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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 오버 타임1화

시그널 오버 타임 (Signal Over Time)

시그널 오버 타임

시놉시스

손가락 부상으로 은둔하며 사설 데이터 복구 업자로 살아가는 강선우. 어느 날 그에게 정체불명의 의뢰인이 보낸, 액정이 무참히 반파된 2023년형 플립폰이 접수된다. 죽은 기판을 개조해 간신히 켠 순간, 메신저를 타고 날아온 의문의 텍스트. "왜 자꾸 저 피하세요?" 그것은 2년 전인 2024년, 동명이인의 다른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던 대학원생 윤하은의 오인 전송이었다. 이름이 같다는 사소한 오해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는 두 사람.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서로가 나누는 다정한 대화 너머로, 2년이라는 잔인한 시공간의 시차가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1화: 먼지 쌓인 액정 위의 신호

비가 내리는 날이면 왼손 검지 마디가 찌릿하게 저려왔다.

선우는 정밀 핀셋을 쥔 손을 멈추고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회색빛 하늘에서 떨어지는 굵은 빗줄기가 반지하 방의 낡은 창문을 거칠게 두들기고 있었다. 한때는 대기업 연구소에서 가장 주목받는 천재 임베디드 개발자라 불렸던 그였다. 하지만 3년 전, 예기치 못한 사고로 손가락 신경이 끊어진 이후 선우의 세계는 이 좁고 어두운 방 안으로 축소되었다.

지금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인터넷으로 의뢰받은 고장 난 전자기기를 복구해주거나, 디지털 포렌식 기술로 데이터를 살려내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전부였다.

탁.

방 한 구석에 던져두었던 택배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흘 전, 발송인 이름도 없이 선우의 작업실 주소만 적힌 채 도착한 의문의 의뢰품이었다. 상자 안에는 종이 한 장과 기기 하나, 그리고 구겨진 무설탕 사탕 껍질 몇 개와 작은 플라스틱 캡 하나가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 안에 든 메신저 대화 기록이랑 사진 전부 복구해 주세요. 비용은 얼마든지 지불합니다. ]

컴퓨터 타이핑으로 인쇄된 건조한 메모 아래에 놓인 것은 에이콜(A-Call) 사의 2023년형 플립폰이었다.

상태는 처참했다. 반으로 접히는 내부 액정은 무참하게 바스러져 유리가루가 떨어졌고, 힌지 사이에는 말라붙은 진흙과 검붉은 얼룩이 잔뜩 끼어 있었다. 망치로 내리찍은 듯 처참하게 뒤틀린 고철 덩어리. 일반적인 사설 업체라면 단번에 수리 불가 판정을 내리고 쓰레기통에 던졌을 만한 물건이었다.

"대체 뭘 하던 폰이길래 이 모양이야."

선우는 기이한 오기가 발동해 기기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정밀 드라이버로 나사를 풀고 하우징을 벗겨내자 처참한 겉모습과 달리 메인보드의 핵심 칩셋은 기적적으로 손상을 피한 상태였다. 다만 디스플레이 커넥터 라인이 통째로 끊어지고 배터리 셀도 방전된 상태였다.

"보드 라인만 바이패스해서 외부 모니터로 출력을 우회하면 덤프(Dump) 파일은 딸 수 있겠는데."

선우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가변 파워서플라이와 서브 모니터를 기판에 직결했다. 정밀 전압을 3.8V로 맞추고 전원 단자에 악어 클립을 조심스럽게 물렸다. 오랜만에 초정밀 작업에 집중한 탓인지 저린 손가락 끝에 미세한 열감이 올랐다. 그는 측면의 전원 칩을 핀셋으로 쇼트시켜 전원을 강제로 인가했다.

위잉-.

짧은 진동음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책상 위 서브 모니터 화면 위로 선명한 로고가 떠올랐다.

[ A-Call Flip - Welcome ]

"좋아, 보드는 살렸고."

선우의 입가에 아주 오랜만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기계는 정직하다. 부서진 회로를 잡고 올바른 전류를 흘려보내면 어떻게든 반응한다. 제멋대로 부서지고 치유되지 않는 인간의 마음과는 달랐다.

선우는 마우스를 연결해 내부 메모리를 탐색했다. 통신사 네트워크는 개통되지 않아 상단 바에는 '인증 필요'를 뜻하는 표시가 떠 있었다. 그는 의뢰인이 요구한 메신저 데이터를 추출하기 위해 가상 샌드박스 툴을 실행했다. 그 순간, 기기 내부 메모리에 엉켜있던 메신저의 데이터 패킷이 복구 장비의 신호와 강제로 동기화되며 서브 모니터 화면에 대화창 하나가 불쑥 팝업되었다.

[ 발신인: 하은_Haeun ]
[ 오늘 학과 사무실 앞에서 마주친 분 맞죠? 예전에 단톡방에서 보았던 메신저 ID 기억해내서 남겨요…… 왜 자꾸 저 피하세요? 제가 그렇게 불편해요? ]

"……?"

선우는 미간을 짚었다. 문장 속에 적힌 원망 섞인 어조. 하지만 선우는 프로필에 적힌 '윤하은'이라는 이름을 전혀 알지 못했다. 시각디자인과라는 소속도, 선우가 나온 기계공학과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이름이 같아서 잘못 보낸 건가."

선우는 사설 복구 업자로 일하며 가끔 겪었던 오인 전송 해프닝이라 생각했다. 누군가 '강선우'라는 이름을 메신저 디렉토리에서 검색해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에게 잘못 던진 메시지일 터였다.

선우는 시스템 로그를 정리하려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3년 전 부상 이후 늘 방안에 갇혀 가라앉아 있던 마음에 일어난 아주 사소한 충동이었다. 어차피 이 폰은 통신 회선이 끊긴 먹통 상태였기에 답장을 적어봤자 상대에게 전송될 리가 없었다. 그저 맛이 간 앱의 화면 위에 낙서를 하는 무의미한 행위에 불과했다.

선우는 키보드를 두드려 텍스트 창에 답장을 입력했다.

[ 저 안 피했는데요.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

선우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는 역시나 예상대로 [ 네트워크 연결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라는 경고 팝업이 떴다.

"그럼 그렇지. 내가 지금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한 거냐."

선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파워서플라이의 전원 스위치를 내렸다. 모니터의 불빛이 스러지고 방안은 다시 어둠과 빗소리로 가득 찼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피로가 몰려오는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우우웅, 우우웅-.

책상 위를 거칠게 진동하는 소리에 선우는 번쩍 눈을 떴다. 암전된 방안,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우우웅, 우우웅-.

진동의 진원은 다름 아닌 방금 전 전원을 완전히 차단해 두었던 플립폰의 햅틱 모터였다.

"뭐야……? 왜 이래?"

선우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파워서플라이의 전원 스위치는 분명히 꺼져 있었다. 외부 전류가 전혀 없는데 기기가 스스로 작동하는 것은 물리적 법칙을 위배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브 모니터 화면에는 선명한 파란색 조명과 함께 메신저 알림이 격렬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

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회선이 끊긴 기기에 실시간 메신저 알림이 오다니. 그는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움직여 클릭했다.

[ 발신 ID: 하은_Haeun ]
[ 사람 잘못 보긴 뭘 잘못 봐요! 목소리 다 알고 디자인과 선배들이 강선우 맞다고 확인까지 해줬는데! 진짜 치사하게 끝까지 모른 척하기예요? ]

화면 가득 박힌 메시지.

선우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진짜 윤하은에게서 온 답장이었다. 선우는 자신의 메신저 앱을 켠 것도 아닌데, 고치고 있던 의뢰품의 화면을 통해 그녀와 실시간으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기이한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한 선우는 엉겁결에 자판을 두드렸다.

[ 진짜 사람 잘못 보셨다니까요. 저 그 디자인과 선배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 새벽에 안 자고 뭐 합니까? ]

이번에는 오류 문구가 뜨지 않았다. [ 전송 완료 ]라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찍혔다.

같은 시각, 2년 전인 2024년 5월 31일 새벽.
한국대 디자인 전공실에서 밤샘 과제를 하던 하은은 자신의 플립폰 화면을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낮에 학과 사무실 앞에서 차갑게 가버렸던 디자인과 강선우 선배가, 드디어 메신저에 답장을 보낸 것이었다. 자꾸만 자기가 그 선배가 아니라고 발뺌하는 모습이 꼭 자신을 놀리려고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하은은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 자긴 뭘 자요, 오늘 축제 주점 마지막 날이라 서빙하느라 영혼까지 털렸구만. 지금 과제실에서 밤새우고 있어요. 선우 씨야말로 과제 안 해요? ]

2026년의 선우는 모니터에 떠오른 '축제 주점'이라는 단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축제 주점? 대동제는 일주일 전에 다 끝났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사람은."

올해 한국대 축제는 이미 일주일 전에 완전히 끝이 났고, 오늘은 일요일 새벽이었다. 선우는 하은이 그저 피곤해서 헛소리를 하거나, 축제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과장 섞인 농담을 던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완전히 다른 시간의 축선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그렇게 이름이 같아 생긴 오해와 착각 속에서 첫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2024년의 하은에게도, 2026년의 선우에게도 똑같이 거센 봄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해의 빗소리가, 두 사람의 메신저 창 사이에서 기묘하게 얽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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