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인데 마왕과 몰래 연애 중입니다

시놉시스
제국 최고의 성녀 엘레나 로렌스의 사명은 인류의 적 마왕을 단죄하는 것이다.
다만 그녀가 밤마다 기다리는 이는 신의 계시가 아니라 마왕 칼릭스 폰 발하이트다.
낮에는 정벌을 축복하고 밤에는 연인의 마력 폭주를 정화하는 성녀. 모두가 원수라 믿는 두 사람의 달콤하고 아슬아슬한 비밀 연애가 대성전의 두꺼운 문 뒤에서 시작된다.
1화: 성회가 끝난 뒤
루미나스 대성전의 종이 세 번 울렸다.
하얀 대리석 회랑마다 금빛 깃발이 내려오고 성가대의 목소리가 돔 천장에 부딪혀 은은하게 흩어졌다. 제국 귀족과 신관과 성기사들이 한 방향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 끝에 엘레나 로렌스가 서 있었다.
성녀의 금발은 햇빛을 받은 성화처럼 빛났고 보랏빛 눈동자는 잔잔했다. 적어도 사람들 눈에는 그랬다.
"성녀님."
교황 아르만이 지팡이를 들었다. 보석이 박힌 성장이 바닥을 두드리자 숨소리마저 낮아졌다.
"마계의 군세가 다시 북부 변경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성회에서 마왕 칼릭스 폰 발하이트에게 신의 심판이 내려지기를 축원해 주십시오. 성녀님의 한마디가 제국군의 검이 될 것입니다."
수백 개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꽂혔다.
마왕을 죽이라고.
내 연인을.
엘레나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장갑 안쪽에 숨긴 은빛 반지가 따뜻하게 맥박쳤다. 월광의 맹세. 밤이 되면 칼릭스가 이 작은 온기를 따라 그녀를 찾아올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엘레나는 웃을 수 있었다.
"신의 빛은 증오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회장이 조용해졌다.
엘레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맑았다.
"고통받는 백성을 지키고 어둠에 짓눌린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 존재하지요. 그러니 오늘 저는 루미나스의 모든 병사와 백성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누구도 헛되이 피 흘리지 않도록."
사람들은 감격한 듯 숨을 삼켰다.
교황의 눈가만 미세하게 굳었다. 그가 원한 것은 평안을 비는 기도가 아니라 전쟁을 밝히는 불씨였다.
"역시 성녀님이십니다."
성기사단장 루카스 데 아스테리아가 낮게 말했다. 그의 은발은 갑옷의 광택만큼이나 단정했다.
"마왕의 이름 앞에서도 자비를 잃지 않으시다니."
엘레나는 웃음을 삼켰다.
자비라기보다는 사심이었다.
성회가 끝난 뒤 엘레나는 성소 뒤편의 작은 회랑으로 물러났다. 향 냄새와 찬 돌 냄새가 뒤섞여 머리가 아팠다.
루카스가 곧장 따라왔다.
"성녀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오래 서 있어서 그래요."
"마왕의 사악한 기운이 성회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닙니까?"
엘레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때마다 루카스의 충성심은 햇빛처럼 눈부셨고 햇빛처럼 피할 곳이 없었다.
칼릭스라면 지금쯤 마왕성에서 오늘 밤 가져올 디저트를 고르느라 측근들을 닦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악한 기운이라기엔 지나치게 달콤한 냄새가 날 것이다. 마계의 공포라는 남자가 딸기 타르트와 밤 크림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뇌하는 모습까지 떠올라 엘레나는 입꼬리를 단속해야 했다.
"아마 제 피로 때문일 거예요."
"그 피로도 결국 마왕 때문입니다."
루카스는 비장하게 주먹을 쥐었다.
"오늘 밤부터 기도실 주변의 경비를 두 배로 늘리겠습니다. 성녀님께서 홀로 마왕 정벌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안 된다.
엘레나의 미소가 아주 잠깐 굳었다.
기도실 주변의 경비가 두 배가 되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칼릭스가 성기사 셋을 재우고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 칼릭스는 분명 조용히 재웠다고 말하겠지만 쓰러진 기사들이 발견되는 순간 조용한 문제는 아니게 된다.
"루카스 경."
엘레나는 두 손을 모았다.
"오늘 밤은 특별한 정화 기도를 올릴 예정이에요. 외부 기척이 닿으면 결계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문 앞을 지키겠습니다."
"문 앞의 충성심도 결계에는 자극이 된답니다. 특히 루카스 경의 충성심은 아주 강하니까요."
루카스가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칭찬인지 출입 금지 명령인지 판단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엘레나는 아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기도가 끝날 때까지 서쪽 회랑 밖으로 누구도 들이지 말아 주세요. 그것이 저를 돕는 길이에요."
"성녀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루카스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목숨을 걸고 서쪽 회랑을 비우겠습니다."
비워 달라는 말이 목숨까지 갈 일은 아니었지만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해가 지자 대성전의 얼굴이 바뀌었다.
낮의 금빛은 사라지고 푸른 달빛이 창틀과 촛대를 차갑게 적셨다. 엘레나는 성녀의 기도실 문을 잠그고 세 겹의 신성 결계를 둘렀다.
그리고 곧장 신발을 벗었다.
"살았다."
낮 동안 꼿꼿하던 어깨가 내려갔다. 그녀는 의자에 털썩 앉아 머리핀을 뽑았다. 금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반지가 다시 따뜻해졌다.
엘레나는 창문을 열었다.
"칼릭스."
달빛이 한 번 접혔다. 창밖의 밤이 얇은 천처럼 말리고 그 틈에서 검은 그림자가 흘러나왔다.
검은 그림자가 창틀 위에 내려앉았다. 흑발의 남자는 밤보다 더 어두운 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붉은 눈동자에는 대성전의 촛불이 작게 비쳤다.
제국의 모든 아이가 악몽 속에서 배운 이름.
마왕 칼릭스 폰 발하이트.
그는 창문으로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굽혀 엘레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늦었다. 미안해."
"삼 분 늦었어요."
"남부의 몽블랑을 사러 갔는데 마지막 조각을 어떤 백작 부인이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빼앗았나요?"
"정중하게 양보받았다."
엘레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마왕이 말하는 정중함은 대개 보통 사람의 정중함보다 온도가 낮았다.
칼릭스는 시선을 피하며 검은 상자를 내밀었다.
"돈을 많이 냈다. 그리고 가게 문짝은 그대로 있다."
"마왕 폐하께서 시장 경제를 배우셨네요."
"네가 사람을 함부로 겁주지 말라고 했으니까."
엘레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칼릭스의 굳어 있던 얼굴이 그제야 풀렸다. 그는 상자를 열어 밤색 크림이 봉긋한 몽블랑과 붉은 과일 타르트를 꺼냈다. 기도대 위에 성서 대신 디저트 접시가 놓였다.
"오늘 성회에서 무슨 말을 들었지?"
칼릭스가 물었다. 목소리는 낮아졌지만 엘레나를 향한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평범했어요. 마왕을 단죄하라는 말."
"평범하지 않다."
"여기서는 매일 듣는 말이라 평범해졌어요."
칼릭스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교황을 없애면 네가 편해지나?"
"칼릭스."
"조용히 할 수 있다."
"조용히의 기준이 서로 다르잖아요."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남자가 엘레나의 한마디에는 얌전히 포크를 기다렸다.
엘레나는 포크로 몽블랑을 조금 떠서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
"오늘은 내가 버틴 날이에요. 그러니 당신은 화내는 대신 칭찬해 주세요."
칼릭스는 얌전히 크림을 받아먹었다.
"잘했다. 엘레나."
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속의 진심이 너무 깊어 엘레나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무리했다."
"그건 칭찬이 아니에요."
"내가 보기에 사실이다."
칼릭스의 손끝에서 검은 마력이 가늘게 튀었다. 촛불이 흔들리고 창밖의 달빛이 일그러졌다.
엘레나는 곧바로 그의 손을 잡았다.
"또 시작이네요."
"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럼 더 빨리 손 내밀었어야죠."
그녀의 신성력이 손바닥에서 피어났다. 따뜻하고 깨끗한 빛이 검은 마력을 감싸 안았다. 부딪히면 서로를 찢어야 할 힘이 엘레나의 조절 아래 부드럽게 섞였다.
칼릭스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기도실 바닥에 앉아 엘레나의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제국이 두려워하는 마왕은 이 순간 아주 피곤한 남자처럼 보였다. 엘레나는 그 무게를 밀어내지 않았다.
"낮에 그들이 네게 내 죽음을 기도하라고 했나."
"직접적으로는 아니고 매우 장엄하게 돌려 말했죠."
"내가 싫다."
"마왕이 자기 정벌 성회에 삐지는 건 조금 귀여워요."
"나는 진심이다."
엘레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알아요. 그래서 나도 진심으로 버티는 거예요. 언젠가 우리가 둘 다 안 숨는 날을 만들려고."
칼릭스가 그녀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날까지 네가 다치면 안 된다."
"당신도요."
정화의 빛이 잦아들었다. 칼릭스의 손끝에서 튀던 검은 불꽃도 잠든 새처럼 조용해졌다.
그때 복도 끝에서 종이 한 번 울렸다.
엘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새벽 순찰을 알리는 종이었다. 너무 이르다.
칼릭스도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발소리."
"누구죠?"
"기사 하나. 망설임이 없다. 네 기사단장이다."
엘레나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루카스가 문밖에서 멈췄다.
"성녀님."
문 너머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걱정스러웠다.
"서쪽 회랑의 결계가 흔들린 것을 확인했습니다. 혹시 마왕의 저주가 침입한 것입니까?"
칼릭스가 눈썹을 들었다.
엘레나는 입술에 손가락을 세웠다.
"성녀님. 허락하신다면 즉시 들어가겠습니다."
문고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엘레나는 칼릭스의 망토를 붙잡고 커튼 뒤로 밀어 넣었다.
"절대 나오지 마요."
칼릭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위험하면 나온다."
"그럼 우리 둘 다 위험해져요."
문고리가 한 번 더 흔들렸다.
엘레나는 흐트러진 머리와 디저트 접시를 번갈아 보았다. 성서 위에는 밤 크림이 묻은 포크가 당당하게 누워 있었다.
그리고 가장 성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루카스 경. 잠시만요."
기도실 안에는 마왕과 몽블랑과 성녀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들키면 안 되는 조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