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Synchronization) : 그놈의 눈으로 본 것

23화: 마지막 신호
01:13
01:12
붉은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가스 보관 룸의 공기가 더 얇아지는 것 같았다.
서도진은 컨트롤러 후면 커버를 뜯어내며 이를 악물었다. 손가락 마디에 묻은 기름과 피가 검게 엉겼고 뜯겨 나온 배선 뭉치가 축축한 바닥 위로 축 늘어졌다.
"통신선이 없다."
도진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메인 보드 뒤에는 전원선과 압력 센서뿐이야. 원격 신호를 받는 모듈이 여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어디에 있어요?"
민세아가 진혁의 몸을 끌어안은 채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진혁은 대답하려 했으나 목구멍에서 피가 먼저 치밀어 올랐다.
켁.
검붉은 피가 손등 위로 흩어졌다. 진혁의 왼쪽 팔다리는 차가운 납덩이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오른쪽 손가락마저 경련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복도 너머에서는 묵직한 구두 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자박.
자박.
발소리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일정했다. 사냥감을 가둬 놓은 사람이 일부러 들려주는 박자였다.
"진혁아."
도진이 리볼버를 철문 쪽으로 겨눈 채 말했다.
"네 몸 상태로 한 번 더 보면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봐야겠냐?"
진혁은 세아가 붙잡은 손의 온기를 느꼈다. 그 온기는 멀고 희미했지만 아직 끊어지지 않은 현실의 선이었다.
"제가…… 보지 않으면 다 죽습니다."
"진혁 씨!"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놈의 현재 감각에 스치기만 할 겁니다. 세아 씨, 내 이름을 계속 불러주십시오."
세아가 눈물을 삼키며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강진혁. 당신 이름은 강진혁이에요. 지승현이 아니에요. 내 목소리만 들어요."
진혁은 눈을 감았다.
순간 검은 물속으로 얼굴이 처박히는 듯한 압력이 머리를 짓눌렀다. 지승현의 살의가 차가운 철 냄새를 머금고 밀려왔다. 진혁은 그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아주 짧게.
눈꺼풀 틈으로 타인의 시야가 번쩍였다.
복도. 젖은 콘크리트.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은 단말기. 그리고 가스 보관 룸 천장, 출입문 바로 안쪽에 붙은 노란 경고등.
경고등 뒤에 손바닥만 한 은색 릴레이 박스가 숨어 있었다. 그 박스에서 검은 동축 케이블이 천장 배관을 타고 외부 안테나로 이어졌다.
'누구냐.'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목소리였다.
진혁의 눈앞이 찢어지듯 하얗게 번졌다.
"천장…… 문 안쪽 경고등 뒤입니다. 노란 경고등 뒤에 무선 릴레이가 있습니다. 검은 동축 케이블을 끊어야 합니다."
그가 간신히 말을 토해냈다.
00:52
00:51
도진이 손전등을 들어 천장을 비췄다. 출입문 바로 위, 오래된 노란 경고등이 먼지와 물때를 뒤집어쓴 채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보인다. 빌어먹을."
그가 발판이 될 만한 것을 찾으려 몸을 돌리는 순간, 복도의 발소리가 멈췄다.
철문 너머 어둠 속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열심히도 했군요."
지승현이었다.
서도진이 즉시 총구를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먼저 보인 것은 창백한 손이었다. 그 손에는 작은 검은 단말기가 쥐어져 있었다. 뒤이어 젖은 구두와 회색 정장 바짓단, 물방울이 맺힌 긴 코트 자락이 천천히 불빛 안으로 들어왔다.
지승현은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왼쪽 눈가에는 얇은 금속테 안경이 차갑게 빛났고 입가에는 추모식장과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서도진 경감. 아직도 공권력을 믿는 표정을 하고 계시네요. 그 총 한 자루가 이 방 안의 압력을, 제 손안의 신호를, 당신들이 망가뜨린 질서를 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단말기 내려놔."
도진의 목소리는 낮고 딱딱했다.
"한 발만 더 들어오면 쏜다."
"쏘세요."
지승현이 단말기를 살짝 들어 보였다.
"제가 쓰러지면서 손가락 힘이 풀리면 이쪽 보조 명령이 바로 전송됩니다. 타이머가 남아 있든 없든 밸브는 열립니다. 경감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시민들이 지상에서 아주 조용히 쓰러지겠죠."
세아의 숨이 멎었다.
진혁은 지승현의 말이 허세인지 판단하려 했으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살의의 냄새뿐이었다. 놈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쓰러지는 순간까지 장면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지승현의 시선이 도진을 지나 바닥에 기대앉은 진혁에게 닿았다.
"그리고 당신."
그 한마디에 진혁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아까부터 내 안쪽을 긁어대던 쥐가 당신이었습니까?"
세아가 본능적으로 진혁 앞을 가렸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요."
"모를 리가."
지승현의 미소가 깊어졌다.
"이상했거든요. 누군가 내 눈의 뒤쪽에서 숨을 쉬고 있었어요. 내 기억을 훔쳐보고 내 손끝의 순서를 따라 하고 내 복수를 더러운 구조 작업으로 바꿔놓더군요."
그의 눈동자가 진혁의 핏빛 눈을 정확히 찔렀다.
"하지만 이제 알겠습니다. 나도 당신을 볼 수 있어요."
진혁의 귓가에서 3년 전 불길 속 비명이 터졌다. 탄내와 빗소리와 지승현의 웃음이 한데 엉켜 자아를 흔들었다.
"강진혁!"
세아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녀의 손이 진혁의 손을 부서질 듯 붙잡았다. 진혁은 세아의 온기에 매달리며 간신히 현재로 돌아왔다.
00:36
도진이 아주 느리게 옆으로 움직였다. 총구는 지승현의 가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세아 씨."
진혁이 피에 젖은 입술을 움직였다.
"제 오른쪽에 있는 은색 틴케이스…… 아까 열쇠가 들어 있던 그 케이스를 밟고 올라서면 경고등에 손이 닿을 겁니다. 커버 왼쪽 아래, 십자 나사가 하나 있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거기에 있어요."
지승현의 눈이 세아 쪽으로 돌아갔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도진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당신도 움직이지 마."
둘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굳었다.
세아는 진혁을 한 번 보았다. 진혁은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세아가 몸을 날렸다.
지승현이 단말기를 쥔 손을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도진의 리볼버가 불을 뿜었다.
탕!
총알은 지승현의 손목을 맞히지 못했다. 그가 한 박자 먼저 몸을 틀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탄환은 철문 가장자리의 배관 브래킷을 때리고 튕겨 나가며 파편을 흩뿌렸다.
"아악!"
세아가 파편을 피해 몸을 숙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의 은색 틴케이스를 끌어다 놓고 그 위에 발을 올렸다. 젖은 바닥 때문에 케이스가 미끄러졌고 세아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왼쪽 아래!"
진혁이 소리쳤다.
"손끝 두 마디 아래입니다!"
지승현이 세아에게 달려들었다.
도진이 그의 앞을 막았다. 두 남자의 몸이 철문 옆 벽에 거칠게 부딪혔다. 지승현의 손에서 접이식 칼날이 번쩍이며 튀어나왔고 도진의 왼쪽 팔뚝을 깊게 그었다.
"큭!"
도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팔을 내어준 대신 지승현의 손목을 틀어쥐고 벽에 찍어 눌렀다.
"세아 씨, 빨리!"
00:24
세아가 손전등 뒤쪽 금속 캡을 드라이버처럼 세워 경고등 커버의 숨은 나사를 돌렸다. 손이 떨려 한 번 헛돌았다.
"강진혁."
그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신은 돌아와야 해요. 내가 지금 이걸 열 테니까 당신도 버텨요."
딸깍.
커버가 반쯤 열렸다. 그 안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은색 릴레이 박스와 검은 케이블이 드러났다.
진혁의 시야가 다시 뒤틀렸다.
지승현의 눈으로 보는 세아의 등이 보였다. 목덜미가 너무 가까웠다. 칼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진혁은 놈의 살의가 자기 손의 충동처럼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안 돼……."
그가 이를 깨물었다.
"세아 씨, 검은 선입니다! 회색 전원선 말고 나사산처럼 꼬인 검은 동축선!"
세아가 릴레이 박스 안으로 손을 넣어 검은 케이블을 잡아당겼다. 손가락 끝에 전기가 튀며 작은 불꽃이 박혔다.
"으윽!"
"놓지 마요!"
진혁이 절규했다.
도진과 지승현은 바닥으로 굴렀다. 단말기가 지승현의 손에서 튕겨 나가 물웅덩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지승현이 그것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도진이 리볼버를 거의 밀착시켜 그의 어깨를 쐈다.
탕!
지승현의 몸이 뒤로 꺾였다. 비명은 짧았다. 그는 피가 번지는 어깨를 움켜쥐면서도 웃고 있었다.
00:11
00:10
세아가 펜치를 케이블에 물렸다.
"잘라요!"
서걱.
검은 동축 케이블이 끊어졌다.
컨트롤러의 경보음이 한순간 끊겼다. 붉은 숫자가 00:08에서 얼어붙었다.
그러나 곧이어 더 낮고 둔탁한 경고음이 방 안을 울렸다.
[PRESSURE RESIDUAL: MANUAL VENT REQUIRED]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도진이 피투성이 팔로 몸을 일으켰다.
실린더 상단의 압력계 바늘이 다시 적색 구역을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진혁은 피로 흐려진 눈을 가늘게 떴다. 동조의 잔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지승현이 장치를 조립하던 손끝, 마지막 안전 절차를 비웃듯 확인하던 순간.
"오른쪽 벽…… 수동 배출 레버가 있습니다. 노란 봉인줄을 끊고 아래로 당기면 보조 배기구로 압력이 빠집니다. 완전히 당겨야 합니다. 중간에서 멈추면 역류합니다."
도진이 벽으로 몸을 날렸다.
지승현은 바닥의 단말기를 향해 다시 기어갔다. 총상을 입은 어깨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그의 손가락은 아직 살아 있었다.
세아가 그 앞에 떨어진 손전등을 걷어찼다. 묵직한 금속 손전등이 단말기를 맞히며 물웅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치직.
작은 스파크가 튀며 단말기 화면이 꺼졌다.
지승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사라졌다.
도진이 봉인줄을 이로 물어 뜯고 레버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숙여!"
레버가 아래로 꺾였다.
푸아아아악!
방 오른쪽 보조 배기구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열렸다. 하얀 증기와 압축 공기가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실린더 안쪽에 남아 있던 압력이 지상 환기구가 아니라 폐쇄된 보조 배출관으로 빠져나가며 방 전체가 거칠게 흔들렸다.
진혁의 몸이 뒤로 밀렸다. 세아가 그를 끌어안고 바닥에 엎드렸다.
"진혁 씨! 내 목소리 들어요!"
증기 속에서 지승현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도진이 다시 총구를 들었지만 하얀 압력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00:08
컨트롤러의 숫자가 꺼졌다.
[ACTUATION ABORTED]
[FLOW LOCKED]
세아가 그 글자를 본 순간, 참아왔던 숨을 터뜨렸다.
"멈췄어요…… 정말 멈췄어요."
도진은 피 흐르는 팔을 움켜쥔 채 복도 쪽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지승현!"
대답은 가까운 곳에서 들리지 않았다.
대신 진혁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속삭임이 울렸다.
'강진혁.'
진혁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제 네가 보는 것도 조금은 보이는군.'
증기가 걷혔을 때, 지승현은 사라지고 없었다. 바닥에는 피 묻은 발자국이 복도의 더 깊은 어둠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지상에서는 추모식 사회자의 목소리가 천장을 타고 희미하게 울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만 명의 박수 소리가 콘크리트 너머에서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스는 멈췄다.
하지만 진혁은 알았다.
그들이 막아낸 것은 지승현이 준비한 죽음의 한 가지 방식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괴물은 진혁의 눈을 향해, 거울의 반대편에서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