 아닙니다. 납줄 안쪽을 보세요.
시우가 숨을 삼켰다. 에제키엘이 비춘 화면에는 상자의 봉인 납이 보였다. 납 표면을 따라 머리카락처럼 가는 검은 선이 두 겹으로 감겨 있었다.
글레니르의 사슬이 대장간 바닥을 끌었다.
이름을 묶은 매듭이다. 입을 막고 빈칸에 무응답을 적는다.
그림자의 계약이 조용히 페이지를 넘겼다.
대답하지 못한 자의 침묵은 이관 동의가 아니다.
검은 선이 화면에서 꿈틀거렸다. 상자 옆에 붙은 작은 단말기에는 초록 불이 켜져 있었다.
[적재 승인]
"백은서 씨. 저 선이 승인 단말기랑 이어져 있어요."
"확인했습니다. 심사 서식에 있던 매듭과 같은 결이에요."
서진혁이 이를 악물었다.
"물류망에는 정식 이관으로 등록돼 있습니다. 협회 명의로요."
"그 명의가 틀렸다는 걸 지금 보고 있잖아요." 윤채아가 말했다. "긴급 차단 요청을 제 이름으로 올립니다."
"대상 번호가 없으면 거절될 겁니다."
"그럼 번호를 찾으세요."
시우는 거울을 보았다.
"에제키엘. 상자 안을 비출 수 있어요?"
각도가 모자랍니다. 하지만 납줄에 비친 틈은 있습니다.
거울 표면이 흔들렸다. 시우의 귀 안쪽이 바늘에 찔린 듯 아팠다. 윤채아가 손목의 맥박계를 확인했다.
"시우 군. 십 초만 더입니다."
"알아요."
상자 안에는 손바닥만 한 청동 조각이 있었다. 깨진 장식처럼 보였지만 표면에는 지워진 글자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위로 검은 실이 여러 겹 감겨 있었다.
그 순간 아주 낮은 소리가 들렸다.
…내리지 마.
시우의 손가락이 멈췄다.
"들렸어요."
윤채아가 즉시 마도윤을 보았다.
"현장에 전달. 상자를 적재선에서 내리지 말고 바닥에 그대로 두게 해요. 사람은 세 걸음 물러나고요."
통신 너머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하면 자동 적재가 멈춥니다. 손해가 큽니다."
"사람부터 물러나세요." 윤채아의 목소리가 얼어붙었다. "관리국 긴급 안전 지시입니다."
화면 속 작업자가 머뭇거리다 상자에 손을 댔다. 그러자 납줄 안쪽의 검은 선이 튀어 올랐다. 상자 밑에서 짧은 금속음이 터졌다.
아스칼론이 외쳤다.
누르지 마라. 바닥을 친다.
"손 떼세요!" 시우가 소리쳤다.
작업자가 손을 뗐다. 검은 선은 상자를 조이는 대신 바닥의 안전선 쪽으로 기어갔다.
백은서가 빠르게 키를 눌렀다.
"적재선 제어에 붙으려 합니다. 글레니르가 묶은 선을 따라가면 실행 권한을 잠깐 멈출 수 있어요."
글레니르가 사슬을 한 번 당겼다.
끊으면 상자가 떨어진다. 묶는다.
사슬이 화면의 검은 선을 감쌌다. 초록 불이 한 번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시우는 청동 조각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
"내리지 말라는 게 출고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아니면 상자를 열지 말라는 뜻이에요?"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하프의 현이 작은 박자를 만들었다. 하나. 둘. 셋.
청동 조각이 그 박자 뒤에 낮게 울렸다.
…땅. 아래. 아직.
에제키엘의 반사면에 지워진 글자가 잠깐 떠올랐다.
[경주 서악동 임시 발굴품]
시우는 숨을 들이켰다.
"출고도 안 되고 상자도 열면 안 돼요. 땅 아래에 아직 남은 게 있다는 뜻이에요."
검은 선이 갑자기 상자를 떠났다. 화면 위로 검은 실 하나가 길게 튀어 올라 천장 배관 쪽으로 달아났다.
"도망갑니다." 에제키엘이 말했다. "그러나 방향은 남겼습니다."
마도윤이 현장 화면을 확대했다. 검은 실이 지나간 바닥에 희미한 세 갈래 흉터 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백은서가 외쳤다.
"적재선 정지 성공. 출고 취소로 바뀝니다."
[출고 상태: 보류]
화면 속 상자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납줄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검은 선은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시우는 그제야 팔걸이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는 땀이 차 있었고 귀 안의 울림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하프의 현도 완전히 가라앉지 못했다. 시우는 자기 손목을 주무르는 대신 하프 곁의 천을 한 번 더 여며 주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목소리를 끝까지 들어 줄 책임이 생긴 것 같았다.
윤채아가 화면을 닫으려 하자 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만요. 보호실로 옮길 때도 상자를 열면 안 돼요. 바닥에 둔 상태로 봉인선부터 따로 확인해야 해요."
"기록합니다." 윤채아가 즉시 답했다. "상자는 현장 바닥 고정 후 관리국 이동 보호실로 이송. 개봉 금지. 물리 봉인과 발언 차단 매듭의 분리 검증이 끝나기 전까지 이관 금지."
서진혁도 단말기를 들어 올렸다.
"협회에도 같은 조건으로 정정 통지를 넣겠습니다. 이관 대기열에서 무응답 분류 전체를 동결하겠습니다."
하프가 아주 작게 울었다.
아직 더 있어.
에제키엘의 반사면에는 경주 방향으로 뻗은 검은 실이 남아 있었다. 실 끝은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갈래의 매듭이 땅속 어둠에 박힌 채 같은 낮은 울림을 누르고 있었다.
시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럼 경주에 가기 전까지 하나도 내보내지 못하게 해야 해요."
에제키엘의 표면 한쪽에 지워진 글자 하나가 다시 비쳤다.
[서악동 지하 보관소]
그 아래에서 이름을 잃은 목소리들이 하프의 박자에 맞춰 아주 작게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