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 현장직은 결재를 안 기다린다

2화: 말할 수 없는 12분
본청 소각팀 도착까지 9분.
윤서하는 패드에 떠 있는 두 줄을 읽었다.
[현장 조정자 임시 권한 검토: 승인 대기]
[대가 산정 중]
좋은 문장은 아니었다. 퇴마청 시스템에서 대가라는 말은 대개 남의 장부에 적힌 비용을 뜻했다. 이번에는 패드 배경이 검게 죽었다가 살아났다.
[대가 후보 검색]
냉장고 앞의 여자가 움찔했다. 젖은 편의점 조끼에서 물이 떨어졌다. 물방울은 바닥에 닿자 영수증 조각처럼 얇게 펴졌다.
"없애는 거 아니라고 했죠."
"그 말은 아직 유효합니다."
서하는 무전 볼륨을 낮췄다. 강도윤의 목소리가 잡음 사이로 깨졌다.
- 윤서하. 시스템 창 닫아.
"닫으면 소각밖에 안 남습니다."
- 하청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판단 안 합니다. 기록만 맞춥니다."
여자의 손이 다시 손목으로 올라갔다. 각도와 속도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반복 행동이 시작되면 소각팀은 기다리지 않는다.
서하는 부적 대신 손바닥을 보였다.
"그 동작 한 번 더 하면 밖에서 들어옵니다. 말 못 하는 건 말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만 합시다."
"사인했는데."
"이름 말할 수 있습니까?"
여자는 입을 열었다. 목 안쪽에서 얼음 갈리는 소리가 났다. 입술이 ㅁ 모양까지 갔다가 멈췄다. 검은 물이 턱 아래로 흘렀다.
서하는 바로 질문을 바꿨다.
"이름 말고 행동으로 합시다. 당신이 한 것만 보여 주세요."
여자가 냉장고 문에서 손을 뗐다.
드르르르.
모터가 다시 울었다. 여자는 계산대 쪽으로 걸었다. 여섯 걸음. 계산대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보이지 않는 기기에 손목을 댔다.
삑.
소리는 나지 않았는데 서하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여자는 냉장고로 돌아왔다. 다섯 걸음.
마지막 한 걸음은 빠졌다.
그 자리에 검은 물이 고였다.
서하는 현장 기록 패드에 동선을 찍었다. 센서는 움직임을 잡지 못했다. 귀신의 반복 행동은 영상보다 냄새와 온도에 먼저 남는다.
"첫 번째 인증은 계산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인증은 냉장고 앞."
여자가 고개를 세게 저었다. 냉장고 유리문이 안쪽에서 금 간 것처럼 하얗게 얼었다.
"두 번 찍혔는데."
"당신이 두 번 찍은 건 아닙니까?"
여자의 손가락이 자기 목을 파고들었다. 대답은 막혔다. 모터 소리가 갑자기 커지고 진열대 끝 컵라면들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두 번째는 질문 보류."
패드가 반응했다.
[영혼 진술 일부 확보]
[상대 진술 1건 부족]
대가 산정 창이 다시 깜박였다.
[대가 후보: 통화기록 1건]
서하의 손가락이 멈췄다.
휴대폰 화면 위로 오래된 번호 하나가 떠올랐다. 저장명은 없었다. 지우지 못한 부재중 통화였다. 시스템은 그런 것을 잘 찾았다. 사람이 아까워하는 것. 장부에 올리면 가장 싸게 빼앗을 수 있는 것.
여자가 작게 물었다.
"왜 그래요?"
"가격표 봤습니다."
"비싸요?"
"비싼 척하는 싼 물건입니다."
거짓말이었다. 서하는 패드를 뒤집어 화면을 가렸다.
자동문 밖에서 점주가 소리쳤다.
"아니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요? 본청에서 태우면 끝난다면서요."
서하는 유리문 너머 점주를 봤다. 점주는 경찰 테이프 밖에서 휴대폰만 만지고 있었다. 젖은 우비 아래 셔츠 목덜미가 말라 있었다.
"사장님. 물품 수령 알림 몇 시에 받으셨습니까?"
"몰라요. 자동 배송이라 알바가 알아서 해요."
"야간 수령 확인 도장이 두 번 찍혔습니다."
"본사 시스템이 찍는 거지 사람이 알겠습니까?"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산대 아래를 살폈다. 점주가 말한 저장장치는 없었다. 대신 빈 공유기 선반과 먼지만 있었다.
"CCTV 저장장치 어디 있습니까?"
"거기 있잖아요."
"없습니다."
점주의 얼굴이 굳었다.
그 순간 계산대 화면이 켜졌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결제 안내 화면이 숫자로 찢어졌다.
02:05.
화면이 꺼졌다 켜졌다.
02:17.
다시 02:05.
여자가 냉장고 앞에서 떨고 있었다. 전자기기를 건드린 것은 처음이었다. 힘을 쓴 만큼 성에가 발목까지 올라왔다.
"그 사이가 비어요."
여자는 이를 부딪치며 말했다.
"그 사이만 없어요."
서하는 계산대 아래가 아니라 냉장고 뒤쪽을 봤다. 반복 동선의 마지막 한 걸음이 빠진 자리. 검은 물이 고였던 자리. 거기에 전선 하나가 벽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몸을 낮춰 진열대를 밀었다. 냉장고 뒤 좁은 틈에 작은 보조 라우터가 붙어 있었다. 불빛은 꺼져 있었고 봉인 스티커는 뜯긴 뒤 다시 붙인 흔적이 있었다.
봉인 스티커 가장자리에는 먼지가 없었다. 최근에 손댄 흔적이었다. 서하는 손전등을 비스듬히 세웠다. 스티커 아래로 아주 가는 붉은 실이 지나갔다.
본청 장비가 아니었다. 하청 현장에서는 저런 실을 쓰지 않는다. 끊으면 기록이 날아가거나 경보가 뜬다. 둘 중 하나였다.
"사장님."
서하는 유리문 밖을 보지 않고 불렀다.
"이 라우터 누가 붙였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설치 업체가 했겠죠."
"설치 업체 이름."
"계약서 사무실에 있어요."
"그 사무실 주소가 본청 신고서에는 여깁니다."
점주가 입을 다물었다.
민채가 냉장고 문에 이마를 댔다. 성에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따라 내려왔다. 그 성에 속에 흐릿한 글자가 떠올랐다가 깨졌다.
폐기.
서하는 그 글자를 보자마자 계산대 쪽으로 손전등을 돌렸다. 바닥에 떨어진 컵라면 봉지 사이에서 감열지 조각 하나가 말려 있었다. 진짜 영수증은 아니었다. 민채의 기억이 현장 먼지를 빌려 만든 잔상이었다.
그는 봉투를 하나 더 꺼냈다.
"만지지 말고 그냥 비춰 주세요."
민채가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지 않았는데도 감열지 조각이 펴졌다. 글자는 절반만 남았다.
[야간 폐기 승인]
시간은 보이지 않았다. 승인자 칸도 검게 먹혀 있었다. 하지만 서하는 알아봤다. 물품 수령 전표와 같은 양식이었다. 물건을 받은 기록과 버린 기록이 같은 밤에 겹쳐 있었다.
"수령한 걸 바로 폐기했습니까."
점주가 웃었다. 웃음이 너무 빨랐다.
"폐기 물건 많은 거 몰라요? 편의점 처음 와 봐요?"
"처음은 아닌데 죽은 직원이 폐기 승인지에 집착하는 건 자주 못 봅니다."
민채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는 자기 손목 대신 계산대 아래 빈 선반을 가리켰다.
"거기 있었어요."
"무엇이요."
"뜨거운 거."
냉장고 안쪽에서 김이 올랐다. 차가운 곳에서 뜨거운 기억이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 뜨거운 것이 사람이었는지 물건이었는지 액체였는지 지금 캐물으면 문장이 막힐 것이다.
그는 대신 라우터의 붉은 실을 사진으로 찍었다.
패드가 낮게 울렸다.
[현장 물증 추가: 비인가 봉인선]
[소각 전 증거 보존 권고]
권고라는 말이 떴다. 명령은 아니었다. 그래도 방금 전보다 한 칸 앞이었다.
무전이 다시 울렸다.
- 소각팀 5분. 더 이상 현장 접근하지 마라.
"CCTV 저장장치 위치가 현장 신고 내용과 다릅니다."
- 소각 끝나고 조사해도 돼.
"소각하면 귀신 진술이 날아갑니다."
- 그게 소각이야.
서하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게 소각이었다. 귀신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귀찮은 진술을 끝내는 일. 그래서 서하는 그 단어를 믿지 않았다.
여자가 갑자기 냉장고 문을 두드렸다.
"문이 안 닫혔어요."
"어느 문입니까. 냉장고 문입니까."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밖에서 문이 먼저..."
목이 막혔다. 이번에는 손목이 아니라 명찰을 움켜쥐었다. 깨진 플라스틱 위에 남은 글자 채가 번졌다. 그 옆에 아주 흐린 획이 생겼다.
민.
서하는 숨을 낮게 골랐다.
"민채 씨."
여자가 얼어붙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위험했다. 틀리면 계약이 깨진다. 맞으면 상대가 자기 기록을 되찾는다. 어느 쪽이든 소각 전에는 본청이 싫어하는 일이었다.
여자의 눈이 처음으로 서하를 똑바로 봤다.
"저... 민채예요?"
"확정은 아닙니다. 현장 물증에는 그렇게 남아 있습니다."
"내가 잊었어요?"
"누가 지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여자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냉장고 문 안쪽에서 검은 물이 위로 흘렀다. 서하는 바로 말을 붙였다.
"지금 분노하면 소각 사유가 됩니다. 분노는 나중에 증거 붙이고 합시다."
"나중이 있어요?"
"만들려고 합니다."
패드가 울렸다.
[상대 진술 1건 부족]
[질문 형식 조정 권고: 행위자 식별 금지 / 기록 오류 확인 가능]
서하는 메시지를 보고 짧게 웃었다. 시스템도 허점을 알고 있었다. 누가 했는지는 말하지 못하지만 무엇이 틀렸는지는 말할 수 있다.
"민채 씨. 사람 이름 말하지 마세요. 당신이 죽은 이유도 말하지 마세요. 기록 중 틀린 것만 고릅니다."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인수증 잔상을 집었다.
"두 번째 서명."
"틀렸습니까?"
"제 손이 아니에요."
패드의 빨간 점이 커졌다.
[상대 진술 확보]
[현장 조정자 임시 권한 검토: 조건 일부 충족]
동시에 다른 알림이 떴다.
[감찰 열람: 한지우]
서하는 화면을 보며 입술을 다물었다. 이 현장은 소각팀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자동문 밖에 검은 승합차 불빛이 멈췄다. 본청 소각팀이었다. 우비를 입은 경찰관들이 테이프를 더 뒤로 물렸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금속 장비가 서로 부딪쳤다. 소각팀은 부적을 들고 오지 않는다. 그들은 현장을 설득하지 않는다. 봉인봉으로 길을 만들고 염화 분말을 뿌린다. 상태창이 닫힐 때까지 태운다.
민채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몸이 냉장고 유리문 안쪽으로 반쯤 빨려 들어갔다. 소멸하려는 게 아니었다. 숨으려는 동작이었다.
"나가면 안 돼요?"
"나가면 현장 이탈입니다. 그러면 악령 분류가 더 쉬워집니다."
"그럼 여기 있으면요?"
"소각 대상입니다."
"어느 쪽이 더 나아요?"
"둘 다 나쁩니다."
서하는 점퍼 주머니에서 낡은 봉인 테이프를 꺼냈다. 하청 지급품이라 오래 버티지 못한다. 대신 소각팀이 함부로 찢으면 절차 위반 흔적이 남는다.
그는 라우터 주변 바닥에 네모난 선을 만들었다. 그 안에 인수증 조각, 폐기 승인 잔상, 봉인 스티커 사진 번호를 적었다.
"여기 들어오지 마세요."
민채가 서하를 봤다.
"저한테 하는 말이에요?"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요."
자동문이 강제로 열렸다. 젖은 장화 하나가 문턱 안으로 들어왔다. 서하는 몸을 돌려 그 앞에 섰다.
하청 현장조사원은 본청 퇴마사를 막을 권한이 없다. 하지만 현장 물증 위에 서 있는 동안에는 책임자가 된다. 책임은 늘 권한보다 먼저 왔다.
민채가 물었다.
"이제 바뀌어요?"
서하는 보조 라우터 봉인 스티커를 투명 봉투에 넣었다. 패드에는 대가 후보가 아직 떠 있었다. 오래된 통화기록 한 줄이 조정 버튼 아래에서 기다렸다.
"아직 아닙니다."
"그럼요?"
"바꿀 증거를 빼내기 전에 들킨 겁니다."
그는 냉장고 뒤 전선을 잡고 힘을 줬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빨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