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하면 성녀님이 피를 토하십니다

시놉시스
대한민국 경찰청 소속 천재 프로파일러 한세아. 연쇄살인범의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한 순간, 그녀는 제국의 성녀 '릴리아'의 몸에서 깨어난다. 타인의 거짓말을 들으면 피를 토하는 '진실의 저주'를 앓는 성녀. 하지만 세아는 깨닫는다. 이 고통이 사라진 릴리아의 기억과 은폐된 연쇄 살인의 진실을 가리키는 유일한 지표라는 것을. "내 앞에서 거짓말하지 마. 내 몸이 아픈 건 참겠는데, 내 머리는 속일 수 없으니까." 성녀의 거룩한 로브 아래, 세아는 현대의 수사 기법과 피 냄새 나는 진실 감지 능력을 숨긴 채 제국을 뒤흔드는 거대한 음모의 추적을 시작한다.
1화: 진실의 저주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비릿하고 눅눅한 피 냄새였다.
차갑고 딱딱한 아스팔트의 질감,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지던 사이렌 소리, 그리고 왼쪽 가슴을 관통한 칼날의 서늘한 감각. 그 모든 것이 한세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대한민국 경찰청 소속, 경감 한세아. 연쇄살인범과의 치열한 대치 끝에 맞이한, 프로파일러다운 냉혹하고도 선명한 최후였다.
쏟아지는 빗물 사이로 자신의 피가 씻겨 내려가는 것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인간의 어둠을 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고.
그런데.
‘......여긴 어디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회색빛 서울의 하늘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높고 화려한 천장, 금박으로 수놓아진 섬세한 문양들이 눈이 시릴 만큼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코끝에는 비릿한 피 냄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은은하고도 묵직한 침향 냄새가 맴돌았다.
무엇보다 몸 아래 느껴지는 감각이 기괴했다. 평생을 딱딱한 현장과 차가운 사무실에서 보낸 그녀에게, 이 지나치게 푹신하고 부드러운 침구의 감촉은 오히려 독처럼 이질적이었다.
세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뇌에서 내린 명령은 사지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소실되었다. 손가락 끝 하나 까딱하는 데에도 엄청난 의지가 필요했다.
‘근육량 저하, 극심한 영양 불균형... 아니, 이건 장기간 침잠해 있던 육체의 반응이다.’
프로파일러로서의 습성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검시’하듯 분석하기 시작했다. 겨우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화려한 캐노피 침대, 고풍스러운 목제 가구들,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양식의 뾰족한 첨탑들. 병원은 아니었다. 영화 세트장이라기엔 공기의 밀감이 지나치게 생생했고, 피부에 닿는 햇살의 온도는 현실적이었다.
‘꿈인가? 아니면 사후세계의 농담인가?’
그때,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성녀님! 세상에, 기도가 닿았군요! 드디어 정신이 드신 거예요?”
하얀 앞치마를 두른 소녀였다. 그녀는 세아의 침대 곁으로 달려와 털썩 무릎을 꿇더니, 세아의 차가운 손을 맞잡으며 울먹였다. 세아는 통증을 참으며 소녀의 표정을 집요하게 읽어 내렸다.
과도하게 확장된 동공, 가늘게 떨리는 입술 끝, 그리고 지나치게 높은 톤의 목소리.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듯한 연기였지만, 프로파일러의 눈에는 그 이면의 미세한 균열이 선명하게 보였다.
저건 순수한 기쁨이 아니다. 오히려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대한 ‘당혹감’과 ‘공포’가 섞인 가식이다.
“성녀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교단 사람들 모두가 당신의 안녕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었답니다. 신께서 당신을 버리지 않으신 거예요!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그 순간이었다.
쿵.
심장 근처에서 묵직한 대못을 박아 넣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단순히 아픈 수준이 아니었다. 내장이 뒤틀리고, 폐부가 거대한 손에 쥐어짜이는 듯한 압박감이 몰려왔다. 식도를 타고 뜨거운 불길이 치밀어 올랐다.
“우욱, 커헉! 콜록!”
“성, 성녀님? 릴리아 님!”
세아는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쥐었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울컥, 하고 터져 나왔다. 순백의 시트 위로 선명하고도 잔인한 붉은 꽃들이 번져 나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폐 속에 공기 대신 피가 차오르는 듯한 공포.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아, 아악! 피, 피를...! 의사! 의사 선생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성녀님!”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 나갔다. 세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통증은 비현실적일 만큼 정직했다. 그리고 그 지독한 고통이 서서히 가라앉는 순간, 머릿속에 벼락처럼 어떤 확신이 각인되었다.
‘방금 저 말, 거짓말이었어.’
모두가 기도를 했다는 말, 신이 버리지 않았다는 말, 그리고 다행이라고 말하던 그 목소리까지.
무엇이 결정적인 거짓이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낯선 육체는 그 거짓을 감지하자마자 물리적인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마치 불순물을 걸러내는 필터처럼, 거짓이 고막을 통과하는 순간 육체를 파괴하려 드는 것이다.
세아는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성녀 릴리아.’
이 몸의 이름이자, 이 세계에서 불리는 칭호인 모양이다.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현상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었다.
‘거짓말을 들으면 피를 토한다... 이 능력이 성녀의 기적이라 불리는 것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터무니없는 가설이었지만, 방금 전의 감각은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세아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에 놓인 은쟁반과 물그릇,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작은 약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약병의 라벨은 읽을 수 없었지만, 입구에 묻은 가루의 흔적과 냄새를 맡아보았다. 독한 향료 냄새 뒤에 숨겨진 미세한 금속성 냄새.
‘진정제가 아니야. 이건 오히려 신경을 마비시키거나 기억을 흐리게 만드는 종류다.’
전임자 릴리아는 아마도 이 방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세아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전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가 서 있었다. 아니, 여자라기엔 너무나 가냘프고 위태로운 소녀였다.
빛바랜 은하수 같은 백금발,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보랏빛 눈동자. 한세아의 강인하고 날카로운 외모와는 정반대인,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탐미적인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그 보랏빛 눈동자 속에 담긴 서늘하고도 분석적인 이성은 분명 한세아의 것이었다.
“......나쁘지 않네.”
세아는 피 묻은 입술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육체는 연약하지만, 이 눈동자라면 범인의 심장 정도는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밖에서 거친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아까 나갔던 시녀의 가벼운 발소리와는 격이 달랐다. 절제되고 묵직한, 규칙적인 금속음이 섞인 행보.
쾅!
문이 예의 없이 거칠게 열렸다.
“성녀께서 부활하셨다기에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러 왔지.”
낮고 차가운 음성이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검은 제복 위에 은빛 갑옷을 덧댄 남자. 흑발을 정갈하게 뒤로 넘긴 채 오만한 눈빛으로 세아를 내려다보는 그는, 마치 칼날로 빚어낸 얼음 조각상 같았다.
성기사단장, 이안 폰 로스웰.
세아의 머릿속에서 릴리아의 파편화된 기억이 그의 이름을 고통스럽게 떠올렸다. 그는 성녀를 보필하는 기사가 아니었다. 성녀를 감시하고, 증오하는 자였다.
“......”
세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이안은 침대 주변에 뿌려진 핏자국과 세아의 입가에 남은 혈흔을 보더니, 입꼬리를 잔인하게 비틀어 올렸다.
“여전히 극적이군. 성녀께서 드디어 연극을 끝내신 모양이야. 아니면, 이번에는 독이라도 마신 척해서 교황청의 동정심이라도 사려는 건가?”
독설이었다. 명백한 조롱과 멸시가 섞인 문장. 하지만 세아의 가슴은 평온했다. 폐를 짓누르던 통증도, 심장을 찌르는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남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어.’
그는 진심으로 이 몸—릴리아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에게 릴리아는 가식 덩어리이자 추악한 연극배우일 뿐이었다. 프로파일러로서 수많은 범죄자와 부패한 권력자들을 대면해온 세아에게, 이런 투명하고 솔직한 적의는 오히려 다루기 쉬운 정보였다.
세아는 피 묻은 손수건을 침대 위에 던져두며 입을 열었다. 릴리아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가늘고 높았지만, 세아는 그 목소리에 자신의 힘을 실어 차갑게 내뱉었다.
“연극이라니. 기사단장님의 눈에는 내가 그 정도로 재주가 좋아 보입니까?”
이안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는 듯, 그의 차가운 안광이 흔들렸다.
“뭐?”
“죽음의 문턱을 제집 드나들듯 넘나드는 게 연극이라면, 이 나라의 배우들은 모두 목숨이 열 개쯤은 되어야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세아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걸음을 옮겨 이안의 앞으로 다가갔다. 비틀거리는 몸을 오직 정신력만으로 지탱하며, 그녀는 이안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기사단장님. 당신은 내가 깨어난 게 불만족스러운 모양이네요. 아니, 차라리 그대로 숨이 끊어지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하고.”
“불만족? 그럴 리가. 당신이 죽으면 교단의 거룩하고 위선적인 상징이 하나 사라지는 건데, 내가 왜 슬퍼하겠어. 오히려 축배라도 들었겠지.”
여전히 통증은 없었다. 100% 진실이다. 세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죽음을 바라는 기사라니, 전임 성녀의 삶이 얼마나 지독한 감옥이었을지 짐작이 갔다.
“좋습니다. 그럼 그 축배는 나중에 드시고, 지금은 하나만 묻죠.”
세아는 아까 시녀 엘라가 서 있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이 방에 출입한 자들의 명단을 알고 싶습니다. 기사단장님이 직접 관리하시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성녀의 궁을 감시하는 당신들의 기록에는 남아 있겠죠.”
이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그는 세아의 어깨 너머로 방 안을 훑더니 다시 그녀의 눈을 쏘아보았다.
“기억 상실이라도 걸린 건가? 아니면 이제는 기사단장인 나를 일개 서기로 부리겠다는 뜻인가?”
“기억이 온전치 않은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건 심부름이 아니라, 수사의 기초죠.”
“수사(搜査)?”
이안의 눈에 낯선 이채가 서렸다. 그가 아는 릴리아는 수사라는 단어의 뜻조차 모를 정도로 연약하고 수동적인 인물이었다.
“성녀의 입에서 수사라는 말이 나오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아니면 또 다른 기적의 발현인가?”
“말장난할 기분 아닙니다. 아까 나갔던 시녀 엘라가 내가 깨어난 걸 보고 ‘기적’이라며 울더군요. 그런데 내 몸은 그 단어에 반응해서 피를 토했습니다.”
세아는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기사단장님?”
이안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는 더 이상 세아를 비웃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 속에 담긴, 이전에는 본 적 없는 서늘하고도 예리한 빛을 집요하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이라는 뜻이죠. 그녀는 내가 깨어난 게 기쁘지 않았던 겁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르죠.”
세아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이안의 갑옷에서 풍기는 진한 금속 냄새와 찬 새벽 공기가 릴리아의 폐부로 밀려 들어왔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아직 이 방 안에, 그리고 사람들의 말 속에 남아 있어요.”
세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방 안의 가구 배치, 열린 문틈의 각도, 그리고 이안의 갑옷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차갑게 훑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파일러, 한세아.
그녀의 첫 번째 수사 대상은, 자신이 빙의한 이 가냘픈 성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범인이었다.
이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천천히 허리에 찬 검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재미있군.”
그가 낮게 읊조렸다.
“릴리아. 당신, 정말 내가 알던 그 멍청한 성녀가 맞나? 아니면 죽었다 살아나더니 속에 딴놈이라도 들어찬 건가?”
“글쎄요. 그 멍청한 성녀는 아마 아까 그 피와 함께 죽었을지도 모르죠.”
세아는 입가에 남은 핏자국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내며 서늘하게 웃었다.
“이제부터는 다른 성녀와 대화하셔야 할 겁니다. 기사단장님.”
창밖으로 성도의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7월 12일.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루미나 제국에서, 죽음에서 돌아온 수사관의 시간이 본격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