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당한 김에 자수성가합니다

3화: 첫 번째 배합
해가 회색 골목의 간판 위로 올라올 무렵 레오나는 작업대에 금화 여덟 닢을 한 줄로 늘어놓았다.
전날까지는 그저 남은 돈이었다. 오늘부터는 원료가 되고 도구가 되고 손님을 불러올 증거가 되어야 할 돈이었다.
레오나는 장부의 첫 장을 폈다. 왼쪽에는 가진 것. 오른쪽에는 반드시 나갈 것.
원료 넉 닢. 칸막이와 선반 한 닢 반. 작은 유리병과 종이 봉투 한 닢. 남는 돈은 한 닢 반.
"금화 한 닢 반으로요?"
바닥을 닦던 마르타가 장부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실패를 싸게 해야죠."
보름 안에 에다에게 돌려줄 금화 여섯 닢도 따로 적었다. 그 숫자를 종이 가장자리로 밀어 두지 않았다. 갚아야 할 돈을 안 보이는 곳에 두는 순간 빚은 계획이 아니라 공포가 된다.
"마르타는 가게에 남아서 오븐 쪽 바닥을 닦아 주세요. 저는 남문에 다녀오겠습니다."
"혼자 가셔도 괜찮겠어요?"
"괜찮아야 합니다. 오늘부터는 제가 이 가게의 원료 담당이니까요."
남문 약초상 칼덴의 가게는 문을 열자마자 씁쓸한 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말린 꽃다발과 기름병이 천장 가까이까지 차 있었고 손님보다 물건이 더 많은 듯했다.
카운터 안쪽의 남자가 에다의 쪽지를 읽더니 레오나를 훑었다.
"에다가 보냈다고? 그 노파가 별일이군. 뭘 찾소?"
"장미수와 흰 달맞이꽃 오일. 정화 마석 가루는 한 꼬집만요. 설탕과 달걀은 시장에서 따로 살 겁니다."
"한 꼬집? 그걸로 뭘 만들겠다는 거요?"
칼덴은 웃으며 선반에서 푸른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이 오일이면 금화 둘. 귀족 아가씨 피부에도 아깝지 않은 물건이오."
레오나는 병을 받지 않았다. 병목 주변에 남은 기름막과 유리 안쪽의 흐린 빛을 먼저 살폈다.
보이지 않는 실들이 손끝으로 흘러들었다. 오일의 기름진 결 사이에 약한 산패 냄새가 묻어 있었다. 한 번 강한 햇볕을 먹은 기름이었다. 바르면 당장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크림의 향과 질감을 오래 붙잡아 주지 못한다.
"창가에 두셨군요. 빛을 오래 본 오일입니다. 기름막이 눅진하고 향이 밑에서 꺾였어요. 금화 둘을 받을 물건은 아니네요."
"아가씨가 약초상이라도 되나?"
"아직은 가게 주인입니다. 가게 주인은 제 돈이 새는 곳을 찾을 줄 알아야 하죠."
레오나는 뒤편의 불투명한 갈색 병 세 개를 가리켰다.
"저쪽 병은 빛을 덜 봤습니다. 가장 작은 병으로 주세요."
칼덴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지못해 갈색 병을 꺼냈다. 레오나가 병을 열어 향을 확인하자 꽃잎을 짓이긴 듯한 맑은 기운이 손끝에 번졌다.
"그 병도 금화 둘이오."
"장미수와 함께 사면 금화 한 닢 반. 이 병은 선반을 닦는 데 쓰겠습니다."
칼덴은 코웃음을 쳤지만 결국 값을 낮췄다. 레오나는 장미수와 마석 가루를 필요한 만큼만 재어 받았다. 마석 가루를 한 숟갈 더 얹으려는 손은 즉시 막았다.
"정화 마력은 많이 넣을수록 좋은 게 아닙니다. 크림은 피부 위에 머무는 물건이에요. 자기 존재를 과시하면 안 되죠."
목수 잭은 골목 어귀에서 부러진 의자를 고치고 있었다. 레오나가 점포 구조를 설명하자 그는 팔짱을 꼈다.
"그 좁은 데에 칸막이는 왜 세워? 장사하려면 물건부터 많이 놓아야지."
"상업 연합은 과자와 향유를 한곳에서 다룬다는 이유로 영업권을 취소할 수 있어요. 검사관이 트집 잡지 못할 구조가 먼저입니다."
레오나는 바닥에 나뭇가지로 선을 그었다. 오븐 옆은 반죽과 포장만. 세척대 안쪽은 크림과 표본만. 두 구역 사이에는 얇은 칸막이와 서로 다른 색 천을 걸었다.
"폐목재 조각으로 만들어 주세요. 창가에는 봉인 과자만 놓을 선반도요."
잭은 선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은화 세 닢. 오늘 해 지기 전까지."
"은화 둘과 변질 오일 한 병. 광택 내는 데 쓸 수 있어요."
잭은 오일병을 흔들어 보았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흥정은 잘하는군."
"계약서 읽는 데 비하면 쉬운 편이에요."
점포에 돌아오자 마르타는 오븐과 세척대의 도구를 빨간 천과 흰 천으로 나누어 놓았다.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관에게는 이 구분도 규칙을 지키겠다는 약속이었다.
잭이 가져온 칸막이가 세워질 때까지 레오나는 크림 배합을 시작했다. 작은 냄비 아래에는 가장 약한 불만 남겼다. 장미수를 데운 뒤 달맞이꽃 오일을 천천히 흘려 넣고 나무 주걱을 일정한 속도로 돌렸다.
마르타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옆에 섰다.
"정화 마석 가루는 지금 넣나요?"
"지금은 아니에요. 기름과 물이 먼저 한편이 되어야 합니다."
레오나는 첫 배합에 마석 가루를 아주 조금 넣었다. 은빛 가루가 녹자 냄비 안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났다.
냄비 가장자리에 맑은 장미수가 고였고 중앙에는 덩어리진 기름이 떠올랐다. 마르타가 다급하게 레오나를 보았다.
"손대지 마세요."
레오나는 냄비를 내려놓고 분리된 액체를 바라보았다. 아까 칼덴이 권한 마석 가루가 아니었다면 더 크게 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장미수와 오일 일부는 되돌릴 수 없었다.
그녀는 장부에 적었다. 첫 배합. 마석 가루 과다. 유화 실패.
"버리시는 거예요?"
"아니요. 손상된 목재를 닦는 데 쓰면 됩니다. 실패도 용도가 있으면 손실이 줄어요."
레오나는 정화 마력의 결이 물과 기름 사이를 밀어내고 있음을 읽었다.
필요한 건 더 많은 힘이 아니었다. 낮은 온도와 오일이 자리를 잡을 시간이었다.
두 번째 냄비에는 장미수를 절반만 썼다. 레오나는 오일을 가느다란 실처럼 넣으며 손목을 쉬지 않고 돌렸다. 표면이 우윳빛으로 흐려진 뒤에야 마석 가루를 손톱 끝만큼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빛이 번쩍이지 않았다. 대신 크림 안쪽으로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레오나는 한참 뒤 주걱을 들어 올렸다. 흰 제형이 끊기지 않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손등에 쌀알만큼 바르자 건조하게 들뜨던 피부가 금세 차분해졌다. 기름막만 남는 느낌이 아니라 수분이 피부 안으로 스미는 감각이었다.
마르타도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조금만 써 봐도 될까요?"
"손목 안쪽에요. 이상하면 바로 씻고요."
마르타는 바른 자리를 내려다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향이 거의 없는데 손이 편해요."
"향보다 먼저 기억나야 하는 건 느낌이에요. 향이 강하면 한 번은 놀라지만 두 번은 망설이거든요."
작은 유리병 세 개에 크림을 나누어 담았다. 마르타는 천으로 병목을 닦고 뚜껑을 하나씩 잠갔다. 레오나는 종이를 잘라 병마다 번호를 붙였다.
표본 1호. 사용일. 사용 부위. 반응 기록.
"이렇게까지 적어야 해요?"
"표본은 누가 다시 사려는지 알아보는 조사예요."
오후가 되자 칸막이가 도착했다. 잭은 말한 대로 얇은 나무판과 작은 선반을 세웠다. 레오나와 마르타는 손을 씻은 뒤 오븐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봉인해 팔 수 있는 과자 차례였다.
현지의 견과 가루는 아몬드 가루보다 입자가 거칠었다. 레오나는 고운 체로 세 번을 걸렀지만 첫 반죽은 오븐 안에서 잔뜩 갈라졌다. 표면은 울퉁불퉁했고 가장자리는 거칠었다.
마르타가 식힌 과자를 맛보았다.
"맛은 달고 고소해요."
"그래도 팔 수는 없습니다."
거친 가루가 수분을 너무 빨리 빼앗았다. 레오나는 남은 가루를 다시 곱게 갈고 표면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왜 안 넣으세요?"
"기다리는 것도 공정이에요."
낮은 불의 오븐 안에서 둥근 과자가 갈라지지 않은 표면을 드러냈다.
레오나는 장미수에 설탕을 녹여 만든 묽은 잼을 가운데 넣었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과자 두 장을 포개자 작은 보석 상자처럼 보이는 과자가 완성됐다.
마르타가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껍질이 먼저 부서지고 안쪽의 부드러운 결이 따라왔다.
"입에서 사라져요."
"마카롱이에요. 다음 맛을 궁금하게 만드는 과자죠."
두 사람은 종이 봉투에 마카롱 두 개씩을 넣었다. 봉투 입구는 밀랍으로 단단히 봉했다. 레오나는 낡은 천 조각을 잘라 작은 도장을 만들고 밀랍 위에 눌렀다.
르네상스.
새로 태어난다는 뜻의 이름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적혔다.
오늘의 작은 사치.
"이게 간판보다 먼저 생겼네요."
마르타가 봉투를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간판은 보라고 거는 거예요. 이건 기억하라고 주는 거죠."
해가 기울 무렵 물통을 든 세탁부가 골목을 지나갔다. 젖은 천을 오래 주무른 듯 손등은 희고 갈라져 있었다.
레오나는 유리병 하나와 작은 기록지를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잠시만요. 손등이 많이 트셨네요."
세탁부는 경계 어린 눈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약 파는 거면 돈 없소."
"약이 아니라 표본입니다. 돈은 받지 않아요. 대신 내일 이 시간에 손이 어떤지 알려 주세요."
"왜 공짜로 줘?"
"제가 만든 물건이 정말 필요한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마음에 안 들면 없던 일로 하셔도 됩니다. 대신 좋다면 솔직하게 적어 주세요."
세탁부는 한참 망설이다 병을 받았다.
"리네야."
"르네상스의 레오나입니다."
리네는 크림을 아주 조금 덜어 손등에 발랐다. 처음에는 기름을 경계하듯 손을 폈다 접었다. 잠시 뒤 갈라진 자리를 살피던 얼굴이 누그러졌다.
"끈적이지 않네. 향도 세지 않고."
"오늘 밤에 한 번 더 바르고 내일 말씀해 주세요."
마르타가 뒤에서 봉인한 과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내일부터 팔 거예요. 오늘은 맛만 봐 주세요."
리네는 봉인을 뜯고 마카롱을 입에 넣었다. 바삭한 소리가 작게 났다. 그녀는 남은 반쪽을 물통 위에 올려 두었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이런 과자는 상층 부인들만 먹는 줄 알았는데."
"내일부터는 이 골목에서도 살 수 있어요."
"그럼 세탁소 애들한테 말해 둘게. 상층 하녀들이 드레스 맡기러 매일 이 길을 지나가니까."
리네가 떠난 뒤 레오나는 장부의 첫 고객 후보 칸에 이름을 적었다. 표본 1호. 리네. 세탁 노동으로 인한 손등 건조. 내일 반응 확인.
마르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그분들이 손님이 될까요?"
"리네 씨가 손님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추천이 될 수도 있어요. 어느 쪽이든 오늘은 우리가 얻은 첫 데이터입니다."
그때 문틈으로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상업 연합의 붉은 인장이 찍힌 통지였다.
레오나는 봉인을 뜯었다.
조건부 시범 영업 점포 르네상스. 내일 아침 위생 검사 실시.
마르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열흘이나 준다고 했잖아요."
"열흘은 준비할 수 있는 기한이지 검사를 늦춰 준다는 약속은 아니었어요."
레오나는 통지를 접어 장부 위에 올렸다. 오븐 도구 재세척. 크림 병 마개 확인. 바닥과 세척대 물기 제거. 재료 입고 기록 정리.
"마르타. 빨간 천이 묶인 도구부터 다시 삶아 주세요. 저는 장부를 정리할게요."
"오늘 밤을 새워야 할까요?"
레오나는 창가 선반 위의 밀랍 봉투를 바라보았다.
"아뇨. 내일 검사관이 봐야 할 건 지친 사람이 아니라 준비된 가게예요. 필요한 것만 끝내고 쉬겠습니다."
그녀는 장부의 빈칸에 또렷하게 적었다.
르네상스. 첫 위생 검사.
첫 매출을 올리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레오나는 이미 문을 열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