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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당한 김에 자수성가합니다1화

파혼당한 김에 자수성가합니다

파혼당한 김에 자수성가합니다

시놉시스

황태자에게 파혼당하고 가문에서 쫓겨난 악녀 레오나 벨아미. 그러나 그녀 안에서 깨어난 현대 뷰티 마케터의 기억은 굴욕을 사업 기회로 바꾼다. 디저트와 화장품이 아직 투박한 크로체 제국에서 레오나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세워 황실도 가문도 건드릴 수 없는 자리에 오르려 한다.

1화: 파혼당한 영애

장미홀의 샹들리에가 일제히 빛을 키우는 순간 레오나 벨아미는 자신이 끝장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그녀를 끝장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레오나 벨아미."

황태자 카시안 데 크로체가 홀 중앙에 섰다. 금빛 머리와 푸른 눈은 축복받은 왕자라는 소문 그대로였지만 입매에는 차가운 경멸이 걸려 있었다.

그의 곁에는 흰 드레스를 입은 성녀 이벨린이 있었다. 이벨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떨리는 속눈썹과 물기 어린 눈빛만으로 이미 연회장의 동정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너와의 약혼을 파기하겠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홀 곳곳에서 번졌다.

레오나는 손끝이 차갑게 굳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아팠고 낯선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카시안. 성녀. 공개 파혼. 벨아미 백작가의 제명.

이 장면을 안다.

퇴근길 침대에 누워 읽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첫 파멸 장면이었다. 황태자의 약혼녀였던 악녀 레오나 벨아미는 성녀를 질투했다는 누명을 쓰고 파혼당한다. 그 뒤 가문에서 쫓겨나 빈민가를 떠돌다 독이 든 빵을 받아 든다.

그 악녀가 지금 자신이었다.

"너는 성녀를 모욕하고 황실의 이름을 이용해 사치를 일삼았다. 황태자비가 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고결함이다. 너에게는 그 자격이 없다."

레오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고결함. 참 편리한 단어였다. 황실 연회비를 벨아미 가문의 돈으로 메웠을 때는 아무도 고결함을 찾지 않았다. 카시안이 새 사냥터를 조성하겠다며 레오나의 혼수 예산을 당겨 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가 이벨린에게 후원 명단을 공개하라고 요구한 순간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전하."

레오나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카시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레오나가 울거나 매달리리라 예상한 듯했다.

"변명은 듣지 않겠다."

"변명할 생각 없습니다. 대신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레오나는 왼손의 약혼반지를 천천히 뺐다. 거대한 루비가 샹들리에 빛을 받아 피처럼 번뜩였다.

"파혼 귀책은 전하께 있습니까?"

연회장의 공기가 한순간 멎었다.

카시안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지금 네 죄를 듣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죄라면 증거가 있어야지요. 성녀님을 모욕했다는 증언은 성녀님 수행 사제 셋뿐입니다. 황실 예산을 사적으로 썼다는 말씀도 이상합니다. 제 장부에는 황실 행사 보조금으로 나간 금액만 남아 있거든요."

그녀는 카시안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물론 전하께서 이 자리에서 저를 버리시겠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황태자가 공식 약혼을 일방 파기했다는 사실은 귀족 여러분이 들으셨습니다."

귀족들의 부채가 동시에 멈췄다.

카시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히 나를 협박하나?"

"아닙니다. 거래를 정리하는 겁니다."

레오나는 루비 반지를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약혼반지는 돌려드리지요. 대신 파혼 문서에는 전하의 일방 파기라고 적어 주십시오. 제 혼수로 황실에 선지급된 보석과 금화는 열흘 안에 반환해 주시고요."

이벨린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레오나 님. 이런 자리에서 돈 이야기를 하시는 건..."

"성녀님."

레오나는 고개만 돌려 이벨린을 보았다.

"기도원에 들어온 기부금 명단을 제가 확인하자고 했을 때도 같은 표정을 지으셨지요. 돈 이야기가 부끄러운 건 돈이 흐르는 방향을 숨기고 싶을 때뿐입니다."

이벨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홀 안에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레오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소문은 귀족 사회의 혈관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가 완전히 짓밟히면 그 소문은 독이 된다. 하지만 카시안의 귀책과 이벨린의 불편한 침묵이 함께 퍼진다면 독은 희석된다.

죽지 않으려면 감정이 아니라 숫자를 붙잡아야 했다.

"서기관을 부르십시오."

레오나가 말했다.

"이 장미홀의 문장이 찍힌 증인 명부도 함께요. 전하께서 말씀하신 파혼이 제 망상이라는 말이 나중에 나오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카시안은 분노로 턱을 굳혔다. 그러나 귀족들이 보고 있었다. 황태자가 방금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에는 장미홀의 샹들리에가 너무 밝았다.

잠시 뒤 황실 서기관이 떨리는 손으로 간이 문서를 가져왔다. 카시안은 서명란에 거칠게 이름을 적었다.

레오나는 문장과 문구를 확인한 뒤에야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수익률 좋은 결별이 될 것 같군요."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웃음을 참는 소리였다.

카시안은 모욕감에 얼굴을 굳혔고 레오나는 더 머물지 않았다.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이 칼날처럼 따가웠지만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황궁 밖으로 나왔을 때 밤공기는 차고 달았다. 말 냄새와 젖은 흙냄새 사이로 장미 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향 속에서 이상한 감각이 열렸다.

장미수. 당분. 낮은 정화 마력. 보존력은 약하지만 피부 열감을 가라앉히는 성질.

레오나는 멈춰 섰다.

방금 무엇을 느낀 거지?

시녀 마르타가 망토를 들고 달려왔다. 그녀는 레오나의 전속 시녀였으나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아가씨. 백작님께서 즉시 귀가하라 하셨습니다."

"짐을 싸라는 뜻이겠지요."

마르타는 대답하지 못했다.

예상대로 벨아미 저택의 현관은 밝게 켜져 있었다. 백작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이미 인장이 찍힌 문서가 들려 있었다.

"가문의 수치가 되었구나."

레오나는 젖은 장갑을 벗으며 물었다.

"황실에서 보낸 사람보다 아버지가 빠르시네요."

"입을 조심해라. 네 경솔함 때문에 벨아미는 황실과의 관계를 잃었다."

"제 혼수와 후원금으로 유지하던 관계 말씀이십니까?"

백작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오늘부로 너를 벨아미 가문에서 제명한다. 네 방의 보석과 드레스는 가문 재산이니 손댈 생각 말거라. 새벽 전에 나가라."

원래의 레오나는 여기서 무너졌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매달리고 카시안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러다 모든 통로가 막힌 뒤 독이 든 빵을 받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레오나는 알고 있었다.

버림받은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사랑을 증명하려는 충동이었다. 사업도 인생도 손절 시점을 놓치면 파산한다.

"좋습니다. 제명 문서에 제 개인 채무와 가문 채무가 분리된다는 조항을 넣어 주세요."

"뭐라?"

"저를 가문에서 내보내신다면 제 이름으로 들어온 채권과 현금도 제가 가져갑니다. 대신 벨아미 가문의 기존 부채는 저와 무관하다고 명시해 주세요."

백작은 허를 찔린 얼굴이었다.

레오나는 계단 옆 작은 탁자에서 펜을 집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아버지께 유리한 선택입니다. 저 같은 수치를 빨리 끊어 내고 싶으시잖아요."

백작은 한참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현관에는 사용인들이 있었다. 장미홀의 소문이 도착하기 전에 제명 문서를 끝내고 싶은 사람은 백작 쪽이었다.

그는 이를 갈며 문서에 조항을 추가했다.

레오나는 서명을 확인한 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허락된 시간은 한 시간. 드레스와 큰 보석은 두고 가야 했다. 하지만 서랍 깊숙한 곳의 금화 스무 닢과 어머니가 남긴 작은 진주 귀걸이 한 쌍은 개인 소유였다.

화장대 위에는 반쯤 마른 향유 병이 있었다. 레오나가 손끝으로 병목을 만지자 다시 감각이 일었다.

라벤더. 흰 달맞이꽃 오일. 정화 마석 가루가 아주 조금. 배합이 거칠어 피부에 남는 막이 무겁다. 물과 기름을 잇는 매개가 부족하다.

이번에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몸에는 원료의 성질을 읽는 힘이 있었다. 현대에서 화장품 성분표를 붙들고 살던 기억과 합쳐지자 머릿속에 수식처럼 배합이 떠올랐다.

가벼운 수분 크림. 향이 진하지 않은 립밤. 귀족 영애들이 몰래 사 갈 달콤한 디저트.

레오나의 입가가 올라갔다.

"황태자비는 못 됐지만 대표는 될 수 있겠네."

마르타가 문가에서 울먹였다.

"아가씨.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지는 않아요."

레오나는 금화 주머니를 묶었다.

"하지만 괜찮아질 방법은 압니다."

새벽 종이 울리기 전 레오나는 벨아미 저택을 나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평생이라고 믿었던 울타리가 무너졌는데 마음 한구석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수도의 중심가를 지나 하층 상점가로 내려갈수록 길은 좁아졌다. 빵 굽는 냄새와 하수 냄새가 뒤섞였고 새벽 장사꾼들이 수레를 밀고 지나갔다.

레오나는 후드를 눌러쓰고 빈 점포들을 살폈다.

궁정 주변의 가게는 보증금이 터무니없었다. 귀족 거리의 작은 매대도 금화 스무 닢으로는 어림없었다. 그러나 하층과 중층이 맞닿는 회색 골목에는 오래 비어 있는 가게가 있었다.

먼지 낀 창문. 낡은 간판. 안쪽에 남은 벽돌 오븐과 물길이 연결된 작은 세척대.

디저트와 화장품을 같이 만들 수 있는 최소 조건이었다.

문에는 임대 공고가 붙어 있었다.

상업 연합 승인 필요. 보증금 금화 열다섯 닢. 월세 금화 세 닢. 시설 보수 임차인 부담.

레오나는 주머니 속 금화를 세었다. 남는 돈은 다섯 닢. 원료비와 허가 수수료를 생각하면 빠듯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상업 연합 승인이라는 글자는 거슬렸다. 그래도 문을 열기 전부터 장벽이 보인다는 건 나쁘지 않았다. 보이는 장벽은 계산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공고 끝을 잡고 천천히 떼어 냈다.

카시안은 그녀가 사라지면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벨아미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레오나가 자신들의 이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었다.

레오나는 먼지 낀 유리에 비친 자신의 금안을 보았다.

"거절해 줘서 고맙습니다. 전 약혼자님."

그녀는 접힌 공고를 품 안에 넣었다.

"덕분에 제 사업 시작일이 오늘이 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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