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신(萬神)의 영도자 : 귀신 부리는 소년

5화: 붉은 실의 전학생
보건실 침대 위에서 윤서현이 눈을 떴다.
"나 복도에서 쓰러졌어?"
강은우는 창가에 서 있었다. 대답 대신 서현의 가방 손잡이 끝을 보았다. 검은 명찰 조각은 최태훈이 봉투에 담아 가져갔지만 가죽에는 아직 축축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검은 습기가 실처럼 손잡이를 감고 있었다.
"어지러웠대. 쉬어."
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은우의 소매를 붙잡았다.
"근데 누가 계속 불렀어. 우리 할머니 목소리로."
은우의 발끝이 멈췄다.
서현은 제 말을 이상하게 여긴 듯 손을 놓았다. 눈가에 얇은 불안이 번졌다.
"꿈이었겠지? 할머니 돌아가신 지 오래됐는데. 이상하게 진짜 같았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사람을 붙들기 위해 가장 아픈 자리를 골랐다.
은우는 서현의 손목에 남은 검은 얼룩을 보았다. 어제 배수구에서 끊어 낸 표식보다 훨씬 옅었다. 하지만 완전히 죽은 흔적도 아니었다.
"오늘은 혼자 다니지 마."
"왜?"
"그냥. 또 어지러울 수 있으니까."
서현은 한참 은우를 바라봤다. 장례 뒤에도 억지로 평소처럼 굴어 준 아이였다. 필기 사진을 보내며 답장은 안 해도 된다고 적어 준 아이이기도 했다.
은우는 그녀에게 귀신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미안했다.
"알았어. 너도 좀 쉬어. 얼굴 되게 안 좋아."
보건실을 나온 은우는 바로 태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명찰 하나를 끊었는데도 남아 있어요."
"잔향이면 사라질 거다."
"아니요. 서현이가 다른 목소리도 들었대요. 죽은 할머니 목소리요."
전화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표식이 퍼진 거다. 한 놈이 밥을 못 먹으면 옆자리를 문다. 사물함과 가방부터 확인해. 검은 우산 모양이 보이면 만지지 말고 사진을 보내."
"제가 혼자 다 보라고요?"
"학교에 네가 있으니까. 나는 납품 차량을 보겠다. 급식실 쪽에서 들어온 게 맞는지 확인해야 해."
"표식이 학생들한테 붙으면요?"
"네가 지켜. 대신 모르면 베지 마라."
전화가 끊겼다.
은우는 텅 빈 복도를 보았다. 멀리서 웃고 떠드는 학생들 사이로 사물함 문이 하나씩 보였다. 대부분은 평범한 금속문이었다.
하지만 몇 개의 손잡이에는 아주 얇은 검은 선이 감겨 있었다.
그날 은우는 수업 내내 사물함 쪽만 힐끗거렸다. 문을 열고 닫는 아이들마다 방울이 아주 작게 떨렸다. 그는 명찰 조각이 몇 개나 더 있는지 셀 수 없었다.
점심시간에 서현의 친구가 사물함을 열자 은우는 반사적으로 복도 끝까지 따라갔다. 안에는 체육복과 구겨진 공책밖에 없었다. 그래도 공책 표지 아래에서 검은 선 하나가 꿈틀거리다 은우의 시선을 느끼고 사라졌다.
그는 손을 뻗지 못했다. 태훈의 말대로 모르는 것을 베면 안 됐다. 누군가의 물건을 망가뜨려 놓고 위험하다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 답답함이 목 안에 걸린 채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교실 문 앞에는 낯선 여학생이 서 있었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아이였다. 검은 머리는 낮게 묶여 있었고 왼손에는 낡은 노트가 들려 있었다. 오른손 검지에는 붉은 실이 여러 번 감겨 있었다.
담임이 출석부를 덮었다.
"오늘부터 같이 지낼 전학생 서아린이다. 빈자리 앉아."
아린은 고개만 숙였다. 빈자리는 하필 은우의 대각선 앞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창문과 천장을 한 번씩 훑었다. 사람이 아니라 공간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은우의 주머니 속 방울이 아주 작게 울렸다.
딸랑.
쉬는 종이 울리자 아린은 교실 밖으로 나갔다. 망설임 없이 서현의 사물함 앞에 쭈그리고 앉더니 붉은 실을 손잡이에 묶었다.
은우는 뒤따라 나갔다.
"거기서 뭐 해."
아린은 놀라지 않았다. 실 끝을 사물함 옆 못 자국에 걸며 대답했다.
"묻고 싶은 말이 그거뿐이면 조용히 있어."
"남의 사물함에 손대는 사람한테 조용히 있으라고?"
"남의 사물함 안에 든 게 네 뒤를 따라다니고 있어."
은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누구야. 명신에서 왔어?"
아린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맑지만 차가운 눈이었다.
"명신? 그 이름을 네가 왜 알아?"
"대답부터 해."
"아니야. 명신에서 온 사람이면 이런 조잡한 표식부터 막고 있지 않겠지."
그녀는 붉은 실을 복도 양쪽 벽의 못 자국에 걸었다. 선이 서현의 사물함 둘레를 네모로 감쌌다. 바닥에는 얇은 붉은 테가 생겼다.
"어제부터 이 층 화장실 쪽 결계가 자꾸 꺼졌어. 그래서 확인하러 왔는데 네가 먼저 걸렸네."
"전학까지 와서 그걸 확인한다고?"
"그 질문엔 아직 답 안 해. 너도 다 말하지 않았잖아."
은우는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결계?"
"가만히 있어. 네가 화내면 저게 네 쪽으로 붙어."
"저게 뭔데."
"입만 남은 잡귀. 사람 목소리를 베껴서 대답을 받아. 대답한 사람 안에 길을 만들지."
사물함 안에서 작게 긁는 소리가 났다.
은우의 주머니 속 방울이 울렸다.
딸랑.
붉은 실 안쪽에서 검은 물이 새어 나왔다. 물은 사물함 문을 타고 내려와 글자처럼 번졌다.
‘은우야.’
다정하고 늙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문 열어라.’
은우의 손이 사물함 손잡이로 향했다. 그 목소리는 박 신방의 것이었다. 죽기 전까지 그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아린이 그의 손목을 쳤다.
"대답하지 마!"
은우는 이를 악물고 손을 거뒀다.
"할머니 목소리야."
"아니. 네가 제일 듣고 싶은 목소리일 뿐이야."
말은 차가웠지만 아린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붉은 실 하나가 검게 타들어 갔다.
"너도 들려?"
"안 들려도 알아. 그런 건 누구한테나 가장 약한 목소리로 와."
은우가 더 묻기 전에 사물함들이 동시에 쾅쾅 울렸다. 복도 양끝의 문이 벌어지며 검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여기 있어.’
‘열어 줘.’
아린이 노트를 펼쳤다. 빽빽한 글씨 사이에 붉은 선으로 그린 도형이 있었다.
"열세 개. 학교 전체가 아니라 이 층만 묶었어. 더는 못 버텨."
"그럼 내가 베면 되잖아."
"한꺼번에 베면 표식이 듣고 있는 애들한테 튄다고. 네 검은 강하니까 그만큼 조심해서 써."
은우는 그녀를 노려봤다.
"내 검을 알아?"
"네 손에 묻은 사기를 보면 모르는 게 이상하지. 방울 있지? 결계 가운데에 놔."
지시받는 기분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사물함 안에서 서현의 목소리가 울먹이는 것을 듣자 더 따질 수 없었다.
은우는 방울을 붉은 실의 가운데 놓았다. 아린이 두 손으로 실을 당기자 복도에 붉은 그물이 펼쳐졌다.
검은 입들이 사물함 틈에서 쏟아졌다. 입들은 하나같이 은우를 향해 벌어졌다.
‘미안하다.’
할머니 목소리가 말했다.
‘혼자 두고 가서.’
은우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검을 불러 전부 없애고 싶었다.
그 순간 방울이 한 번 울렸다.
딸랑.
[사람을 먼저 보아라.]
백호령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
은우는 복도 끝 창문을 보았다. 교실 문틈으로 몇몇 학생이 겁에 질린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검은 입들은 그 아이들 쪽으로도 가느다란 실을 뻗고 있었다.
"아린. 어디가 핵이야?"
아린이 놀란 눈으로 노트를 훑었다.
"방울 왼쪽. 실 세 가닥이 만나는 곳. 거기만 끊어."
은우는 영패 조각을 쥐었다. 백호참마검이 손 위에서 희미한 흰 선으로 피어났다. 그는 검을 크게 휘두르지 않았다.
숨을 고르고 붉은 실 사이의 검은 우산 문양 하나만 겨눴다.
"끊어."
흰 빛이 지나갔다.
검은 문양이 타들어 가며 비명을 질렀다. 입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려 했지만 아린의 실이 문을 닫았다. 검은 것들은 하나씩 사물함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재가 되었다.
아린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붉은 실이 너무 깊게 파고들어 있었다.
"다친 거예요?"
"결계가 버틴 값이야. 신경 쓰지 마."
그때 마지막 입 하나가 바닥을 기어 여자 화장실 쪽 계단으로 달아났다.
‘목소리는 거기 있어.’
속삭임이 남기고 간 말에 아린의 얼굴이 굳었다.
"저쪽은 안 돼."
"왜요?"
"잠긴 칸에서 울음이 난다는 소문이 있어. 어제부터 그쪽에만 실을 걸어도 끊겼어."
은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훈이었다.
"붉은 실 쓰는 전학생이랑 있나."
은우는 아린을 흘끗 봤다.
"아저씨가 알아요?"
"얼굴은 몰라. 예전에 박 신방이 그런 결계술 쓰는 집안이 있다고만 했다. 지금은 적으로 보이지 않으면 그걸로 됐다."
아린도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태훈이 이어 말했다.
"화장실 쪽은 들어가지 마. 내가 도착할 때까지 입구만 봐."
"알겠어요."
은우는 전화를 끊었다. 아린은 여자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붉은 실을 다시 감았다.
"네 감정이 흔들리면 내 결계도 흔들려. 따라오지 마."
"혼자 들어가지 말랬어요. 아저씨 올 때까지 입구만 확인해요."
아린이 잠깐 그를 봤다.
"내가 널 감시하러 온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은 아니에요."
은우는 방울을 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반대쪽 벽에 붉은 실을 걸었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멈췄다.
화장실 안쪽에서 누군가 울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
그 목소리는 할머니의 것이 아니었다.
아주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