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氣)가 아니라 에너지 보존 법칙입니다만?

시놉시스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거론되던 천재 이론물리학자 한강우는 연구실 초전도체 실험 중 원인 불명의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다.
다시 눈을 뜬 곳은 정파와 사파와 마교가 칼끝을 겨누는 중원 무림. 그는 삼류 문파 청운문의 무재능 서자 백리운의 몸에서 깨어난다.
기혈이 막혀 내공을 쌓을 수 없다는 진단을 받은 몸이지만 그의 눈에 강호의 기는 신비가 아니다. 열과 파동과 압력과 벡터. 낭비투성이 무공을 참지 못하는 물리학자의 상식 파괴 강호 연구가 시작된다.
1화: 실험실에서 청운문까지
한강우는 새벽 두 시의 연구실에서 커피 대신 냉각수 압력계를 보고 있었다.
초전도체 시편은 진공 챔버 안에서 푸른 빛을 머금었다. 냉각 라인과 차폐벽의 수치는 모두 안정 범위 안이었다.
문제는 계측 화면 한가운데서 뛰는 붉은 파형이었다.
"외부 잡음이 아닙니다. 주기가 너무 일정합니다."
조교 민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우는 모니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잡음이면 무작위여야지. 이건 공명이다."
"그럼 어디하고 공명하는 겁니까?"
"그걸 알면 내가 밤을 새우겠나."
강우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파형을 푸리에 변환하자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왔다. 장치 내부 어디에도 없는 주파수였다. 더 이상한 것은 에너지 수지였다.
입력값과 출력값이 맞지 않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너지가 사라졌다고?"
그 말은 과학자에게 모욕에 가까웠다.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를 바꾸거나 다른 계로 이동할 뿐이다.
연구실 문이 열렸다. 연구소장이 뛰어 들어왔다.
"한 박사! 즉시 정지해. 건물 전체에 대피령 내렸어."
"지금 끄면 원인을 놓칩니다."
"사람이 먼저야!"
"사람을 살리려면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챔버 안쪽에서 금속이 우는 소리가 났다. 단순한 진동음이 아니었다.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다른 공간이 문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민석이 뒤로 물러섰다.
"박사님. 저거 빛이 이상합니다."
푸른 빛 안쪽에서 붉은 선이 생겼다. 선은 심장 박동처럼 팽창하고 수축했다. 강우는 그 주기를 보고 숨을 멈췄다.
인간의 호흡 주기와 닮아 있었다.
"생체 신호?"
그는 마지막 데이터를 저장하려 했다. 손가락이 엔터 키를 누르는 순간 차폐벽이 안쪽으로 휘었다. 세계가 한 장의 얇은 종이처럼 접혔다.
폭발음은 늦게 왔다.
먼저 온 것은 열이었다.
그리고 빛.
강우는 눈앞을 덮는 붉은 파동 속에서 이상할 정도로 또렷한 생각을 했다.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전달되는 거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냄새였다.
소독약이 아니었다. 묵은 약초와 젖은 나무와 오래된 천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천장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그을린 서까래였다.
"살았나?"
낯선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강우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갈비뼈 아래가 쥐어짜듯 아팠다. 팔은 자기 팔이 아닌 것처럼 가늘었다. 손목은 말라 있었고 손바닥에는 붓을 오래 쥔 사람처럼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는 호흡을 멈추고 감각을 분류했다.
시각 정상. 청각 정상. 통증 과다. 근력 부족. 심박 불규칙.
그다음 기억이 밀려왔다.
백리운.
청운문 문주의 서자. 열여덟.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고 운기조식만 하면 온몸의 기혈이 꼬여 쓰러졌다. 재능 없는 짐짝. 문파의 수치. 이름보다 폐급이라는 말로 더 자주 불리던 사람.
강우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환각이라기엔 감각 입력이 너무 일관적이군."
침상 옆에 서 있던 하급 제자가 피식 웃었다.
"맞고 머리가 더 이상해졌네."
그는 강우가 아니라 백리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멸시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백리운의 기억 속에서도 저 얼굴은 여러 번 보였다.
"내가 왜 맞았지?"
"그것도 기억 안 나냐? 수련장 구석에서 또 몰래 운기하다가 쓰러졌잖아. 사형들이 끌고 오느라 고생했다."
"운기."
강우는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렸다.
몸 안에 힘을 모아 돌린다는 이 세계의 수련법. 백리운의 기억에는 흐릿한 감각만 남아 있었다. 배꼽 아래가 뜨거워지고 가슴이 막히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던 감각.
문이 밀리고 흰 수염의 노인이 들어왔다. 허리에는 침통이 매달려 있었다.
"비켜라."
하급 제자가 한 걸음 물러났다.
노인은 백리운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손끝이 생각보다 정확했다. 세 손가락의 압력이 조금씩 달랐다.
"송 의원님. 어떻습니까?"
"기혈이 또 뒤틀렸구나. 운기조식은 포기하라 했거늘."
강우는 노인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기혈이 뒤틀렸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느 혈관의 압력 이상입니까?"
송 의원의 손이 멈췄다.
"혈관?"
"맥박이 불규칙한 건 맞습니다. 다만 막혔다면 전후 압력차가 있어야 합니다. 열도 특정 부위에 축적돼야 하고요. 손목보다 명치 쪽 체온이 높군요."
하급 제자가 코웃음을 쳤다.
"의원 앞에서 아는 척이냐?"
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호흡을 세었다. 들숨 때 통증이 커졌다. 날숨 때 통증은 약해졌다. 명치 아래의 열감은 일정하지 않았고 심박과 비슷한 박자로 흔들렸다.
기.
이 세계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감각에 들어오는 것은 신비한 힘이 아니었다. 열과 압력과 진동이었다. 이름만 다를 뿐 관찰 가능한 물리량이었다.
"이건 기가 아닙니다."
송 의원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럼 무엇이냐?"
"에너지 전달입니다. 이름을 잘못 붙였으니 치료도 틀리는 겁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하급 제자는 웃다가 말았다. 송 의원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강우는 침상 가장자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벽을 짚으면 걸을 수 있었다.
"어디 가느냐?"
"확인할 게 있습니다."
"그 몸으로?"
"몸이 나쁘면 더 빨리 확인해야죠. 원인을 모르는 결함은 방치할수록 손실이 커집니다."
그는 문턱을 넘었다.
바깥공기는 차가웠다. 산중의 새벽이었다. 처마 끝에는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멀리서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청운문.
백리운의 기억 속에서는 거대한 산문이었다. 강우의 눈에는 낡은 목조건물과 비효율적인 동선으로 가득한 작은 조직이었다.
연무장에는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한 청년이 검을 들고 중앙에 섰다. 그는 발을 크게 디디고 허리를 비틀었다. 검끝이 커다란 원을 그리자 옷자락이 화려하게 펄럭였다. 구경하던 잡역들이 감탄했다.
"역시 청운검법의 유운식이야."
"검이 구름처럼 흐르잖아."
강우는 첫 동작만 보고 한숨을 쉬었다.
"열효율 최악."
가까이 있던 제자가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검을 움직여 상대를 베려면 힘의 방향이 목표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방금 동작은 공기를 베고 땅을 긁고 옷자락까지 흔들었습니다. 타격에 쓰이지 않는 에너지가 너무 많습니다."
검을 들고 있던 청년의 얼굴이 붉어졌다.
"청운검법을 모욕하느냐?"
"모욕이 아니라 측정입니다. 소리가 큰 초식일수록 에너지를 소리로 버린다는 뜻입니다."
"폐급 주제에!"
청년이 다가왔다. 그의 손바닥이 백리운의 어깨를 밀었다.
힘은 컸다. 방향은 단순했다.
강우는 본능 대신 계산으로 움직였다. 발끝을 축으로 삼았다. 어깨를 뒤로 빼고 상체를 아주 조금 틀었다. 상대의 힘은 정면 충돌하지 못하고 옆으로 흘렀다.
청년이 앞으로 비틀거렸다.
백리운도 휘청였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가슴 안쪽이 타는 듯 아팠다. 그래도 계산은 맞았다.
연무장이 술렁였다.
"방금 뭐야?"
"백리운이 버틴 거야?"
청년이 이를 악물고 다시 손을 들었다.
"요행으로 한 번 피했다고 건방지게 굴지 마라."
"요행이 아닙니다."
강우는 숨을 골랐다.
"작용점이 틀렸습니다. 힘을 많이 주면 뭐 합니까. 방향이 틀리면 상대가 아니라 허공이 맞습니다."
"이놈이 끝까지!"
그때 송 의원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갈랐다.
"그만."
노인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보다 걱정이 먼저 떠 있었다.
"네 몸으로 또 무리하면 죽는다."
"죽는 건 이미 한 번 해봤습니다."
말하고 나서 강우는 잠깐 멈췄다.
방금 말은 백리운의 기억이 아니었다. 한강우의 기억이었다. 폭발의 빛과 접히던 세계와 사라지지 않는 에너지의 마지막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은 직진했다. 물방울은 아래로 떨어졌다. 사람은 밀면 밀린 방향으로 움직였다. 법칙은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해볼 만했다.
송 의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기혈은 막힌 것이 아니라 꼬인 것이다. 억지로 뚫으려 하면 전신이 타들어 간다."
"타들어 간다는 건 열이 축적된다는 뜻입니다."
"말장난할 일이 아니다."
"말장난이 아닙니다. 막힌 유로에 압력을 잘못 넣으면 파열합니다. 하지만 압력차를 순서대로 만들면 흐름은 돌아옵니다."
송 의원은 어이없어했다.
하급 제자들은 수군거렸다. 검을 들었던 청년은 아직도 붉어진 얼굴로 백리운을 노려보았다.
강우는 그 반응을 모두 배경 소음으로 처리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연구실 전체가 아니었다. 종이와 붓, 맥을 짚을 손, 그리고 이 허약한 몸 하나면 충분했다.
"금침이 있습니까?"
"무엇에 쓰려고?"
"실험에."
송 의원의 얼굴이 굳었다.
"네 몸은 실험 도구가 아니다."
"현재로서는 유일한 관측 대상입니다."
"백리운."
처음으로 노인이 그의 이름을 무겁게 불렀다.
강우는 그 이름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강우의 기억과 백리운의 기억은 아직 완전히 섞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 몸의 통증은 자신의 것이었다. 이 몸이 무너져도 다시 연구할 기회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목에 손가락을 올렸다.
불규칙한 박동 아래에서 작은 흐름이 떨리고 있었다. 막힌 강줄기처럼 한 곳에서 압력이 차오르고 있었다.
"기라고 부르든 내공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들어간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디로 새는지만 찾으면 됩니다."
송 의원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미친 사람을 보는 눈과 환자를 보는 눈 사이에서 흔들리는 표정이었다.
"한 번만이다. 조금이라도 맥이 흔들리면 즉시 멈춘다."
"맥은 원래 흔들립니다. 중요한 건 주기입니다."
"입 다물고 앉아라."
강우는 연무장 가장자리의 낮은 돌 위에 앉았다. 산바람이 땀을 식혔다. 명치 아래의 열감은 여전히 불규칙했다.
그는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선을 그었다.
심장. 폐. 단전이라 부르는 하복부. 통증이 심해지는 지점. 열이 고이는 지점.
선은 곧 회로도가 되었다.
송 의원이 금침 하나를 뽑아 들었다.
강우는 그 침끝을 보며 웃었다.
"좋습니다. 우선 가장 막힌 관부터 찾죠."
"관?"
"당신들은 혈도라 부르겠지만."
그의 시야에서 연무장의 소음이 멀어졌다. 남은 것은 박동과 호흡과 압력의 미세한 차이뿐이었다.
이 세계에서 그가 처음 세운 가설은 단순했다.
무림은 기적의 세계가 아니다.
비효율의 세계다.
그리고 비효율은 고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