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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의 일기장1화

살인마의 일기장

살인마의 일기장

1화. 낡은 일기장의 주인

장맛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후텁지근한 공기가 서울 도심을 짓누르고 있었다. 광수대 미제팀 형사 강은호는 습관처럼 서촌 뒤쪽, 재개발 구역의 낡은 골목 끝에 자리한 헌책방 '시간의 모서리'의 문을 밀었다.

딸랑.

낮게 가라앉은 종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코끝을 찌르는 건 눅눅한 종이 냄새와 오래된 목재의 향, 그리고 미세하게 섞인 곰팡이 내음이었다.

"또 왔구먼, 강 형사. 오늘은 좀 늦었어."

책방 안쪽, 수북하게 쌓인 책 더미 사이에서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걸친 노주인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텁텁한 목소리를 냈다. 은호는 가볍게 목례를 건네며 익숙한 듯 서가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다. 이곳은 단순한 책방이 아니었다. 수십 년 전의 신문 스크랩부터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의 기록들까지, 세상에서 잊힌 과거의 파편들이 무질서하게 묻혀 있는 거대한 무덤과 같았다.

은호는 평소처럼 '사회/범죄' 섹션의 구석진 자리에 멈춰 섰다. 미제 사건들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닳도록 뒤적였던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묘하게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어제까지는 분명 보지 못했던,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 같은 물건.

서가 맨 아래 칸, 바닥의 먼지 속에 반쯤 묻혀 있던 고동색 가죽 수첩 하나가 은호의 눈에 들어왔다. 표지는 곳곳이 해지고 한쪽 모서리는 불에 그을린 듯 검게 타 들어가 있었다. 은호는 홀린 듯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가죽의 질감이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기분 나쁜 한기가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수첩을 펼치자 첫 페이지 한쪽에 정갈하지만 날카로운 만년필 글씨가 적혀 있었다.

[ 박민석 (朴珉錫) ]

이름 석 자 아래로 누렇게 변색된 종이 위에는 지독할 정도로 치밀한 '관찰 기록'들이 가득했다. 은호의 미간이 좁아졌다.

[ 2006년 5월 18일. 김윤아. 22시 12분 버스 하차. 도보로 5분 거리의 빌라 거주. 현관문 도어락 건전지가 다 되어가는지 알람 소리가 작아졌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올 것 같다. ]
[ 2006년 5월 29일. 놈들은 내가 남긴 담배꽁초가 이웃집 청년의 것이라 굳게 믿겠지. 멍청한 경찰들. 현장은 내가 설계한 대로 완벽하게 오염되었다. ]

"......!"

은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2006년 삼선동 연쇄살인 사건.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 때문에 억울하게 용의자로 몰렸던 이웃집 청년은 결백을 주장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사건은 진범을 잡지 못한 채 대한민국 미제 사건 목록의 깊은 곳에 봉인되었다.

경찰 내부 극비 문서에도 없는, 오직 현장에 있었던 '진범'만이 알 수 있는 뒤틀린 유희의 기록이 지금 은호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어라, 그게 거기 있었나? 이상하구먼. 방금 전까지는 못 본 것 같은데..."

어느새 다가온 노주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은호의 손에 들린 수첩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서가 맨 아래 칸을 몇 번이나 훑어본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그 반응은 흐릿했지만, 은호는 확신했다. 이 물건은 원래부터 거기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이거,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은호는 수첩을 품에 안은 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거리로 뛰쳐나갔다. 등 뒤로 서늘한 빗줄기가 쏟아졌지만, 품속의 수첩에서는 기묘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20년 전의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다는 듯이.


방 안, 책상 스탠드의 노란 불빛만이 정적을 지키고 있었다. 은호는 수첩을 펼쳐 놓고 다시 한번 '박민석'의 기록들을 읽어 내려갔다. 끔찍했다. 피해자의 고통을 유희처럼 즐기는 범인의 서술은 종이 너머로 피 냄새를 풍기는 것 같았다.

[ 경찰 놈들은 절대 나를 잡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들보다 한발 앞서 있고, 미래는 이미 나의 편이니까. ]

도발적인 문장을 마주한 순간, 은호의 가슴 속에서 억눌려 있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파란색 볼펜을 쥐었다. 그리고 범인의 오만한 문장 바로 아래, 잉크가 종이를 찢을 듯 힘을 주어 적었다.

[ 박민석, 네놈은 여기서 끝이다. 내가 반드시 잡는다. ]

그저 울분을 토해내기 위한 행위였다. 그런데 그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치익, 하는 환청이 들린 것 같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던 백지 위로 검은 반점 같은 것들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종이 너머 투명한 손이 펜을 들고 글씨를 써 내려가는 것처럼, 검은 잉크가 실시간으로 선을 그리며 문장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진한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요즘은 좀처럼 쓰지 않는, 만년필 특유의 쇠 냄새가 섞인 묵직한 잉크 향이었다.

은호는 경악하며 의자 뒤로 물러났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종이 위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가 번지며 서늘한 필체가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은호가 적은 파란색 글씨 바로 옆, 방금 잉크를 쏟은 듯 선명하고 축축한 문장 하나가 현재의 시간 위로 새겨졌다.

[ 누구지? 내 일기장에 낙서를 하는 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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