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 던전이 열렸다

7화: 복도 끝의 방송실
매점 벽의 안내판에 떠오른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중앙 통제 구역]
[방송실]
김한결은 글자보다 셔터를 먼저 봤다.
발톱 괴물의 소리는 복도 저편으로 멀어져 있었다. 그래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벽 너머에서 어딘가를 천천히 긁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쓴향 유인 파우치가 놈을 붙들고 있는 시간은 아무도 몰랐다.
수진이 찢어진 과자 박스 뒷면의 배식표를 내려다봤다.
부상.
탈진.
방어.
대기.
"방송실로 갈 사람만 정하자."
매점 안이 조용해졌다.
"여기 사람이 더 빠지면 안 돼. 셔터도 창고문도 지킬 사람이 필요해."
박태식이 진열대에서 등을 뗐다. 손바닥의 피는 굳었지만 눈빛은 아직 날카로웠다.
"그럼 누가 가는데? 방송만 하면 끝이야?"
"끝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그래도 밖에 있는 애들이 뛰어다니는 건 막을 수 있어. 다들 매점으로 몰려들면 여기도 끝이고."
말을 듣던 학생 몇 명이 서로를 봤다. 매점에 들어오지 못한 친구가 떠오른 얼굴들이었다.
독사가 셔터 앞에 세워 둔 진열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나는 남는다. 방어조 교대도 아직 익숙하지 않다."
오순덕 아주머니도 창고문 쪽을 가리켰다.
"나는 여기 물건 위치를 알아. 창고문 쪽에서 또 소리 나면 네들보다 내가 먼저 알아차려."
"선생님이랑 아주머니가 남고요."
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적힌 사람은 빠지지 마. 방어조는 태식이 대신 준호가 들어가. 탈진한 사람은 자리에 앉아 있어. 방송실 이동조는 다섯이면 돼."
"다섯?"
민수가 제 가방끈을 쥐었다.
"한결이랑 수진이, 태식이. 나도 갈게."
한아름이 한결의 피 묻은 소매를 잡았다.
"나도."
"아름아."
"여기 남아도 계속 문 쪽만 볼 거야. 그럴 바엔 같이 움직일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하지만 손끝은 놓이지 않았다.
한결은 반대할 말을 찾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은 겁을 먹고도 사람들 사이의 숨을 맞춰 왔다. 지금 필요한 건 힘만 센 사람이 아니었다.
수진은 종이 위에 다섯 이름 대신 이동이라고 적었다.
"한결, 나, 태식, 아름, 민수. 돌아오기 전까지 배식 기준 바꾸지 마."
박태식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앞에 서는 건 적어. 나중에 또 없던 일 하지 말고."
"방어조 몫은 이미 적혔어."
수진이 배식표를 들어 보였다.
"네가 앞에 서든 안 서든 기준은 같아."
박태식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셔터 틈을 바라봤다. 안쪽에 있으면 누구라도 그 금속판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한결은 매점 계산대 아래에서 건전지 묶음 하나와 박스테이프를 챙겼다. 물건을 손에 올리자 시야에 작은 창이 떠올랐다.
[조합 제작 후보]
[건전지 묶음 + 박스테이프]
[결과: 비상 송출 연결선]
[제작 비용: 30포인트]
방송실 장비가 멀쩡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전원이 끊겨 있다면 이게 필요할 수 있다.
한결은 제작 창을 닫았다.
포인트는 한 번 빠지면 돌아오지 않는다. 방송실 문을 보기 전까지는 아껴야 했다.
"문 열면 바로 나가."
독사가 낮게 말했다.
"계단까지 뛰지 마. 문 닫히는 소리도 조심하고."
한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순덕 아주머니가 그의 손목을 잠깐 붙잡았다.
"방송하고 바로 와. 매점은 내가 지킬 테니까."
평소 매점에서 들었으면 간식 하나 더 챙겨 주겠다는 말처럼 들렸을 목소리였다. 한결은 대답 대신 손을 한 번 꽉 쥐었다.
셔터가 허리 높이까지 들렸다.
다섯 명은 한 사람씩 바닥에 손을 짚고 복도로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나온 태식이 안쪽을 향해 손짓했다. 독사가 셔터를 다시 내렸다.
금속이 바닥에 닿기 직전, 한결은 매점 안의 학생들이 벽에 붙어 숨을 죽인 모습을 봤다.
그 문이 다시 열릴 때까지 버텨야 했다.
복도는 이상할 만큼 어두웠다. 비상등은 켜져 있었지만 붉은 빛이 바닥에 고인 물처럼 번졌다.
체육관 쪽 복도에는 고블린 셋이 흩어져 있었다. 한 마리는 교실 문틈에 코를 들이밀고 있었다. 다른 둘은 바닥의 찢어진 책가방을 뒤집고 있었다.
태식이 주먹을 쥐었다.
"셋이면 그냥 치우고 가자."
"안 돼."
한결이 바로 말했다.
"소리 나면 셔터 쪽 놈도 돌아와."
"그 놈이 여기까지 왔는지는 어떻게 알아?"
"모르니까 싸우지 말자는 거야."
민수가 복도 끝에 널린 쓰레기통을 봤다. 바닥에는 찌그러진 빈 캔 하나가 굴러다녔다.
"저걸로 돌릴 수는 있어."
수진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멀리 굴리면 다른 게 올 수도 있어. 계단 문까지만 비우자."
민수는 캔을 집어 들고 허리를 낮췄다. 한결은 반대쪽 벽에 바짝 붙었다. 아름은 뒤에서 수진의 가방이 벽에 스치지 않게 잡아 주고 있었다.
민수가 손가락을 튕겼다.
캔은 바닥을 따라 천천히 굴러갔다.
짤랑.
작은 소리였다. 그런데 텅 빈 복도에서는 종소리처럼 컸다.
고블린 둘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민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캔이 체육관 쪽 모퉁이에 멈추자 고블린들이 그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남은 한 마리가 계단 문 방향을 봤다.
태식이 한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지금."
다섯 명이 계단 문까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수진이 문고리를 잡아 천천히 눌렀다. 경첩이 아주 작게 울었다.
고블린의 귀가 움찔했다.
태식이 문틈으로 먼저 들어가 문을 받쳤다. 한결과 수진, 아름이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민수가 마지막에 몸을 넣으려는 순간 고블린 하나가 돌아섰다.
검은 눈이 민수를 향했다.
민수의 발이 멈췄다.
한결은 문을 닫을 수도 없었다. 민수를 버리면 고블린이 소리를 낼 가능성이 컸다.
아름이 민수의 가방끈을 잡아 안쪽으로 당겼다.
태식은 문을 밀지 않았다. 고블린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문틈으로 뻗었다.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톡. 톡.
고블린이 소리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사이 민수가 계단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태식이 문을 닫았다. 발톱이 문 아래를 긁었지만 손잡이는 돌지 않았다.
모두가 계단 벽에 등을 붙였다.
민수가 숨을 몰아쉬려 하자 아름이 손등으로 제 입을 가리켰다. 민수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만 끄덕였다.
한결은 계단을 올랐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참의 안내판에는 기존 층수 표시 위로 검은 글자가 겹쳐 있었다.
[중앙 통제 구역]
[직진]
던전은 길을 가르쳐 줬다. 하지만 친절하게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2층 방송실 앞에는 철문이 있었다. 유리창은 안쪽에서 검은 종이로 가려져 있었고 문 아래로는 희미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문 앞에는 고블린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고블린은 철문 아래 틈을 긁다가 고개를 들어 공기를 킁킁거렸다. 바로 옆에 있는 다섯 사람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수진이 입술만 움직였다.
피할 수 없어.
한결은 간이 절단창을 들어 보였다. 고블린을 한 번에 끝내지 못하면 비명을 지를 것이다. 그러면 아래층의 놈들까지 올라올 수 있다.
태식이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잡을게.
한결은 망설였다. 태식의 팔 힘은 확실했다. 문제는 힘을 쓸 때마다 주변까지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름이 태식 뒤로 조용히 움직였다. 손에는 계단참에서 주운 낡은 체육복 가방이 들려 있었다.
민수는 반대쪽 벽에 붙어 고개를 끄덕였다.
태식이 한 번에 거리를 좁혔다.
고블린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이어 몸을 철문에 붙였다. 고블린의 손톱이 태식 팔을 긁었다. 태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목소리가 아니라 입모양이었다.
한결은 절단창 끝을 고블린의 목 아래로 밀어 넣었다.
푹.
고블린의 몸이 세차게 튀었다. 아름이 가방을 덮어 발이 철문을 차지 못하게 막았다. 민수가 고블린의 다리를 붙들었다.
몇 초 뒤,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고블린 처치]
[던전 코인 5 획득]
태식은 팔을 내려다봤다. 얕은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물 한 모금 더 받을 이유는 생겼네."
"기록할게."
수진이 속삭였다.
태식은 피식 웃었다.
"끝까지 적네."
"그래야 다음에도 네가 받을 수 있으니까."
철문 손잡이에 한결이 손을 댔다.
차가운 금속 위로 검은 창이 떠올랐다.
[중앙 통제 구역]
[방송 설비 미가동]
[외부 전원 또는 임시 연결 필요]
한결은 가방에서 건전지 묶음과 박스테이프를 꺼냈다.
이제는 아낄 이유가 없었다.
[조합 제작 후보]
[건전지 묶음 + 박스테이프]
[결과: 비상 송출 연결선]
[제작 비용: 30포인트]
"제작."
건전지와 테이프가 손안에서 풀렸다. 빛이 꺼진 뒤 얇은 검은 선 하나가 남았다. 양끝에는 작은 금속 단자가 달려 있었다.
[비상 송출 연결선]
[효과: 시설 전원을 짧은 시간 임시 연결합니다.]
[유지 시간: 3분]
철문 안쪽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먼지 냄새와 오래된 전자기기 냄새가 섞여 나왔다. 방송실 안에는 콘솔과 마이크, 벽면 스피커들이 있었다.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지만 중앙 콘솔 한쪽에 작은 단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수진과 민수가 문을 닫고 교사용 책상으로 걸쇠를 만들었다. 태식은 문 옆에 서서 복도를 노려봤다. 아름은 고블린 피가 묻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결 곁으로 왔다.
"할 수 있어?"
"해 봐야지."
한결은 연결선을 단자에 꽂았다.
지직.
콘솔의 불빛이 하나씩 켜졌다. 천장 스피커에서 짧은 잡음이 흘렀다.
[중앙 통제 구역 임시 활성화]
[송출 가능 시간: 02:59]
수진이 마이크 앞에 섰다.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한결은 그 손이 배식표를 쥐었을 때보다 더 희게 질린 걸 봤다.
"내가 말할게."
"길게 하지 마."
한결이 말했다.
"매점 위치도 말하지 말고."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의 빨간 불이 켜졌다.
"세화고 학생들과 선생님들. 듣고 있으면 움직이지 말고 들어."
스피커를 타고 수진의 목소리가 학교 어딘가로 퍼져 나갔다.
"복도에서 뛰지 마. 소리를 크게 내지 말고 가까운 교실 문을 책상이나 의자로 막아. 혼자 복도로 나오지 말고 부상자와 같이 있어."
한결이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먹을 것과 물이 있어도 한 번에 다 쓰지 마세요. 부상자와 못 움직이는 사람부터 나누세요. 괴물은 소리와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 같아요."
그는 숨을 골랐다.
"도움을 찾으려고 무작정 같은 곳으로 모이지 마세요. 가까운 곳에서 기다려요. 소리를 줄이세요."
매점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매점으로 가는 길도 같이 열릴 것 같았다. 그곳에는 아직 방어조가 있고 물과 식량이 있다. 동시에 셔터 하나와 불안한 창고문밖에 없다.
수진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듣고 있다면 창문 쪽에 불빛을 세 번만 보여 줘. 멀리서 보이면 위치를 확인할 수 있어. 반복할게. 뛰지 말고 소리 내지 말고 문을 막고 기다려."
콘솔 위에 떠 있던 시간이 빠르게 줄었다.
02:11.
01:46.
한결은 마이크 불빛이 꺼질 때까지 수진의 옆에 섰다. 학교 전체가 그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디선가 누군가가 스피커를 올려다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00:03을 가리켰다.
연결선 끝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콘솔의 불빛이 모두 꺼졌다.
[송출 종료]
[교내 생존 신호 감지]
[미확인 신호: 17]
아름이 마른 숨을 삼켰다.
"열일곱 명."
민수가 화면을 들여다봤다.
"우리 말 들었을까?"
한결도 대답하지 못했다. 신호는 이름도 위치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학교 안 어딘가에 아직 버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 남겼다.
그때 태식이 손을 들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복도 바깥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쿵.
방송실 철문이 안쪽으로 울렸다.
책상으로 만든 걸쇠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민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고블린은 저렇게 안 해."
한결은 절단창을 쥐었다.
철문 아래 틈으로 검은 발톱 끝이 천천히 들어왔다.
발톱은 멈추지 않았다.
금속 바닥을 긁으며 방송실 안의 냄새를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