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인데 마왕과 몰래 연애 중입니다

2화: 커튼 뒤의 마왕
"루카스 경. 잠시만요."
엘레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성서 위에 누워 있던 포크를 집어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밤 크림이 묻은 은제 포크가 장갑 끝을 스치며 사라졌다.
몽블랑 접시는 촛대 뒤로 숨겼다. 붉은 과일 타르트는 기도대 아래 빈 성유함 속으로 들어갔다. 성유함이 본래 담아야 할 것은 거룩한 기름이었지만 지금은 버터 향 나는 비밀이 훨씬 급했다.
딸기 하나가 바닥으로 굴렀다.
커튼 뒤에서 검은 장갑 낀 손이 조용히 뻗어 그것을 낚아챘다.
엘레나는 눈으로 말했다.
먹지 마요.
칼릭스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억울하게 빛났다. 그래도 그는 딸기를 손안에 숨기고 기척을 죽였다. 밤의 은폐가 커튼 자락에 얇게 깔리자 그곳은 원래부터 벽이었던 것처럼 고요해졌다.
"성녀님?"
문밖의 루카스가 다시 불렀다.
"혹시 대답하기 힘드실 정도로 상태가 나쁘십니까?"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다만 문턱까지만요."
엘레나는 머리핀 없이 흘러내린 금발을 손끝으로 쓸어 넘겼다. 너무 단정하면 이상했다. 너무 흐트러져도 이상했다.
밤새 혹독한 기도를 올린 성녀답게 적당히 지친 얼굴이어야 했다.
그녀는 눈가에 신성력을 아주 옅게 피웠다. 빛이 물기처럼 어려 창백함을 가렸다.
문이 열렸다.
루카스 데 아스테리아는 은빛 갑옷 위에 새벽 순찰 망토를 걸친 채 서 있었다. 푸른 눈은 회랑의 냉기보다 차갑게 기도실 안을 훑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실례는 문턱까지라고 했어요."
루카스의 발이 정확히 문턱 앞에서 멈췄다.
그 충성심만큼은 정말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문제는 흠잡을 데 없이 성가시다는 점이었다.
"결계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마력의 잔향도 느껴졌습니다."
엘레나의 등 뒤에서 아주 희미한 냉기가 번졌다.
칼릭스가 웃은 것이다.
엘레나는 기도대 위의 촛불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역시 마왕의 저주입니까?"
"저주라기보다는 어둠에 짓눌린 기운이지요."
"마왕입니다."
루카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정했다.
커튼 뒤의 냉기가 한층 짙어졌다. 엘레나는 등 뒤로 손을 내려 아주 작게 손바닥을 폈다.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이 기도실에는 오늘 밤 외부의 원망과 살의를 모아 정화하는 의식이 펼쳐져 있었어요. 그러니 루카스 경이 느낀 흔들림은 침입의 흔적이 아니라 정화의 흔적입니다."
"그런 위험한 의식을 혼자 하셨단 말입니까?"
"혼자 해야 하는 의식이에요."
엘레나는 기도대 위의 검은 상자를 보았다. 칼릭스가 가져온 디저트 상자였다. 남부 제과점의 금박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루카스의 시선도 그쪽으로 움직였다.
"저 상자는 무엇입니까?"
위기였다.
엘레나는 상자를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마치 성유가 든 성배라도 되는 듯이.
"공물이에요."
"공물 말씀이십니까?"
"네. 달콤한 것은 원망을 잘 끌어당기거든요."
말하고 나서도 상당히 수상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숨을 삼켰다. 그에게 성녀의 비밀 정화 의식은 이해할 것이 아니라 경배할 것이었다.
"그런 숭고한 방식이 있었군요. 제가 무지했습니다."
엘레나는 양심이 조금 아팠다.
성유함 안의 타르트에서는 향긋한 과일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원망보다는 버터를 훨씬 잘 끌어당길 향이었다.
"성녀님께서 그 많은 악의를 이 작은 몸으로 받아 내시니 결계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마왕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루카스의 손이 검자루로 향했다.
엘레나는 재빨리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문턱 바로 안쪽까지였다. 루카스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자 커튼 쪽으로 가던 관심이 멈췄다.
"루카스 경.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침묵이에요."
"침묵입니까?"
"이 의식은 알려지면 안 됩니다. 백성들이 성녀가 마왕의 어둠을 밤마다 받아 낸다고 믿으면 불안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성녀님께서 홀로 감당하시는 고통을 제가 어떻게 모른 척합니까?"
아주 훌륭하게 오해하고 있었다.
엘레나는 더 밀어붙였다.
"그러니 도와주세요. 문을 지키고 아무도 들이지 않는 것. 그것이 오늘 밤 루카스 경에게 맡기는 가장 중요한 임무예요."
루카스의 얼굴에 결의가 번졌다.
"목숨을 걸겠습니다."
"목숨까지는 걸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제 목숨은 성녀님의 방패입니다."
커튼 뒤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딸기가 으깨지는 소리였다.
엘레나는 눈을 감고 싶었다.
루카스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무슨 소리가 났습니까?"
"공물이 악의를 흡수하는 소리예요."
"아."
루카스는 또 믿었다.
엘레나는 더 이상 양심을 살피지 않기로 했다. 지금 양심을 챙기면 연인을 들키고 세계 평화가 바닥에 떨어진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루카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령하십시오."
"새벽 종이 세 번 울릴 때까지 서쪽 회랑을 비워 주세요. 그리고 오늘 본 것과 느낀 것은 교황 성하께도 상세히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성하께도 말입니까?"
루카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순간 커튼 뒤의 어둠이 날카로워졌다. 칼릭스가 교황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이다.
엘레나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성하께는 제가 직접 보고드리겠습니다. 정화 의식의 세부는 성녀가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에요."
"하지만 결계 보강은 필요합니다."
"보강은 검토하겠어요."
"제가 새벽 회의에서 외곽 경비 강화만 건의하겠습니다. 기도실 안쪽 의식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경비 강화라는 말은 성공 같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문이 더 열리지는 않았다.
루카스는 문턱에서 물러났다.
"성녀님. 부디 무리하지 마십시오. 밤마다 마왕의 저주와 싸우시다 쓰러지시면 제 검은 제 쓸모를 잃습니다."
"저는 쉽게 쓰러지지 않아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두렵습니다."
그 말에는 연심보다 숭배가 먼저 묻어 있었다. 엘레나는 그 진심을 가볍게 넘길 수 없어 잠시 미소를 지웠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제가 지키려는 것은 저 하나가 아니에요."
"제국입니까?"
"평화요."
루카스는 그 말을 마왕 정벌 뒤에 오는 평화로 이해한 얼굴이었다.
"반드시 돕겠습니다."
그는 깊게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서쪽 회랑에 성기사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이어졌다가 하나둘 사라졌다. 엘레나는 문에 귀를 대고 한참을 기다렸다.
완전히 조용해진 뒤에야 그녀는 숨을 내쉬었다.
"나와요."
커튼이 천천히 흔들렸다.
칼릭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안에는 으깨진 딸기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심각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공물이 희생됐다."
"당신이 화내서 딸기가 죽었잖아요."
"그 기사가 네 고통을 말하는 방식이 거슬렸다."
"저를 걱정한 거예요."
"그 점도 거슬렸다."
"마왕이 성기사단장의 충성심에 질투하면 세계관이 너무 복잡해져요."
"질투가 아니다."
칼릭스는 문 쪽을 보았다.
"네가 매일 저런 눈빛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싫다. 그들은 네가 고결해서 고통을 참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더 많은 고통을 올려놓는다."
장난처럼 시작한 말의 끝이 무거워졌다.
엘레나는 웃음이 나오려던 입술을 천천히 닫았다. 긴장이 풀린 뒤 찾아오는 피로가 어깨를 눌렀다.
"그래도 방금은 당신 덕분에 안 들켰어요. 딸기만 빼고요."
"딸기는 내 불찰이다."
"다음부터는 커튼 뒤에서 과일을 쥐지 않기."
"그건 약속하겠다."
엘레나는 작게 웃고 촛대 뒤의 몽블랑 접시를 꺼냈다. 성유함 안의 타르트도 무사했다. 다만 포크 하나가 소매 안에서 크림을 묻히고 있었다.
"이건 세탁 담당 수녀님께 들키면 정말 끝이에요."
"태우면 된다."
"제 소매를요?"
"새로 사 주겠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말라고 했죠."
칼릭스는 조금 억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엘레나는 웃으며 그의 입가에 몽블랑을 한 조각 가져갔다.
"자. 공물 말고 야식."
칼릭스는 얌전히 받아먹었다. 방금까지 제국 성기사단장을 찢을 듯하던 마왕은 밤 크림 하나에 진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달다."
"남부에서 마지막 조각을 정중하게 양보받은 맛이네요."
"문짝은 멀쩡했다."
"그 말은 사람은 안 멀쩡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가게 주인이 웃었다."
"겁나서요?"
"돈을 많이 받아서."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연인이라면 오늘 하루 어땠냐고 묻고 밤 간식을 나눠 먹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기도실 커튼 뒤에 마왕을 숨기고 성기사단장에게 디저트를 정화 공물이라고 속인 뒤에야 겨우 그 평범함 근처에 도착했다.
그래도 엘레나는 이 순간이 좋았다.
그녀는 칼릭스의 손을 다시 잡고 신성력을 흘려보냈다. 빛은 손바닥 사이에서 작게 피어나더니 그의 손목과 팔을 따라 번졌다. 검은 마력이 빛을 밀어내려다 곧 숨을 죽였다.
칼릭스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갔다.
"아프지 않아요?"
"네 손이면 아프지 않다."
"거짓말."
"조금."
"많이죠?"
"조금 많이."
엘레나는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무릎 가까이 고개를 낮췄다. 흑발이 그녀의 치맛자락에 닿았다.
"칼릭스. 약속해요."
"무엇을."
"내 허락 없이 대성전 안에서 아무도 해치지 않기."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네가 위험하면?"
"그때는 나를 데리고 도망쳐요. 먼저 죽이지 말고."
"도망은 비겁하다."
"연애에는 아주 유용해요."
칼릭스는 한참 침묵했다.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알겠다. 네 허락 없이 이곳에서 피를 보지 않겠다."
"소리 없이 없애는 것도 금지."
"엘레나."
"그것도 피 보는 거랑 비슷해요."
칼릭스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다."
엘레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착해요."
"마왕에게 할 말은 아니다."
"내 연인에게는 할 수 있죠."
칼릭스의 붉은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장갑 안에 숨은 월광의 맹세가 따뜻하게 빛났다.
"내가 너를 오래 숨기게 만들고 있다."
"아니요. 우리는 서로를 숨겨 주는 중이에요."
"언젠가 네가 지친다면."
"그날은 당신이 더 맛있는 걸 가져오면 돼요."
"그걸로 충분한가?"
"맛있는 것과 당신이면 꽤 많은 날을 버틸 수 있어요."
칼릭스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신성력과 마력이 맞닿은 자리에서 맑은 빛이 피어났다. 위험한 두 힘은 엘레나의 호흡에 맞춰 서로를 찢지 않고 둥글게 감쌌다.
그때 문틈 아래로 흰 봉투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엘레나와 칼릭스가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봉투에는 교황청의 금빛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인장 위로 신성력이 얇게 걸려 있어 엘레나의 손이 닿기 전까지 열리지 않는 형식이었다.
"기척은?"
엘레나가 속삭였다.
"서기관 하나. 이미 멀어졌다."
칼릭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엘레나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인장이 손끝에서 풀렸다.
짧은 문장이 흘러나왔다.
새벽 제삼 종 직후 성녀 엘레나 로렌스는 교황 집무실로 출석할 것.
성회 이후의 정화 상태와 성녀의 기도실 결계를 직접 확인한다.
엘레나는 한동안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칼릭스가 그녀의 뒤에 섰다.
"가지 마라."
"성녀가 교황의 소환을 무시하면 바로 의심받아요."
"내가 함께 간다."
"커튼 뒤에 숨은 것도 겨우 참았으면서요?"
"이번에는 교황의 그림자 뒤에 숨겠다."
"절대 안 돼요."
엘레나는 편지를 접었다. 손끝은 차가웠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까 루카스 경에게 말했죠. 제가 지키려는 건 평화라고."
"그는 네 말을 다르게 들었다."
"그래도 말은 남아요. 언젠가 모두가 제대로 들을 때까지 제가 계속 말할 거예요."
칼릭스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하면 되지."
"오늘 밤은 아무도 안 해치겠다는 약속을 지켜요. 그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돌아가요."
"너를 혼자 두고?"
"혼자가 아니에요."
엘레나는 장갑 안의 반지를 눌렀다. 달빛 같은 온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번졌다.
"당신이 여기 있으니까."
기도실 밖에서 새벽을 예고하는 종이 멀리 울렸다.
엘레나는 교황의 소환장을 성서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 위에 남은 몽블랑 접시를 올려 두었다.
칼릭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성서 위에 디저트를 올려도 되나?"
"오늘 밤부터 공식적으로 공물이니까요."
그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사라지기도 전에 두 사람은 다시 손을 맞잡았다. 새벽까지 남은 시간은 짧았다. 들키지 않고 사랑하기에는 턱없이 짧았고 세상을 바꾸기에는 더더욱 짧았다.
그래도 엘레나는 그 시간을 놓지 않았다.
커튼 뒤에 숨은 마왕과 문밖에서 충성을 불태우는 기사와 새벽에 기다리는 교황.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성녀는 가장 온화한 얼굴로 다음 진심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