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신(萬神)의 영도자 : 귀신 부리는 소년

시놉시스
대한민국 한복판,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어둠 속에서 인간을 집어삼키는 악귀(惡鬼)들이 횡행한다. 대대로 강력한 신기를 타고났으나 신내림을 거부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려던 고등학생 소년 '강은우'. 어느 날 급작스러운 악귀의 습격으로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를 잃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만신(萬神)을 부리는 계약을 맺게 된다.
과거의 상처를 지닌 퇴마사 동료들(전직 특수부대 출신의 거구 '최태훈', 천재적인 결계술사 '서아린')과 만나 팀을 이룬 은우는, 인간의 욕망을 먹고 자라는 거대한 악의 축 '명신 그룹'과 그 배후의 대악귀에 맞서 도심 속의 영적 전쟁을 시작한다. 귀신을 다스리고 사람을 구하는 소년 무당과 동료들의 처절하고도 뜨거운 퇴마 연대기.
1화: 신을 부르는 눈을 뜨다
차가운 밤공기가 고층 빌딩 숲 사이를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서울 강남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아스팔트 위 웅덩이에 번져 기괴한 얼룩을 만들어내는 시각, 자정이 가까워진 골목길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올해 열여덟이 된 고등학생 강은우는 낡은 가방끈을 꽉 쥐었다. 소년의 눈동자는 깊고 맑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피로가 서려 있었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은우의 눈에는 보였다. 가로등 아래 웅크리고 앉아 피를 흘리는 여인, 빌딩 벽면을 거미처럼 기어 다니는 검은 형체들. 은우는 고개를 숙인 채 오직 앞만 보며 걸었다. 외면해야 했다. 그것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삶은 지옥으로 변하기 마련이니까.
"은우야, 오늘은 일찍 들어오는구나."
낡은 연립주택의 문을 열자, 평생을 무속인으로 살아온 할머니, 박 신방이 인자한 미소로 은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은우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할머니의 어깨 위에 짙은 검은 안개, 즉 사기(死氣)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다. 이 늙은이야 갈 때가 되어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마라. 그보다 은우야, 네 눈에 머문 기운이 날로 강해지는구나. 신령님들께서 너를 부르고 계셔. 언제까지 도망칠 수는 없다."
"싫어요."
은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평생을 신의 노예로 살며 남의 한(恨)이나 풀다 가는 인생은 싫어요. 전 평범하게 살 거예요."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지만, 은우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가슴 속에 웅크린 신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위가 숨이 막힐 듯한 침묵에 잠겼다. 시계 초침 소리마저 멈춘 듯한 기괴한 이질감에 은우는 번쩍 눈을 떴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을 듯 차가웠다. 코를 찌르는 지독한 유황 냄새와 비린내가 진동했다.
쾅!
거실에서 무언가 거대하게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은우는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거실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가구들이 산산조각 나 있었고, 그 중심에 인간의 형상을 일그러뜨린 듯한 거대한 괴수가 서 있었다. 온몸이 썩어 문드러진 검은 진흙 같았고, 수십 개의 붉은 눈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악귀(惡鬼)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원귀와는 궤를 달리하는, 피비린내 나는 살귀였다.
"쿨럭…… 은우야…… 도망쳐라!"
할머니가 거실 바닥에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었다. 할머니의 앞에는 평소 모시던 신령의 영패가 산산조각 나 있었다. 할머니가 가진 미미한 영력으로는 이 거대한 악귀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찮은 무당 무리 놈들. 그 맑은 영혼을 내놓아라!"
악귀가 쇳소리 나는 기괴한 목소리로 포효하며 할머니를 향해 거대한 손을 내뻗었다.
"안 돼!"
은우는 이성을 잃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도, 무섭다는 공포도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오직 하나뿐인 가족을 구해야 한다는 염원만이 뇌리를 지배했다. 은우가 할머니의 앞을 가로막아서는 순간, 악귀의 검은 손톱이 은우의 가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쩍! 하는 굉음과 함께 은우의 몸이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극통과 함께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은우야아아!"
할머니의 비명이 아스라히 멀어져 갔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악귀는 천천히 은우를 향해 다가왔다. 붉은 눈들이 탐욕스럽게 번뜩였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할머니도 구하지 못한 채……?'
무력감과 분노가 은우의 영혼 깊은 곳을 두드렸다. 그 순간, 은우의 가슴 깊숙이 봉인되어 있던 거대한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소년의 핏줄 속에 흐르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만신(萬神)의 혈통이 마침내 깨어난 것이다. 은우의 눈동자가 순백의 빛으로 변하며 영안(靈眼)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주변의 시공간이 멈춘 듯 느려졌다. 그리고 은우의 귓가에 웅장하고 호방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내리쳤다.
[가소로운 미물 놈이 감히 누구의 후손을 탐하느냐!]
은우의 등 뒤로 거대한 환영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집채만 한 크기의 순백의 호랑이, 백호(白虎)의 형상을 한 신령이었다. 서슬 퍼런 살기와 거룩한 영기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악귀는 백호령의 위압감에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소년이여. 네 핏줄에 흐르는 계약의 피를 받아들이겠느냐? 나와 손을 잡고 이 땅의 모든 귀물을 다스리는 영도자가 되겠느냐?]
백호령의 목소리가 은우의 영혼에 직접 내리꽂혔다. 은우는 흘러내리는 피를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힘이 없어서 잃는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신의 노예가 되든 뭐가 되든 상관없었다. 지금 저 괴물을 찢어발길 수만 있다면.
"받아들이겠어……! 힘을 줘!"
은우의 외침과 함께, 깨진 영패의 파편들이 은우의 손으로 날아와 하나의 거대한 빛의 검, 백호참마검(白虎斬魔劍)의 형상으로 화했다. 은우의 가슴에 있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며, 폭발적인 영력이 전신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이 기운은 대체 뭐냐!"
악귀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은우는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소년의 움직임은 한 마리의 맹수와도 같았다. 순백의 뇌전이 검신을 타고 휘몰아쳤다.
"내 집에서, 내 가족에게서 꺼져라."
스릉!
은우가 허공을 가르며 검을 내리쳤다. 거대한 백호의 포효가 도심의 밤을 뒤흔들었고, 순백의 검기가 악귀의 거대한 몸통을 그대로 양단했다.
"아아아악!"
악귀는 비명조치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은우의 신성한 영기에 닿아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검은 연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거실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은우는 검을 거두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신을 감싸던 영기가 서서히 잦아들자, 맹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은우는 서둘러 쓰러진 할머니에게 기어갔다. 할머니는 힘겹게 숨을 쉬며 은우의 뺨을 어루만졌다.
"은우야…… 네가 결국…… 신을 불렀구나……."
"할머니, 말하지 마세요. 정신 차리세요!"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거대한 어둠이 이 도시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어. 혼자서는 안 된다. 너와 뜻을 함께할 동료들을 찾아라……."
할머니는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할머니의 어깨를 짓누르던 검은 사기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온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 할머니!"
은우는 차갑게 식어가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오열했다. 창밖으로 새벽여명이 붉게 떠오르고 있었다. 평범한 삶을 원했던 소년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졌고, 귀신을 부리고 다스리는 '만신의 영도자'로서의 가혹한 운명이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